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수화(山水畵)는 실제의 풍경을 그리기도 하지만, 생각 속의 자연도 그린다. 그것 역시 산수화의 오랜 전통이기도 하다. 실제 풍경을 그리든 생각 속의 자연을 그리든 산수화는 단순히 자연 경관을 그리는 것이 아니다. 산수화는 그리는 화가의 자연에 대한 사고와 철학을 드러내는 결과물이다. 그런 점에서 산수화는 서양의 풍경화와는 그 결이 다르다. 마음속에 있는 산천을 담아내는 관념산수(觀念山水)라는 독특한 영역이 형성된 이유이기도 하다.
사계절의 경치를 그리는 일은 동양 산수화의 오랜 전통이다. 이런 전통은 ‘산수는 계절, 시간, 거리, 각도와 보는 시간과 위치에 따라 제각기 다르다’는 곽희의 「임천고치(林泉高致)」의 <산수훈(山水訓)>과 같은 화론(畵論)적 관점을 바탕으로 한다. 또한 사계절 자연의 변화를 통하여 삼라만상에 내재된 우주적인 질서와 이치를 살피고 표현한다는 철학적 관점도 있다. 자연 곧 물상을 깊이 관찰하여 궁극적 지식에 도달한다는 격물치지(格物致知)와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사시팔경도(四時八景圖)는 계절에 따른 자연의 변화를 세밀히 살펴 표현하는 산수화 양식이다. 사계절인데 8개의 그림을 그리는 것은 계절을 더 조밀하게 나눈 때문이다. 즉 사계절을 이른 때와 늦은 때로 한 번 더 나누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여덟 장면을 여덟 폭의 화면에 표현한 그림을 사시팔경도 또는 사계팔경도(四季八景圖)라고 한다.
이와 유사한 양식으로 소상팔경도(瀟湘八景圖)도 있다. 중국 호남성 소수(瀟水)와 상강(湘江)이 만나 동정호로 흘러드는 지역의 승경(勝景)을 각 계절에 반영하여 그리는 것이다. 하지만 소상팔경도(瀟湘八景圖)가 실재하는 풍경을 화재(畵材)로 삼는 반면, 사시팔경도는 대개가 관념산수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화가에 따라 그려지는 대상은 제각각이지만 사시팔경도는 대체로 봄은 온화하고 부드러우며 곡선적인 필법으로 그려진다. 반면에 겨울은 거칠고 강한 필묵법이 구사된다. 여름은 녹음과 물과 비로 표현되며, 가을은 쓸쓸하고 스산한 모습을 띠는 것이 일반적이다. 계절의 차이를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는 화폭마다 필획의 굵고 가늠, 크고 작음, 강약, 농담(濃淡)이 다르고 묵법도 달라야 한다. 따라서 상당한 필력을 갖추지 않고는 좋은 그림을 만들어내기 어려워, 여기로 그림을 그리는 문인화가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운 화재이다.
‘전(傳) 안견(安堅) 《사시팔경도(四時八景圖)》’는 조선 초기의 대표적인 사시팔경도이다. 여기서 ‘전(傳) 안견(安堅)’이라고 하는 것은 실제로 안견이 그렸을 가능성보다는 안견 화풍의 그림이라는 의미에 더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안견(安堅)은 세종 연간에 왕성하게 활동하며, 안평대군(安平大君)이 꿈에서 본 것을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로 그려낸 화가로 유명하다. 안견은 곽희(郭熙) 화풍을 토대로 여러 화풍을 종합하고 절충하여 독자적 화풍을 이루어 후대 조선 화단에 큰 영향을 미친 화가로 알려져 있다. 조선초기부터 중기까지 대부분의 화가들이 그의 화풍을 이어받았다고 할 정도이다.
안견파는 산을 크고 웅장하게 표현하고, 인물이나 동물을 작게 그리는 특징을 가졌다. 또한 따로 떨어져 있는 풍경과 사물을 조화롭게 통일시켜 구성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붓놀림에 있어서도 필체가 드러나지 않게 감추는 경향을 보였고, 화폭 한쪽 끝 부분에 치우친 구도, 풍경과 물체 사이에서 펼쳐지는 수면과 안개 등에 의해 확산되는 공간 등이 안견파의 특징이라고 한다. 중국에서 건너온 화보를 통하여 그림을 습득하였기 때문에, 당연히 그려지는 산수는 중국풍이었다.
500년이 넘은 그림이다 보니 그림에 변색이 왔다.
통상 사시팔경도는 화첩이나 병풍으로 제작되었는데, 이렇게 한 계절의 이른 때와 늦은 때가 한 쌍을 이룬다. 즉, 화첩을 펼치면 <초춘> 그림이 오른쪽이 되고 <만춘> 그림은 왼쪽이 된다. 그런데 그림의 무게 중심이 오른쪽 그림은 오른쪽에 왼쪽 그림은 왼쪽에 있음을 보게 된다. 이러한 구도를 서울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 안휘준 교수는 편파구도(偏頗構圖)라고 불렀다.
그러나 <초춘> 그림과 <만춘> 그림을 함께 펼쳐놓고 보면, 양쪽 끝에 무게가 주어져 있는 좌우의 두 폭 그림이 균형 잡힌 대칭구도의 효과를 낸다. 이러한 구도적 특징은 다른 계절의 경우에도 동일하게 적용되었다.
사시팔경도에 그려지는 경치는 구체적인 어떤 장소가 아니다. 대부분은 화가가 머릿속에 그린 형상이다. 사시팔경도에서 눈여겨 볼 것은 장소가 아니라 그 속에 표현된 계절에 따른 물상(物象)의 변화다. 화가는 계절에 따른 자연의 미묘한 변화를 표현하고자 애를 썼으니 보는 이도 그 점을 살펴봐야 한다.
예를 들어 <만하(晩夏)>를 보면 근경의 나뭇잎 무성한 활엽수들이 모두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그림 속에는 지금 아주 큰 바람이 불고 있는 것이다. 좀 더 자세히 보면 중경의 나무들도 같은 방향으로 기울어져 있다. 화가는 원경의 커다란 바위도 같은 방향으로 기울게 그려 전체적으로 화폭의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부는 세찬 바람을 강조하려 한 것 같다. 하단의 다리 위에는 도롱이를 걸친 농부가 다리를 건너고 있다. 비까지 온다는 얘기다. 다리 밑 개울도 물이 불어난 모양이고 왼쪽에는 바위를 타고 물줄기가 쏟아져 내린다. 멀리 보이는 산도 비속에 봉우리만 흐릿하게 보인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풍경으로 여름을 나타낸 것이다.
전(傳) 안견(安堅) 《사시팔경도(四時八景圖)》는 경물들이 각기 따로 떨어져 유기적인 연결이 되어 있지 않았으면서도 서로 조화를 이루며 하나의 통일된 경치를 이루는 특징을 보여준다. 또한 경물들 사이는 수면과 연운(煙雲)을 따라 넓은 공간과 여백이 전개되어 있다. 이러한 경물의 조화된 구성과 확대지향적인 공간개념이 바로 안견파의 산수화가 보이는 큰 특징이라 한다.
참고 및 인용 : 한국의 미술가(안휘준 외, 2006, 사회평론), 이렇게 아름다운 우리그림(박은순, 2008, 한국문화재보호재단), 한국 미의 재발견 - 회화(이원복, 2005, 솔),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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