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에 국립중앙박물관이 ‘우리 강산을 그리다: 화가의 시선, 조선시대 실경산수화’라는 타이틀로 특별전을 개최하였었다. 정선, 김홍도, 강세황, 김응환을 비롯하여 한시각, 조세걸, 김윤겸, 김하종 등 고려시대부터 조선 말기까지의 화가들이 그린 다양한 실경산수화를 선보이는 자리였다. 처음 계획했던 두 달간의 전시는 뜨거운 호응에 힘입어 다시 3주간의 앙코르 연장 전시로까지 이어졌다.
전시 기간 중에 한강과 임진강을 유람하면서 그린 그림이라는 수식어로 언론에 여러 차례 소개된 전시물이 있었다. 정수영(鄭遂榮)의 《한임강명승도권(漢臨江名勝圖卷)》이다. 《한임강유람도권(漢臨江遊覽圖卷)》으로 불리기도 하지만 소장하고 있는 국립중앙박물관의 소장 목록은 《한임강명승도권》이다.
이 도권(圖卷)을 제작한 정수영(鄭遂榮, 1743 ~ 1831)은 전문 화가가 아니다. 조선 초기의 대표적 유학자이자 문신이었던 정인지(鄭麟趾)의 12대 후손으로, 평생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기행(紀行)과 탐승(探勝)을 하고 시·서·화를 즐기며 일생을 보냈던 선비였다.
그의 증조부였던 정상기(鄭尙驥)는 몸이 약하여 과거를 단념하고 학문에만 몰두하던 중, 전국을 오랫동안 답사한 뒤 ≪동국지도(東國地圖)≫를 제작하였다. 이 지도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축척법을 사용함으로써 우리나라 지도의 정밀성을 높이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잘 알려진 ≪동국여지도(東國輿地圖)≫가 ≪동국지도≫를 근간으로 했다는 사실은 그 발문에도 기록되어 있다. 이후 정상기의 아들과 손자도 지도 제작을 계승하였고 벼슬은 하지 않았다. 따라서 정수영이 벼슬하지 않은 것과 허다한 기행(紀行)은 집안 내력인 셈이다.
증조부 정상기는 남인(南人)으로 알려져 있다. 어쩌면 몰락한 남인 세력이었던 탓에 집안이 아예 벼슬에 대한 뜻을 져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대대로 성호(星湖) 이익(李瀷) 집안이나 강세황(姜世晃) 등 남인(南人)과 북인(北人) 계열 인사들과의 교유가 활발하였다. 정수영은 이들 사이에서 강세황, 허필, 정철조와 더불어 ‘화안고사(畵眼高士)’로 일컬어질 만큼 그림에 대해서는 관심과 조예가 있었다.
정수영은 당시의 사대부들이 그랬던 것처럼 중국에서 전래된 화보와 산수판화(山水版畵)를 임모(臨摸)하거나 방(倣)하며 그림을 연마하면서 초기에는 주로 화보를 참조하며 정형산수화를 그렸다 한다. 그러다 50대 들어 기행사경(紀行寫景)에 나선 이후부터는 정형산수와 진경산수를 모두 말년까지 꾸준히 그렸다. 어느 쪽을 그리든 필묵법에 커다란 차이가 없는 것은 다른 문인화가들과 마찬가지였다.
《한임강명승도권》은 그가 한강과 임진강 물길을 따라 이동하면서 만나는 경치를 자유롭게 두루마리에 기록한 일종의 여행일기다. ‘명승도권’이란 이름이 붙었지만 꼭 명승(名勝)만을 담은 것은 아니고 그때그때 화가의 감흥에 따라 그림을 그렸다. 도권(圖卷)은 한 번의 여행으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고, 1796년부터 2년 동안 적어도 3번 이상에 걸친 여행의 기록을 담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먼저 첫 번째로는 1796년 여름, 한양의 한강 어딘가에서 배를 타고 경기도 여주를 거쳐 강원도 원주 하류까지 갔다가 다시 여주로 돌아왔다. 두 번째 여행은 임진강 상류의 경기도 포천 지역에 소재한 네 곳의 명승지를 방문한 것이라는 의견도 있고, 이와는 달리 두 번째도 한강의 양평지역과 여주를 다시 방문했다는 주장도 있다. 그 외에 지금 서울의 금천구, 관악구, 도봉구와 경기도 안양시, 북한의 토산군 지역의 그림들이 있는데, 이곳 유람 시기와 일정에 대해서는 앞의 유람과 연계가 된 것인지 아니면 별도의 여행이었는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한임강명승도권》은 전체 길이가 15m가 넘는 두루마리 그림이다. 여행의 현장을 즉석에서 그리고, 때로는 현장의 상황을 전달하는 글도 함께 실었다. 유탄(柳炭)과 끝이 거의 닳은 붓을 거칠게 사용하여 자유분방한 필치로 그린 그림들이 정수영의 강한 개성을 보여준다는 전문가들의 평이다. 선비 화가가 추구한 여기적(餘技的)인 예술의 특징을 잘 보여 주는 편안하고 투박한 필치라는 표현도 있는데 세련된 전문가의 필치가 아니라는 점을 돌려 말한 듯하다. 사실적 묘사보다는 자신이 본 장면의 흥취와 분위기를 표현한 사의적 진경산수화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소개되고 있기도 하다.
▶유탄(柳炭) : 버드나무 숯 |
《한임강명승도권》은 대부분 26개의 그림으로 구성된 것으로 보지만 연구자에 따라서는 더 많게 나누기도 한다. 그림들이 두루마리에 연이어 그려진데다, 한 그림에 여러 경물(景物)을 함께 그린 것들이 있어 해석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정수영은 나름 네모 형태의 먹칠로 그림을 구분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에 따르면 그림은 26개 장면이다.
