우리 옛 뿌리

조선과 왜(倭) 3 - 왜관(倭館)

從心所欲 2020. 9. 16. 17:58

왜구의 침략을 막기 위한 방편의 하나로 조선은 초기부터 왜인의 귀화를 허락하고 왕래와 무역 활동까지 인정해 주었다. 이를 빌미로 왜인들은 조선의 여러 항구에 함부로 드나들며 상업 활동을 하였는데, 처음에는 경상도의 연해안을 주로 드나들던 왜선들은 점차 지역을 확대하여 무질서하게 내왕하면서 때로는 조선 병선(兵船)의 허실을 염탐하기도 하였다.

이에 태종 7년(1407년) 7월에 경상도 병마절도사 강사덕(姜思德)이 흥리왜선의 정박처를 제한하는 방안을 포함한 각 포구의 방어 대책을 건의하였고, 같은 날 의정부(議政府)에서도 태종에게 이렇게 건의하였다.

 

"흥리왜선(興利倭船)이 연속하여 나와서 경상도에 이르는데, 일시에 혹은 수 십 척이 됩니다. 무역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걸핏하면 유련(留連)하고, 혹은 흩어져 민호(民戶)에 들어가서 강제로 매매하여 소동을 일으킵니다. 금후로는 정한 곳에 와서 정박한 왜선에겐 연해(沿海)의 각 고을 창고에서 묵은 쌀, 콩으로 시가(時價)에 따라 무역하여, 그 왜선으로 하여금 즉시 본도(本島)에 돌아가게 한 뒤에, 무역한 어염(魚鹽)을 관선(官船)에 싣고 낙동강(洛東江)을 거쳐 상도(上道)에 정박하여, 각 고을의 자원하는 인민(人民)에게 쌀과 베[布]를 가리지 말고 하고 화매(和賣)하여 창고에 넣도록 하소서."

▶유련(留連) : 객지에 머물러 돌아가지 않음.

▶어염(魚鹽) : 바다에서 나는 물고기와 소금. 해산물을 통틀어 이르는 말.

 

이에 따라 부산포(釜山浦)와 내이포(乃而浦)를 왜선의 출입처로 한정시키고 왜인의 육지 출입과 교역품을 통제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이곳에 일본의 사신과 상인들의 숙박할 수 있는 숙소인 객관이 지어지면서 이들 지역에 왜관(倭館)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부산포(釜山浦) : 지금의 부산진. 범일동, 좌천동 일대

▶내이포(乃而浦) : 제포(薺浦)라고도 했다. 지금의 창원시 진해구 웅천동 일대.

 

[<부산포초량화관지도(釜山浦草梁和館之圖)> 부분, 국사편찬위원회소장. 18세기 중엽에 초량 왜관 일대의 전경을 그린 그림 중의 초량왜관 부분이다. 일본인이 그렸기 때문에 왜관(倭館)을 화관(和館)이라고 하였다.]

 

이후 왜관은 왜인의 내왕과 통상을 허용한 지역인 이들 개항장(開港場)에 설치되어 교역과 사신 접대 등의 장소가 되었

다. 해안지역 뿐만 아니라 한양에도 왜관이 설치되었다. 실록에는 태종 9년(1409년)에 ‘민무구와 민무질의 서울에 있는 집을 헐어서 그 재목과 기와로 동평관(東平館)과 서평관(西平館)을 짓고, 그 값을 주도록 명하였다.’는 기사가 있다. 민무구와 민무질은 태종의 비 원경왕후의 형제들로, 어린세자를 통해 권세를 탐하려 했다는 죄목으로 유배형을 받아 사사된 인물들이다. 이 동평관과 서평관이 한양에 올라오는 왜인 사절을 위한 객관으로, 지금의 중구 인현동의 인현어린이공원 자리에 있었다.

해안의 왜관에는 시간이 흐르면서 객관 외에도 양국 상인이 교류하는 상관(商館), 대마도주가 파견한 대관(代官)이 업무를 보던 공관(公館) 창고 등이 지어졌다. 왜국사절의 한양으로의 상경이 거부되면 여기에서 외교적인 의례가 행해지기도 하고 조선 관리가 왜국사절을 접대하기도 하였다. 공적인 왜관 건물은 대체로 조선 측에서 지어 주었고, 건물이 낡거나 훼손되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주거 공간과 각종 상점, 절 등은 왜국에서 자재와 목수들을 데리고 와서 왜인들이 직접 지었다고 한다.

