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회화의 역사는 1550년 중종 연간까지를 초기, 이후 1700년 숙종 연간까지를 중기, 그 이후를 후기로 시대구분하고 있다. 그런데 이 초기에서 중기까지는 앞에서 본 안견파 화풍의 그림들이 유행하였고 그 뒤를 이어서는 절파(浙派)화풍의 산수인물도가 그려졌다고 한다.
‘안견파 화풍’이라는 말은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안휘준 교수가 조선 초기의 화풍을 설명하면서 안견과 그의 화풍을 따랐던 화풍을 일괄하여 지칭한 용어이다. 그의 정의에 의하면 안견파 화풍은 곽희파(郭熙派) 또는 이곽파(李郭派)와 밀접한 연관성을 갖고 있다.
곽희는 삼원법(三遠法)의 이론을 정립하고 산수화의 취경법(取景法)을 총괄한 화론집(畵論集) 『임천고치(林泉高致)』를 지은 11세기 북송대(北宋代)의 대표적 화원이다. 곽희(郭熙)는 자신보다 1세기 앞서 북방계 산수화 양식을 완성시켰다는 평을 받은 같은 송나라의 이성(李成)과 북종 산수화파의 선도적인 화가로 꼽히는 범관(范寬)의 화풍을 총합하여 화북(華北)산수화를 대성했다고 일컬어진다. 이곽파(李郭派)라고 부르는 것은 이성과 곽희의 화풍을 한 계열로 보는 것이다.
이성과 곽희의 화풍은 대체로 뭉게구름처럼 보이는 침식된 황토산을 즐겨 그리되 그 표면처리에 있어서 필선이 하나하나 구분되지 않도록 붓을 서로 잇대어 쓴 것이 특징이라 한다. 또한 잎이 다 떨어진 한림수(寒林樹)의 나뭇가지들을 게 발톱처럼 보이게 하는 해조묘법(蟹爪描法)으로 그리고, 소나무 잎은 송충이 털처럼 묘사하는 특징도 갖는다. 곽희 는 여기에 산의 밑동을 밝게 표현하는 조광효과(照光效果)도 추가했다. 이런 특징들은 이곽파의 특징이자 또한 화북산수(華北山水)의 특징이기도 하다.
화북(華北)은 황하의 북쪽이자 중국의 북쪽 땅으로 서쪽으로는 황토로 뒤덮인 고원과 산지가 있다. 이런 지역적 특색이 반영된 화북산수(華北山水)는 황량하고 거대한 풍경으로 그려지며, 사람을 압도하는 듯한 험준한 자연으로 위압감을 느끼게 한다.
‘전 안견’의 《사시팔경도》와 《소상팔경도》의 산들이 그렇게 위압적으로 그려진 이유이다. 화북산수에 대비하여 양자강 남쪽을 뜻하는 강남(江南)산수는 물과 평지가 많은 특유의 경치를 묘사함에 있어 둥근 언덕과 부드러운 형태의 지형이 평담고아(平淡古雅)한 방식으로 표현된다. 화북산수와는 달리 과장된 표현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곽희파 풍의 그림이 유행했던 조선 초기에도 간혹 강남산수화 풍으로 그려진 그림들이 있다. 특히 일본 나라시(奈良市) 야마토[大和]문화관(文華館)에서 소장하고 있는 조선 초기의 산수화들은 남종화(南宗畫)의 한 지류인 미법산수화풍(米法山水畫風)을 따른 그림들이다.
미법산수(米法山水) 또는 미가산수(米家山水)는 북송대의 문인 서화가였던 미불(米芾)과 그의 아들 미우인(米友仁)의 산수화 전통을 가리킨다. 평원으로 전개되는 나지막한 토산(土山)을 배경으로 구름과 안개가 자욱한 양자강 하류의 풍경을 그린 강남 산수화의 전형이다. 산의 표면이 짧은 횡점인 미점(米點)으로 묘사되고 키가 작은 활엽수인 무근수(無根樹)가 그려지는 점이 특색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무근수(無根樹) : 미법산수(米法山水)에서 수목(樹木)을 그리는 방법으로, 처음에는 미우인(米友仁)이 그림에 나무뿌리를 그리지 않는 것에 대하여 조롱하는 말이었다고 한다. |
일본 야마토문화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조선의 그림들은 <산수도(山水圖)>라는 이름으로 소개되고 있다. 모두 6점인데 그 중 세 폭의 상단에는 최숙창(崔淑昌), 서문보(徐文寶), 이장손(李長孫)의 이름이 적혀 있다. 이들은 모두 조선 초기에 해당하는 1400년대 후반의 화원(畵員)이었다.
화풍은 미법산수화풍을 따랐지만, 구도는 안견파(安堅派) 화풍을 따랐다는 평이다. 아래는 이름이 적혀있지 않지만 이장손의 그림으로 보는 나머지 그림 중의 하나다.
그런데 작가이름이 적힌 나머지 두 작품과 이름 없는 두 작품 모두가 마치 한 사람의 손으로 그린 것처럼 화풍이 유사하다. 이를 도화서(圖畵署)에 소속된 화원이라 각자의 개성을 발휘하기보다는 당시의 보편적인 회화 양식을 답습한 결과로 보는 시각이 있는가 하면, 원래는 연속된 한 화가의 작품이거나 혹은 공동 작업으로 제작한 것을, 뒤에 누군가 현재와 같은 형태로 분할했을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이들이 그림을 그렸을 때는 아직 막시룡과 동기창의 ‘남북종화론’이 나오기 전이라 ‘직업화가가 그린 남종화’라는 시각을 이 그림에 적용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일 듯하다.
참고 및 인용 : 세계미술용어사전(1999, 월간미술),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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