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멍암(두멍巖)과 여주읍내(驪州邑內)를 그렸다.
<두멍암(두멍巖)> 오른쪽에 적힌 글은 “양화촌을 지나 모질탄과 애질탄 두 여울에 이르니 배를 대기가 매우 어려웠다. 속칭 두멍암이다”라는 내용이다.
<여주읍내(驪州邑內)>에서는 내아(內衙)와 분아(分衙)를 표시하고 청심루(淸心樓)를 그렸다. 청심루 옆에 쓴 찬(讚)은 ‘진경이 좋은 것을 그림 같다고 하고, 그림의 경치[畵境]가 좋은 것을 진짜 같다고 한다.’는 내용이다.
청심루는 경기도 여주군(驪州郡) 여주읍(驪州邑) 한강(漢江)가에 있던 누(樓)로, 여주 절경의 하나로 꼽혔다. 예전에는 여기에 목은(牧隱), 포은(圃隱) 등 40여 문객(文客)의 시판(詩板)이 걸려 있었다고 한다.
1796년 정약용이 충주 하담으로 성묘하기 위해 내려갔다가 부친의 제사를 지내고 나서 한강에 배를 띄워 여주 청심루에 이르러 지었다는 <등청심루(登淸心樓)>라는 시가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에 전한다.
【수양버들 제방 머리에 단청 누각 말끔하고
맑은 강 수면에 비단무늬 평평하다.
누런 말, 가라말도 보배스런 말도 간 곳 없고
검은 학 타는 신선은 동구에 이름만 남겼구나.
외진 항구에 봄 지나 향기로운 풀 깔리고
비 그친 맑은 하늘 아래 멀리 돛이 또렷하다.
어촌의 박주로는 쉽게 취하지 않아
서북 하늘 뜬구름에 나그네 마음 흔들리네.】
▶누런 말, 가라말도 보배스런 말도 : 원문은 ‘황려보마(黃驪寶馬)’이다. 여주(驪州)의 옛 이름이 황려(黃驪)인데 여주에서 황마(黃馬)와 여마(驪馬)가 물에서 나왔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정약용은 그것을 황려(黃驪)와 보마(寶馬)로 표현하였다. 가라말은 검은 말을 뜻한다. |
여주 신륵사(神勒寺)와 동대탑(東臺塔)을 그렸다. 처음에 신륵사를 그리면서 절 모퉁이라는 뜻의 사우(寺隅)라고 적은 곳에 동대탑을 그렸다. 그리고 다시 사동대탑전면(寺東臺塔前面)이라 쓰고 탑을 더 크게 그리고는 옆에다 “절 모퉁이의 경치가 앞면의 것과 닮지 않은 듯하여 다시 고쳐 그렸다.”고 적었다.
흥원창(興元倉)은 고려 및 조선 시대에 남한강 수계(水系)인 현 강원도 원주 지역에 설치되었던 조창(漕倉)이다. 조창(漕倉)은 전국 각 지방에서 조세의 명목으로 거둔 미곡을 한양에 있는 경창(京倉)으로 운송하기 위해, 연해나 하천의 포구에 설치하여 운영하였던 국영 창고의 총칭이다.
원주라는 지명 때문에 남한강에서 섬강을 따라 원주까지 올라간 것처럼 오해되는 경우도 있지만, 위의 설명대로 흥원창은 원주지역의 남한강가에 설치되어 있었다. 남한강을 사이에 두고 여주 건너편이 바로 원주 관할이고, 그 지역 부론면에 흥원창, 흥창이라는 이름이 아직도 남아있는 것을 보면 흥원창(興元倉)은 남한강에서 보고 그렸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림에도 원주하류(原州下流)라고 쓰여 있는데 섬강의 하류는 곧 남한강과 만나는 곳이고 이곳은 지금도 흥원창 합수머리라고 불린다.
여기까지로 정수영의 1차 선유 여행은 끝났다는 주장이 있는가 하면, 여기서 남한강 줄기를 타고 계속 남쪽으로 내려가 충청도까지 다녀와 여행을 계속했다는 주장도 있다.
그래서 다음 그림이 1차 선유의 연속인지 2차 선유의 시작인지는 알 수 없다.
각기 소청탄(小靑灘)과 수청탄(水靑灘)이라는 여울 이름을 제목으로 붙였지만 여울을 그린 것이 아니고 그 주변의 풍경을 그렸다. 소청탄과 수청탄은 모두 경기도 양평 일대에 있는 여울이다. 예전에 지금의 양서면 대심리에 수청탄진이라는 나루가 있었다.
그림에 수청탄 옆에 헌적별업(軒適別業)이라고 쓰여 있다. 헌적(軒適)은 여춘영(呂春永)이라는 인물의 호이다. 별업(別業)은 본가 밖에 경치(景致) 좋은 곳에 따로 지어 놓고 때때로 묵으면서 쉬는 집, 즉 별장(別莊)을 뜻한다. 양평 지역의 옛 지명이 양근(楊根)이었는데, 양근은 함양 여씨(咸陽 呂氏)의 세거지(世居地)이기도 했다 한다.
오른쪽은 앞의 수청탄 그림의 끊어진 부분으로, 숲속의 집은 여춘영의 별장일 것이다.
이어서 휴류암(鵂鶹巖)을 그렸는데, 배에는 사공을 제외하고도 5명이 타고 있다. 배 위쪽에 쓰여진 글에 5명의 면면이 나온다.