왜인들의 왕래가 늘어나자 이들과 조선에서 거주하는 항거왜인(恒居倭人)들과의 접촉이 빈번해지면서 여러 가지 폐단과 말썽이 일어났다.

 

【병조에서 경상도 수군도절제사(水軍都節制使)의 첩정(牒呈)에 의거하여 아뢰기를,

"부산포(富山浦)에 와서 거주하는 왜인(倭人)이 혹은 상고(商賈)라 칭하고 혹은 유녀(遊女) 라 칭하면서 일본(日本) 객인(客人)과 흥리왜선(興利倭船)이 이르러 정박하면 서로 모여서 지대(支待)하고 남녀가 섞여 즐기는데, 다른 포(浦)에 이르러 정박하는 객인(客人)도 또한 술을 사고, 바람을 기다린다고 핑계하고 여러 날 날짜를 끌면서 머물러 허실(虛實)을 엿보며 난언(亂言)하여 폐단을 일으킵니다. 빌건대, 좌도(左道) 염포(鹽浦)와 우도(右道) 가배량(加背梁)에다 각각 왜관(倭館)을 설치하여 항거(恒居)왜인(倭人)을 쇄출(刷出)하여 나누어 안치(安置)하여 거주하면서 살게 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하니, 명하였다. "본도(本道)로 하여금 나누어 안치(安置)할 즈음에 인심(人心)이 들떠 움직이지 말게 하라."】

(《태종실록》 태종 18년 3월 2일 기사)

▶첩정(牒呈) : 하급 관아에서 상급 관아로 올리는 공문서
▶상고(商賈) : 상인(商人)
▶유녀(遊女) : 직업적 혹은 비직업적으로 매음(賣淫)을 하는 여성.
▶염포(鹽浦) : 지금의 울산 북구 염포동 일대
▶가배량(加背梁) : 경상남도 거제

 

항거왜인(恒居倭人)들을 위한 마을인 왜리(倭里)가 왜관 주변에 조성되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인 것으로 보인다. 왜인에게 개방하는 개항장도 두 곳이 추가되어 4곳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다음 해에 이루어진 기해동정으로 인하여 이들 왜관은 곧 폐쇄되었다.

기해동정 후에 조선에서는 대마도에 항복을 권하고 대마도에서는 이리저리 재면서 조선을 달래느라 사신들의 왕래가 생기자 저마다 사신이라고 칭하는 자들이 나타나면서 왜관을 폐쇄한데 따른 문제도 생겨났다.

세종 1년인 1419년 9월 예조판서 허조(許稠)는 세종에게 이렇게 보고를 했다.

 

"처음에는 일본의 사신이 그래도 적더니, 근년에 와서는 칼 한 자루를 바치는 자까지도 사신이라 칭하고서, 자기가 나서서 물건을 매매하려 하고, 그들이 가지고 온 재화가 길에 연달아 있어, 역리들이 폐해를 입는 일이 적지 않고, 왕왕 예조(禮曹)에까지 와서 공을 따지고 성내어 소리치는 자까지 있으며, 국가에서 일 년 동안에 이들에게 내리는 양곡이 1만여 석이라는 많은 양에 달합니다. 지금 만약에 그들의 내왕을 허락한다면, 마땅히 도성 밖에다 왜관(倭館)을 지어 거기에 머물게 하고 도성 안에 들어오게 하지 말 것이고, 도도웅와(都都熊瓦) 및 종준(宗俊) 등의 문서를 가지고 온 자들은 예로써 접대하여 주고, 그들이 매매하는 재화는 자기가 운반해 다니게 하고, 그 밖에 등차랑(藤次郞) 등이 부리는 사람은 접대를 불허하여, 내왕의 개시를 엄격하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등차랑(藤次郞) : 왜국의 배 만드는 기술자로 남해도(南海島)에서 배를 만들며 조선을 도운 일이 있는데, 이후 대마도로 돌아간 뒤 대마도주와는 별도로 조선의 조정에 접근해왔다.

 

결국 조선은 조선과의 무역을 재개하게 해달라는 대마도주의 간청을 받아들여 1423년에 다시 부산포와 내이포 두 곳에 왜관을 허락하여 주었고, 1426년에는 염포(鹽浦)를 추가해줘 이후 조선의 왜관은 삼포(三浦) 체제로 유지되었다. 또한 내이포에는 30호, 부산포 20호, 염포 10호의 왜관을 설치하여 항거(恒居)왜인을 거주하게 하여, 조선을 찾아오는 왜인의 접대와 교역을 담당하도록 하였다.

