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그림

종실(宗室)화가 - 이경윤 이징 1

從心所欲 2020. 11. 12. 13:20

조선 초기의 문신이자 서화가였던 강희안(姜希顔, 1417 ~ 1464)은 동생 강희맹(姜希孟)과 더불어 일찍부터 시서화에 뛰어난 재주를 보여, 세종 때 안견(安堅), 최경(崔涇)과 더불어 삼절(三絶)이라 불렸던 인물이다. 그런데 정작 본인은 "글씨와 그림은 천한 재주이니 단지 후세에 흘러 전하여서 이름을 욕되게 할 따름이다[書畵賤技 祗流傳後世 以辱名耳]“라고 하였다.

 

그런데 그로부터 100여년 뒤에 왕실 종친 집안이 갑자기 글과 그림으로 이름을 얻게 되는 일이 일어났다. 이경윤(李慶胤, 1545 ~ 1611)은 성종의 8남(男)인 익양군(益陽君) 이회(李褱)의 종증손(從曾孫)이다. 종친(宗親)이라는 신분 때문에 벼슬은 하지 않았고, 왕실 왕자군(王子君)의 증손에게 내려지는 학림수(鶴林守)를 제수 받았으며, 뒤에 학림정(鶴林正)에 봉해졌다. 그 자신이 서화에 능하였을 뿐 아니라 동생인 이영윤(李英胤)도 그림으로 이름을 얻었고, 아들 이숙(李潚)과 이위국(李緯國)은 글씨로, 그리고 서자인 이징(李澄)은 그림에 뛰어나 인조(仁祖)대의 가장 뛰어난 화가로 인정을 받았다.

▶학림정(鶴林正) : 수(守)는 종친부의 중증손(衆曾孫)에게 초수(初授)되는 정4품 관직이며 정(正)은 종친부와 조선시대 각 관서의 정3품 당하관(堂下官)직이다.

 

낙파(駱坡) 이경윤은 조선중기에 본격적으로 전래된 절파화풍(浙派畵風)을 토대로 다양한 주제의 그림을 그렸다. 조선 중기에 절파화풍이 부상했다는 말은 실상 이경윤과 이경윤보다 20년 앞서 활동했던 김시(金禔)를 이르는 말이다.

 

절파(浙派)는 명(明)대의 직업화가 일파를 지칭하는 말로 남송의 원체화(院體畵), 이곽파, 미법산수. 원말4대가에 이르기까지 널리 화법을 취하여, 절강(浙江)지방의 전통적 수묵법을 기반으로 하면서 필묵이 거칠고, 점경 인물의 극적인 표현, 묵면(墨面)과 여백의 대비, 율동감 등을 강조하는 것이 그 특색이라고 설명되어진다. 법조문 같은 표현으로 비전문가들이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이 설명은, ‘이전의 여러 가지 화풍을 동원하여 공교(工巧)한 필법으로 그리는 화풍’이나 ‘마하파 화풍을 명나라 식으로 변용시킨 화풍’이라는 의미로 해석해도 되지 않을까 싶다. 마하파(馬夏派)는 한쪽 구석에 치우친 일각구도(一角構圖)를 사용하면서 자연 속 인물을 소재로 하여 근경에 역점을 두되 원경은 안개 속에 잠긴 듯 시적, 정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는 화풍이다.

 

[<전(傳) 이경윤필산수도(李慶胤筆山水圖)>, 견본채색, 16세기 후반, 91.8 x 59.4cm, 국립중앙박물관]

 

지금 전하는 이경윤의 그림들은 산수인물화와 산수의 일부분만을 취해서 그린 소경(小景) 산수화가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조선 중기의 절파계 화풍 산수화는 구성면에서 두 가지로 대별하는데, 산수가 화폭 중심에 중요하게 배치되고 사람은 부수적으로 그려지는 이른바 대관산수(大觀山水) 또는 대경산수인물화(大景山水人物畵)와, 인물이 중심이 되고 배경의 산수는 작게 표현되는 소경산수(小景山水) 또는 소경산수인물화이다. 위 <전(傳) 이경윤필산수도>는 대경산수인물화이고, 아래 <관월도>와 <주상탄금도는>는 소경산수인물화이다

 

[전 이경윤 <관월도(觀月圖)>, 지본수묵, 44.3 x 23.8cm, 서울대학교박물관]

 

[전 이경윤 <주상탄금도(舟上彈琴圖)>, 지본수묵, 44.3 x 23.8cm, 서울대학교박물관]

 

우리나라에서는 조선 후기까지도 관지(款識)의 사용이 활발하지 않았다. 그런 까닭에 후대에 와서 예전의 작품들에 작가를 확정하지 못하고 ‘전(傳)’ 누구누구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경우가 왕왕 발생하는 것이다. 이는 이경윤의 작품도 마찬가지다. 그 가운데 호림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산수인물화첩》은 이경윤의 것이 분명하다고 주장되는 작품이다.

화첩 중 <시주도(詩酒圖)>라는 그림에 선조(宣祖)때의 일류 문장가로 꼽히는 최립(崔岦, 1539 ∼ 1612)이 1598년에 적은 제발(題跋)과 찬시(讚詩)가 있다.