화제(畵題)를 임가애(林可愛)로만 적어 놓아 당황스럽다. ‘사랑할만한 숲‘이라는 뜻이다.
다행히 그림 위에 적힌 제발(題跋)을 통하여 장소에 대한 실마리를 찾을 수가 있다. “완암시로(浣巖詩老)의 시구에 ‘안개 속 무수한 꽃 외딴 섬 나타나고, 돛대 앞 향기로운 풀 이릉(二陵)이 오누나’라고 한 것은 생각건대 이곳을 지날 때 지은
시일 것이다”라는 것이 제발의 내용이다. 완암((浣巖)은 조선 후기의 위항 시인 정래교(鄭來僑, 1681 ~ 1759)의 호이다. 시구 속의 이릉(二陵)은 선릉(宣陵)과 정능(靖陵)을 가리킨다고 하니, 이 숲은 지금의 강남구 삼성동에 있던 어떤 지역을 그린 것이다. 선릉과 정릉 주변은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여 문인들이 풍류를 즐기던 도성 근교의 명승 중 하나였다고 한다. 그림에 따르면 이곳이 정수영의 선유(船遊) 출발지가 된다.
▶ 선릉(宣陵)은 성종과 계비 정현(貞顯) 왕후의 능이고 정능(靖陵)은 중종의 능이다. |
두번째 그림에는 “우미천(牛尾川)에서 뱃사람을 위하여 잠시 머물러 배를 묶어둔 곳에서 쉬다”라고 적었다.
우미천은 경기도 구리시 아차산에서 발원하여 한강으로 가는 작은 하천이었다. 지금은 매립되어 물줄기를 볼 수 없다.
여행의 첫 걸음은 정수영 단신이었는지 배 위에는 뱃사공과 둘 뿐이다.
세 번째 그림에서는 한강의 뱃길에서 한양 수계를 벗어나며 한양 쪽을 돌아본 광경을 파노라마처럼 펼쳐놓았다.
‘양주구계(楊州龜溪)’, ‘우미천심씨정(牛尾川 沈氏亭)’, ‘용당우(龍堂隅)’라는 지명 등이 표시되어 있다. ‘용당 모서리’라는
뜻의 용당우(龍堂隅)의 용당이 어느 곳인지는 정확하지 않으나, 가운데 화폭에 원릉(元陵)으로 표시된 지점으로 미루어, 지금의 미사대교와 팔당대교 사이의 어느 지점으로 짐작된다. 원릉(元陵)은 구리시에 있는 영조와 그의 계비 정순왕후
김씨의 능이다.
가운데 화폭 멀리에 수락(水落), 도봉(道峯), 삼각(三角) 세 개의 산을 표시하였다. 수락산은 애초에는 수악산(戍岳山)으로 적었다. 그림 왼쪽에는 미호(渼湖)와 화오(花塢)라는 지명이 적혀있는데 그림의 지역은 현재의 남양주 수석동 미음나루 주변으로, 강동대교 북단의 토평IC에서 한강 상류 방향의 미호박물관이 있는 지역까지를 아우른다.
미호(渼湖)라는 글자 밑의 기와집들은 석실서원(石室書院)을 그린 것으로 보인다. 석실서원은 김창협, 김창흡형제의
선조인 병자호란 때의 척화파 김상용(金尙容)과 김상헌(金尙憲) 두 형제를 기리기 위하여 건립된 안동 김씨를 대표하는 서원이었다. 미호(渼湖)는 예전에 물길이 잔잔했던 이 지역 한강을 가리키는 이름이기도 했지만 또한 입양되어 김창협(金昌協)의 손자가 된 김원행(金元行)의 호이기도 했다.
<고산 이공존오 서원운(孤山 李公存吾 書院云)>
고산서원(孤山書院)은 경기도 여주시 대신면 보통리(甫通里)에 있던 서원이다. 숙종 12년인 1686년, 고려 말기의 문신 이존오(李存吾)와 조선 중기의 문신 조한영(曺漢英)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세워졌지만 후에 흥선대원군에 의해 철폐되었다.
<추읍산(趨揖山)>
경기도 양평군 양평읍 동남쪽에 위치한 해발 583m의 추읍산(趨揖山)은 "맑은 날 산 정상에서 일곱 고을이 내려다보인다."고 하여 유래한 이름이라는 설도 있고, 유명한 지관이 마을 뒷산에 올라보니 이 산이 '용문산을 뒤쫓는 형상'이므로 추읍산이라 명명했다는 설도 있다.
추읍산 옆에 쓰여진 글은 “갈산(葛山)으로부터 보며 지나면 남쪽 아래로 내달리는데 풍경이 사랑하거나 완상할만하지 못하다. 겨우 통과하면 비로소 전중(典重)한 형세가 있다”는 내용이다.
<용문수색(龍門秀色)>
추읍산에 이어 용문산(龍門山)을 그리고 “용문의 빼어난 형색이 손에 잡힐 듯하다”고 썼다.
그러나 그린 자리가 옹졸하여 정수영의 칭찬이 무색한 느낌이다.
참고 및 인용 : 船遊와 遊山으로 본 정수영의 《한임강유람도권》고찰(한상윤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원), 한국 역대 서화가 사전(박정애, 2011, 국립문화재연구소),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한국학중앙연구원), 정수영의《之又齋山水十六景帖》연구(박정애),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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