 

초기 조선과 왜의 무역은 왜인들이 토산물을 가져와 쌀이나 곡식으로 바꿔가는 왜국의 일방적 판매행위에 불과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상호 교역의 형태로 바뀌었다. 조선에서는 쌀, 콩, 잣, 차, 인삼, 약재, 마포(麻布), 저포(紵布), 문방구, 불경, 범종 등을 팔았고, 왜국은 동, 유황, 소목(蘇木) 등과 향료, 염료, 약재 등 동남아 지역의 산물까지 들고 왔다. 무역은 조선 관리의 감시 아래 이루어졌는데, 왜구의 약탈물은 교역이 허락되지 않았다.

▶마포(麻布), 저포(紵布) : 삼실로 짠 천의 종류.

▶소목(蘇木) : 약재로 쓰이는 단목(丹木)의 붉은 속.

 

[<조선회도> 중 부분. 일본 교코대 타니무라 문고 소장, 부산포 왜관으로 추정되는 왜관 문밖에 모인 사람들은왜관 안에서 열리는 시장에 들어가려는 행렬이라 한다. 양흥숙 박사 자료]

 

[『조선 사료 집진』중 <부산포 왜관 회도> 부분. 이름은 다르지만 위 <조선회도>와 같은 그림임을 알 수 있다.  『조선 사료 집진』은 1930년대에 편찬되었다.]

 

세종 11년인 1429년부터는 금, 은, 표피(豹皮), 동전과 11새[升] 이상의 모시와 베 등은 팔지 못하도록 규정했다. 뒤로 가면서 교역물에 대한 제한이 점점 더 심해졌는데, 이는 조선 조정이 되도록 왜인과의 접촉을 차단하려는 조치였다. 왜관무역은 왜와 청나라 간의 무역이 성행하면서부터는 일상생활에 필요한 소금이나 채소 등만 매매될 정도로 매우 시들해졌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거래 금지품목에 대한 조선과 왜국 상인간의 밀매업이 성행하였다.

▶새[升] : 직물의 짜인 날을 세는 단위(單位). 팔십 올을 일승(一升)이라 함.

 

뿐만 아니라 왜인들이 왜관을 벗어나 멋대로 돌아다니는 일이 빈번해졌는데 이들 중에는 조선인을 포섭하여 조선의 사정을 정탐하는 자들도 있었다. 조선으로서는 경각심을 갖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고 이에 세종 16년인 1434년 예조에서는 왕에게 이런 보고를 올렸다.

 

"성상의 하교를 받자와 왜관(倭館)의 금방조건(禁防條件)을 상고하오니 《육전》에 갖추 실려 있사오매, 등록(謄錄)을 거듭 밝혀 거행하겠나이다. 동평관(東平館)·서평관(西平館) 및 묵사(墨寺)에 나누어 들은 객인(客人)이 무시로 서로 찾고 서로 왕래하옵는데, 근처에 사는 사람과 모리배들이 인연을 따라 서로 통하여 몰래 숨어서 무역(貿易)을 하므로 그 폐단을 막기 어렵사오니, 동관·서관을 합하여 한 관(館)으로 하시고, 빈집을 더 짓되, 사면의 난간과 담을 높이 쌓고서, 해가 돋은 뒤에 문을 열고, 해가 질 때에 문을 닫아 출입을 엄히 하며, 왜인의 물건을 무역하는 한잡인(閑雜人) 등은, 공청(公廳)에서 무역하는 때 이외에는 관내(館內)나 관외(館外)를 막론하고 객인(客人) 등과 더불어 몰래 숨어서 대화하는 자는 언제든지 즉시 구속하여, 위령률(違令律)에 의하여 과죄함으로써 잠통(潛通)하는 폐단을 막게 하옵소서."

▶등록(謄錄) : 이전의 전례(前例)를 적은 기록(記錄)
▶묵사(墨寺) : 지금의 성북동에 있던 옛 절.
▶한잡인(閑雜人) : 한인(閑人)과 잡인(雜人), 글에서는 무역행위를 허가받지 않은 사람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잠통(潛通) : 몰래 내통(內通)하다

 

이 건의는 받아들여져 시행되었다. 또한 1436년에는 왜관에 살던 왜인을 대거 자기나라로 돌려보내는 조치가 내려졌다. 삼포의 왜관 전체에는 원래 60가구만 거주하도록 되어있었는데, 왜인들이 이를 어기고 멋대로 인원수를 늘려 각 왜관마다 수백 명이 거주하는 상황에 이르자, 조선 조정에서 이들을 추방한 것이다.