 

[이경윤 《산수인물화첩》 中 <시주도(詩酒圖)>, 모시에 수묵, 16세기 말, 23.3 x 22.5cm, 호림미술관]

 

【우리나라의 명화(名畫)는 대부분 재능이 뛰어난 종실(宗室)에게서 나왔는데, 지금 세상에 전해지는 석양정(石陽正) 이정(李霆)의 매죽(梅竹)이나 학림수(鶴林守) 형제의 수석(水石) 같은 것도 매우 우수한 작품에 속한다. 홍사문(洪斯文)이 북쪽에서 올 적에 학림수의 흩어진 그림들을 유락(流落)한 가운데에서도 많이 수집해 가지고 나에게 와서 보여 주며 화제(畫題)를 부탁하였다. 내가 살펴보건대, 인물을 묘사한 것이 그중에서도 특히 핍진(逼眞)하였으니, 요컨대 모두가 범속(凡俗)한 풍골(風骨)들이 아니었다. 나는 학림공(鶴林公)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어쩌면 이 그림 속에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모습과 비슷한 인물을 그려 넣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석양정(石陽正) 이정(李霆) : 1554 ∼1626. 조선 중기의 묵죽화가로 세종의 현손.
▶핍진(逼眞) : 실물과 다름없을 정도(程度)로 몹시 비슷함, 사정(事情)이나 표현(表現)이 진실(眞實)하여 거짓이 없음

 

그림 오른쪽에 쓰인 위 제발에 이어 왼쪽은 찬시(讚詩)다. 시 끝의 ‘간이(簡易)’는 최립의 호이다.

 

空中兮爲軒窓   공중에 누각을 만들 수는 있더라도

詩酒兮安能使之雙   시와 술을 쌍으로 그려 낼 수야 있겠는가

可見者兮隨以一缸   술 단지 들고 따라가는 모습은 볼 수 있겠지만

不可見者兮滿腔  가슴 가득한 시심(詩心)이야 아무나 볼 수 있겠는가

 

《산수인물화첩》은 산수화 2폭과 소경인물화 7폭으로 구성되어있다. 이 화첩에 대하여 유홍준 교수는 이렇게 평을 했다.

 

【이 화첩에 실린 이경윤의 그림들은 한결같이 고아한 분위기를 갖고 있다. 특히 고사의 모습을 표현하는 데 그림의 포인트를 두고, 배경은 스스럼없는 필치로 분위기를 나타내는 데 그쳤다. 이로 인해 주제와 배경이 좋은 대비를 이루면서 하나의 회화작품으로 높은 격조와 완성미를 갖추게 되었다.】

 

이경윤의 그림에 대해서는 조선시대부터 여러 평가가 있어왔다.

홍세태(洪世泰, 1653 ~ 1725)는 "그 필의(筆意)를 보니 고아(古雅)하고 소산(蕭散)하여 전혀 누추하거나 속된 기운이 없다"

윤두서(尹斗緖, 1668 ~ 1715)는 "강하고 굳고 우아하고 깨끗하나 협소함이 한이다"

남태응(南泰膺, 1687 ~ 1740)은 "고담한 가운데 정취가 있고, 고고(高古)한 중에도 색태(色態)가 있다. 십분 단련하고 완전히 일신하여 거칠거나 엉성한 데가 한 점도 없다"

이긍익(李肯翊, 1736 ~ 1806)은 "인물, 우마, 영모 등은 모두 잘 그렸으나 산수화는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등의 평을 남겼다.

 

윤두서가 "협소함이 한이다"라고 한 것은 이경윤의 소경산수화들을 본 소감일 수도 있을 것이다. 대개 이경윤의 그림을 고담(枯淡)하고 정취가 있으면서도 단아한 화풍으로 평을 했는데, 이경윤의 사후(死後)에는 그림을 구하기 더욱 힘들어져 한번 보는 것만으로도 행운으로 여길 정도였다고 한다.

 

고려대학교박물관에도 이경윤 작품으로 전하는 10폭으로 된 《산수인물화첩(山水人物畵帖)》이 있다. 역시 전형적인 소경인물화로 구성되어 있다. 그림 속의 인물들은 낚시를 하거나 바둑을 두기도 하고 금(琴)을 타거나 피리를 부는가 하면 폭포와 기러기를 보는 등, 모두 속세를 떠나 자연 속에서 인생을 관조하는 고사들의 모습으로 그려졌다.

 

[전(傳) 이경윤《산수인물화첩》中 <송하대기도(松下對棋圖)>, 견본수묵, 31.1 x 24.8cm, 고려대학교박물관]

 

[전(傳) 이경윤《산수인물화첩》中 <조옹도(釣翁圖)>, 견본수묵, 31.1 x 24.8cm, 고려대학교박물관]

 

[전(傳) 이경윤《산수인물화첩》中 <관월도(觀月圖)> 또는 <월하탄금도(月下彈琴圖)> , 견본수묵, 31.1 x 24.8cm, 고려대학교박물관]

 

 

 

참고 및 인용 : 호림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 고려대학교박물관, 한국 역대 서화가사전(2011, 국립문화재연구소), 우리역사넷,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