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수(心水) 이정근(李正根)은 도화서 화원이다. 아버지로부터 시작하여 본인은 물론 두 아들, 손자, 증손자, 고손자까지도 화원을 지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1531년생인 점을 감안하면 그의 활동기간은 조선의 그림 역사가 초기에서 막 중기로 넘어간 시기인 1500년대 후반이 될 것이다. 벼슬이 사과(司果)에 이르렀으며 산수화(山水畵)를 잘 그렸다고 전하고 있다.
▶사과(司果) : 조선 전기의 군대 편제인 오위(五衛)에 속한 정6품의 무관직(武官職) |
이정근이 활동한지 한 세기가 넘은 뒤에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는 그의 글「화단(畵斷)」에서 "안견(安堅)을 조술(祖述)하여 필법이 섬교(纖巧)하고 능히 멀고 아득한 것을 표현할 수 있어 이불해(李不害)의 선구(先驅)가 될 만하다"고 이정근을 평하였다. 이불해(李不害)는 이정근과 동시대의 화가로 윤두서(尹斗緖)가 예의 「화단(畵斷)」에서 “그의 그림이 해박하고 정밀한 점은 안견(安堅)에 버금가나 활달한 맛은 오히려 그보다 낫다.”고 평한 인물이다.
▶조술(祖述) : 선인(先人) 곧 조상이나 스승의 설(說)을 근본으로 하여 그 뜻을 받아서 서술하여 밝힘. 또는 조종(祖宗)으로 받들고 계승함. |
현재 이정근의 작품으로 전하는 작품은 많지 않다. 그런 가운데 윤두서의 평대로 안견파 화풍을 볼 수 있는 작품이 남아있다. <관산적설도(關山積雪圖)>이다.
‘관산적설도’는 ‘남종화 중흥(中興)의 조(祖)’로 일컬어지는 중국 명나라 때의 문징명(文徵明), 심주(沈周) 등이 즐겨 그렸던 화제(畵題)이다. 문징명의 <관산적설도> 그림 중 하나에 붙여진 제시를 보면 이 그림의 화의(畵意)를 조금은 짐작할 수 있을 듯도 하다.
【깎아지른 계곡은 은하수에 걸려있고
연이은 산들은 옥 병풍을 펼쳐놓은 듯한데
도인은 높은 집안에 앉아
무형(無形)에 노닐며 세상이치를 꿰뚫네.
만상(萬象)은 태고(太古)에 잠겨있고
외로운 소나무는 스스로 푸르러
구름과 더불어 그 끝이 없는데
작고도 은밀한 드러남을 누가 알까!】
이정근의 <관산적설도>는 안견파 화풍이긴 하지만 이전의 안견파 화풍과는 조금 다른 차이를 보인다. 주산(主山)의 위치가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 있지 않고 거의 그림 정중앙에, 그것도 근경에 가깝게 배치하였다. 그에 따라 화폭 속의 공간의 여유가 사라졌다. 산의 모습도 특이하여 이전의 그림들에서 거대한 암석을 그리던 모양으로 산을 그렸다. 이는 안견파 화풍이 시간이 지나면서 변해가는 그 시대의 양상을 보이는 것이라는 해석도 가능하다.
전하는 이정근의 그림은 안견파 화풍과는 상관없는 그림들도 있다.
이 그림들은 앞의 안견파 화풍과는 우선 구도부터가 다르다. 앞의 그림과 완전히 대비될 정도로 그림 속 공간이 확 트인 느낌이다. 산세도 전혀 위협적이지 않고 비록 둥글고 원만한 형세는 아니지만 산도 날카롭게 생기지 않았다. 또한 채화(彩畵)이면서 청록산수(靑綠山水)라는 점도 특이하다. 청록산수는 녹색과 청색 안료를 주조로 그린 채색 산수화로 조선시대에는 도화서 화원들에 의해 주로 그려졌다. 특히 숙종이 청록산수를 좋아하였다고 한다. 청록산수는 청색과 녹색의 채색 정도에 따라 대청록산수와 소청록산수로 나뉜다. 대청록산수는 산의 외곽을 설정한 후에 그 안에 청록의 안료를 진하게 칠하는 반면, 소청록산수는 준법 위에 청록의 채색을 가볍게 칠하기 때문에 산 위에 그은 필획이 잘 보인다.
전하는 이정근의 그림에 또 다른 화풍의 그림이 있다. <미법산수도(米法山水圖>로 소개되기도 하는 <산수도>이다.
오른쪽 하단으로부터 왼쪽 상단으로 이어지는 길고 강한 사선(斜線)구도에, 가까울수록 진하고 멀어질수록 옅어지는 묵법과 그에 따른 거리감이 한 눈에 들어온다. 비에 젖은 습윤한 자연, 산과 언덕의 표현에 보이는 미점(米點)과 집이나 나무의 표현에서 미법산수와 남종화의 영향이 드러난다.
이정근이 보여준 각각의 그림들은 당시 화단의 중심이었던 도화서 화원들이 어느 한 화풍에만 매달리지 않고 다양한 화풍을 수용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예가 될 것이다.
참고 및 인용 : 국립중앙박물관, 우리역사넷,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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