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수영과 여춘영은 처음 만난 후 서로 의기가 투합했는지 1797년에는 같이 금강산을 여행하였다. 그때 정수영은 내외금강(內外金剛), 해금강(海金剛) 등의 명승지를 그림에 담아내 또 다른 기행첩인 《해산첩》을 만들었다.
올 봄 마이아트옥션에 정수영의 그림이 경매예상액 2천만 원 ~ 4천만 원에 출품되어 3억1천만 원에 낙찰된 일이 있다.
<송하관폭도(松下觀瀑圖) 천신수견(天神隨見)>이라는 제목의 그림이다.
군가거폭기리(君家去瀑幾里) 그대 집은 폭포에서 몇 리나 되나
군경척험기조(君經陟險幾遭) 그대 험한 곳을 몇 차례나 올라 보았는가
심망천신수견(心忙天神隨見) 마음을 재촉하면 천신(天神)을 따라 보게 되리니
망각하보성로(忘却下步省勞) 아래에서 걷던 생각을 잊으면 힘이 덜 들리라
이 제발 끝에 달린 관지에는 만계(蔓溪)가 그리고 헌적(軒適)이 제(題)했다고 적었다. 만계(蔓溪)는 정수영의 또 다른 호이다. 서로 풍류를 즐기다 만난 두 사람의 교유는 이렇게 이어졌다.
《한임강명승도권》에 그려진 휴류암(鵂鶹巖)의 위치에 대해서는 아직도 명확한 결론이 나지 않은 상태이다. 이 그림을 해석한 초기에는 충청도 직산현의 읍지에 휴류암이라는 지명이 있어 충청도로 추정했었다. 그런 이유로 정수영이 뱃길을 따라 충청도까지 다녀왔다는 해석이 나오게 된 것이다. 그런가 하면 임진강 연천군 왕징면의 장파나루에 있는 바위로 보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그림의 흐름으로 보면 임진강 쪽은 너무 뜬금없어 보인다. 그 주장에 따른다면 의관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여춘영을 남한강에서 임진강까지 데리고 갔거나 여춘영을 임진강가에서 만났다는 이야기가 되기 때문이다. 논란의 불씨는 남한강가에 휴류암이라 붙여진 장소가 없기 때문인데, ‘휴(鵂)’는 수리부엉이이고 ‘류(鶹)’는 부엉이이다. 한문으로 어렵게 휴류암(鵂鶹巖)이라 써서 그렇지, 옛적에 부엉이바위나 올빼미바위라는 이름 하나 없는 지역이 얼마나 됐을까? 남한강가 어디에도 그런 바위 하나쯤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어지는 그림은 <신륵사 동대동적석(東臺東積石)>이다. 신륵사의 동대 동쪽에 있는 바위가 꽤 볼만했는지 바위 하나만으로 화폭을 채웠다.
그리고는 신륵사 동대를 다시 또 그렸다. 앞에 그린 동대 그림이 여전히 마음에 안 들었든지 아니면 동대가 있는 주변풍경이 썩 마음에 들었든지 둘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여주읍도 또한 다시 그렸다. 앞의 그림보다는 여주관아와 청심루에만 치중하여 더 가깝게 보고 그렸다. 다음 그림은 재간정(在澗亭)인데 북한산 동쪽 우이동에 있는 우이동계곡의 우이구곡(牛耳九曲) 중 하나로 재간정이 꼽혔기에 그 곳으로 추정하고 있다. 갑자기 한강에서 북한산으로 장소가 옮겨진 것으로 미루어, 이 그림은 어느 때인가 따로 그린 것으로 보여진다. 따라서 정수영의 한강 선유 그림은 앞의 여주읍치(驪州邑治)가 끝인 셈이다.
이후 이어지는 세 폭의 그림은 경기도 영평천(永平川)에 있는 경물을 그린 것이다. 영평천은 예전의 영평현(永平縣), 곧 지금의 포천시 이동면의 각흘봉과 박달봉 사이에서 발원하여 포천 북부를 거쳐 한탄강(漢灘江)으로 흘러드는 물줄기이다. 정수영은 이곳에 있는 백운암, 창옥병 초입, 금수정을 그렸다.
화제는 사암서원전천백운담(思菴書院前川白雲潭)이라고 썼다. 사암서원 앞 시내에 있는 백운담이다. 백운담 뒤쪽의 바위에는 토운상(吐雲床)이라 표기를 했다. ‘구름을 토해내는 상(床)’ 앞에 ‘흰 구름 떠도는 못’이라니, 옛 사람들의 작명 센스에 감탄이 나온다.
나무에 갈색 담채를 입힌 것을 보니 때가 가을이었던가 보다.
‘창옥병 초입(蒼玉屛 初入)’이라 쓰고 중경(中景)에 사암서원(思菴書院)을 그렸다. 그러니까 사암서원은 창옥병 가는 길 근처에 있었던 모양이다. 동서의 붕당 대립이 본격화되는 와중에 서인의 영수로 지목되었던 사암(思菴) 박순(朴淳)을 배향했던 사원으로 짐작되지만 더 이상의 정보는 없다. 18세기 후반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지도책 『여지도(輿地圖)』에 "창옥병에 박사암서원(朴思菴書院)이 있다."고 표기되어 있는 정도다. 박순은 동서당쟁(東西黨爭)중에 탄핵을 받고 영평(永平) 백운산(白雲山)에 은거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금수정(金水亭)은 조선 전기에 지어진 정자로, 예전부터 영평8경(永平八景)의 하나로 꼽혀왔다고 한다. 영평천 변의 수면에서 8m가량 되는 절벽 위 평평한 곳에 세워졌다고 하는데 그림의 중앙에 위치해 있다.
금수정 건너편 절벽이 창옥병(蒼玉屛)이다. 푸른 바위가 옥병풍처럼 벌여 있다 하여 생긴 이름으로 역시 영평8경 중의 하나였다.
다음 그림은 영평천에서 한탄강으로 옮겨진다.
한탄강의 화적연(禾積淵)이다. 화적연은 원래는 ‘볏 짚단을 쌓아 올린 것 같은 형상의 바위가 있는 곳의 못’이라는 이름이었겠지만, 못은 물속에 있어 보이지 않고 그곳에 수면 위로 높이 13m에 달하는 큰 바위가 우뚝 솟아 있어 이제는 그 바위를 가리키는 이름처럼 되었다. 이곳이 영평8경 중 1경이다.
겸재 정선의 《해악전신첩》중 <화적연>은 꽤나 많이 알려진 그림이다. 전문화가와 여기화가의 그림 실력을 비교하는 것은 의미없는 일이다.
참고 및 인용 : 船遊와 遊山으로 본 정수영의 《한임강유람도권》고찰(한상윤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원),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한국학중앙연구원), 마이아트옥션,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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