“이 바위를 지날 때 홀연히 피리소리가 들려 그 소리를 찾아 배를 댔다. 고기 잡는 노인이 물가에 낚싯대를 드리우고 앉아 손으로는 해금을 타고 입으로는 풀피리를 불고 있었다. 이야기를 하며 술을 주고 드디어 함께 배를 타고 대탄(大灘)에 있는 이상사(李上舍)의 집으로 향하였다. 이 여행은 병진년 여름, 동갑인 이윤일(李允一), 임학이(任學而)와 함께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 청심루에서 노닐었을 때이다.”
▶병진년 : 1796년 |
글 내용을 다시 되새겨 보면 정수영이 친구 두 명과 함께 여행을 떠나 이상사와 어울려 선유를 하던 중, 들려오는 피리소리에 끌려 한 노인을 만나게 되어 함께 이상사의 집이 있는 대탄(大灘)으로 가는 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홀로 풍류를 즐기고 있다가 졸지에 일행을 만나 배에 오르게 된 인물은 누구일까? 배 오른쪽에 네 줄로 쓰인 글 속에 해답이 있다.
“관(冠)을 쓴 사람이 헌적 여춘영이다. 관만 쓰고 우리를 배웅하러 강머리에 나왔는데, 손을 잡아 배에 태우고 사공을 불러 출발을 재촉하였다.”
옛 그림을 보면서 현대인이 느끼고 싶었던 옛 분들의 여유와 정취가 아마도 이런 것이 아닐까!
난독증이 없이 제대로 읽은 것이 맞는다면, 여춘영과 정수영은 생면부지의 관계다. 서로 풍류를 즐기다 강가에서 처음 만난 사이다. 그러니까 정수영이 벗 여춘영을 찾아갔다는 설명은 사실과 다른 것이다.
여춘영은 자신의 문집인 「헌적집(軒適集)」에 이 날의 일을 이렇게 적었다.
“군방(君芳) 정수영과 학이(學而) 임희하(任希夏)와 윤일(允一) 이영갑(李永甲)과 같이 여주에 놀러가서 청심루에 이르러 사군(使君) 박황(朴鎤)에게 자못 환대를 받았다”
군방(君芳)은 정수영의 자이다. 여춘영이 정수영보다 아홉 살이 많았기에 지우재(之又齋)라는 호 대신에 자를 썼을 것이다. 임희하와 이영갑에 대한 인물 정보는 확인할 수 없지만 정수영의 친구라는 점을 감안하면 학이(學而)와 윤일(允一) 역시 자일 가능성이 높다. 위의 대탄에 집이 있다는 이상사(李上舍)는 이름이 아니고 이생원이나 이진사라는 의미다. 상사(上舍)는 조선시대에 생원시(生員試)나 진사시(進士試) 같은 소과(小科)에 합격한 사람을 부르는 호칭이었다. 여춘영은 뒤늦게 53세 때인 1786년에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사군(使君)은 주(州)나 군(郡)의 장관에 대한 존칭이다. 그러므로 이들 일행을 환대했다는 박황은 당시 여주목사였을 가능성이 높다.
조선 후기에 정초부(鄭樵夫)라는 노비출신 시인이 있었다. 조선 말기에 활약한 문인들의 시를 선별하여 수록한 책인「병세집(幷世集)」에 그의 시가 무려 11수나 실려 있을 정도로 당대에도 시인으로서의 이름이 높았던 인물이다. 초부(樵夫)는 나무꾼이라는 뜻이기에 정초부(鄭樵夫)라는 이름은 요즘으로 치면 예명이었다.
2011년 성균관대 한문학과 안대회교수가 그의 한시집(漢詩集)인 「초부유고(樵夫遺稿)」를 발굴해내면서 정초부의 실제 이름이 이재(彛載)임을 밝혀냈다. 노비였기에 성은 따로 없었던 것 같다. 또한 여춘영의 「헌적집(軒適集)」에서 정초부와 관련된 기록을 찾아내 정초부의 생몰연도와 정초부의 주인이 바로 여춘영이었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정초부는 나무를 하는 노비였는데 어린 시절, 낮에는 나무를 하고 밤에는 주인집 자제들이 배우는 글을 어깨너머로 배웠는데, 이를 기특하게 여긴 여춘영의 아버지 여선장(呂善長)이 한자를 가르쳤다고 한다.
기록에 의하면 정초부는 1714년 생으로 여춘영보다 스무 살이 많았다. 여춘영은 자기 집 종이었던 정초부를 친구처럼 대하면서 같이 시를 짓기도 했다. 또한 여씨 집안에서 노비문서를 불살라 노비의 신분을 면하게 해준 뒤로 정초부는 갈대울이란 곳에 따로 살았다. 여춘영은 정초부의 재능을 아껴 한양의 사대부들에 정초부의 시를 널리 알리기도 했다고 한다.
1789년 정초부가 76세로 사망하자 여춘영은 그를 기리는 제문을 짓고 자신의 아들 둘을 데리고 묘소를 찾았으며, 돌아오는 길에 이런 시도 지었다고 한다.
【저승에서도 나무하는가?
낙엽은 빈 물가에 쏟아진다.
삼한(三韓) 땅에 씨족(氏族)이 많으니
내세(來世)에는 그런 집에 나시오.】
뿐만 아니라 여춘영은「헌적집(軒適集)」에 비록 짤막하기는 하지만 그를 추억하는 글[憶樵夫] 12개를 남겼는데 그 중에는 이런 구절도 있었다.
“어릴 때는 스승, 어른이 되어서는 친구였지만, 시에 이르러서는 오직 내 초부뿐이다.
(少師而壯友 於詩惟我樵)”
참고 및 인용 : 船遊와 遊山으로 본 정수영의 《한임강유람도권》고찰(한상윤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원),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한국학중앙연구원), 여유당전서(심경호, 한국인문고전연구소),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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