 

삼포가 개방된 후 조선에 들어오는 왜인의 수는 해마다 증가하여 1439년에는 한 해에만 6,000여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조선에서는 입국하는 왜인에 대해 양곡을 지급했는데, 왜인들이 미곡을 더 받기 위해 실제 인원보다 많이 기재하여 식량을 더 타내곤 했다.

이에 조정은 이에 대한 대책을 왕에게 건의하였다.

 

의정부에서 병조 정문(呈文)에 의거하여 아뢰기를,

"왜객인(倭客人)이 식량을 많이 받을 양으로, 뱃사공 수효를 문서에는 많이 기재하고 실상은 그 수효를 줄여서 데리고 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름을 대조해서 수효를 점고할 때에는 먼저 온 딴 뱃사공을 불러다가 이름을 속이고 문서대로 충당하니, 방지하는 방책을 왜관에 마련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왜인 막사(幕舍) 둘레에다 목책을 설치하고 이 바깥 둘레에도 겹쳐서 설치한 다음, 서쪽과 북쪽에다 문을 두 곳만 만들어서 상시로 파수(把守)하고 출입하는 왜인 수효를 헤아려서, 간사한 왜인이 남의 이름으로 식료(食料)를 받아가는 폐단을 막는 것이니, 감사와 도절제사에게 타당한 방법인가, 아닌가를 함께 논의하여 알리도록 하는 것입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세종실록》 세종 20년, 1438년 1월 7일 기사)

 

조선은 왜관과 항거왜인의 집인 왜막(倭幕)의 주위에 목책을 설치하고, 그 바깥에는 성(城)을 쌓아 왜인이 외부와 접촉하는 것을 차단하는 조치를 더욱 강화하였다.

조선은 삼포를 개항하면서 대마도주에게 입국증명서인 문인(文引)을 만들어주고, 입국하는 왜인은 반드시 이를 소지하도록 하였다. 또한 사송선(使送船)과 세견선(歲遣船)도 그 수를 제한하였다. 사송선은 왜국이나 대마도(對馬島)에서 해마다 조선에 정례로 사신을 태워 보내오던 배이고, 세견선은 왜국 각 지방에서 교역을 위해 조선으로 건너오는 선박을 뜻한다.

대마도주의 세견선(歲遣船) 50척 중 25척은 내이포(乃而浦)에, 25척은 부산포에 나누어 정박하도록 하였고, 왜국의 왕사(王使)를 포함한 대마도와 왜국 각지에서 보내는 사송선은 임의대로 삼포 중 하나를 고를 수 있도록 하였으나 서로 겹치는 일이 없도록 하였다. 이것은 입항하는 선박이 1개소에 모두 함께 입항하면 혼잡하기 때문에 이를 피하기 위한 방안이었다. 따라서 대마도주는 문인(文引)을 발급할 때 정박할 항구를 지정하여 이를 시행하도록 하였다. 또한 입국 왜인의 수를 제한하기 위하여 배의 크기에 따라 대선은 40인, 중선 30인, 소선은 20인으로 인원을 규정하고, 증명서 없이 왕래하는 것을 엄금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규정들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자, 1443년 왜국에 통신사로 파견되었던 변효문(卞孝文)이 돌아오는 길에 대마도주와 보다 구체적인 조약을 체결하였다.

그 내용은 세견선은 50척으로 하고, 삼포에 머무르는 자의 체류 기간은 20일로 하며, 한양으로 상경한 자의 배를 지키는 간수인(看守人)은 50일로 하며, 이들에게 식량을 배급하도록 하였다. 또한 조선이 해마다 대마도주(對馬島主)에게 하사하는 쌀과 콩인 세사미두(歲賜米豆)는 200석으로 하고, 대마도는 특별한 사정이 있을 때 특송선(特送船)을 파송할 수 있도록 하였다. 아울러 고초도(孤草島)에서 고기잡이하는 자는 대마도주가 발행한 문인을 지세포만호(知世浦萬戶)의 문인(文引)과 바꿔 조업을 하고, 조업이 끝난 뒤에는 어선의 크기에 따라 어세(漁稅)를 내도록 하였다. 이것을 계해약조(癸亥約條) 또는 계해조약이라 하는데, 이 역시 왜인들은 제대로 지키지 않았다.

▶고초도(孤草島) : 고초도의 위치에 대해서는 전라남도 여수의 초도와 여수시 거문도, 혹은 거문도 북방의 역만도, 경상남도 고성군 수역 등으로 추정하는 의견들이 있지만 아직 결론은 나지 않은 상태이다.

 

 

참고 및 인용 :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고중세사사전(2007, 한국사사전편찬회),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