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그림

종실(宗室)화가 - 이경윤 이징 3

從心所欲 2020. 11. 14. 08:44

[이징 <이금산수도(泥金山水圖)>, 흑견금니, 22.0 X 15cm]

 

조선이라는 이미지에 전혀 어울리지 않게 이처럼 화려해 보이는 산수화도 있었다. 이금산수화(泥金山水畵)이다.

이금 또는 니금(泥金)은 고운 금박가루인 금분(金粉)을 아교풀에 개어 만든 안료로, 자색(紫色)이나 감색(紺色), 흑색(黑色)으로 염색한 그림 바탕에 보색관계인 이금으로 그림을 그려 시각적 효과를 극대화한 것이 이금화(泥金畵)이다.

금은 삼국시대부터 장신구는 물론 불상, 불화 등에 사용되었고, 고려시대의 불화에는 인물의 신체나 옷감 등을 이금으로 장식하였다. 예나 지금이나 금은 값이 비싸고 귀한 재료라, 금으로 무엇을 만든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특별한 의미를 갖는 행위다. 이금 화는 불화에 쓰이던 이금이란 안료를 감상용 회화에 사용함으로써 그 안료가 지닌 권위와 상징성을 시각화한 것이다.

 

16세기 중반에 왜(倭)의 금은(金銀) 가격이 하락하여 대량으로 수입할 수 있게 되면서 이금화의 안료가 풍부해졌다고 한다. 이때 깊은 불심을 가졌던 명종의 어머니 문정왕후(文定王后)는 불교의 부흥과 왕실의 안녕, 명종의 건강 발원 등을 위하여 왕실재산으로 많은 이금화를 제작하게 하였다. 특히 1565년에는 왕손의 생산을 기원하며 석가불, 미륵불, 약사불, 아미타불을 금화(金畫)와 채화(彩畫)로 각각 50폭씩 그리게 하여 모두 200폭의 순금불화를 조성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문정황후 때의 일은 일시적 현상일 뿐, 유교를 근간으로 하는 조선에서 이런 행위가 계속될 수는 없었다. 선조(宣祖)때부터 순금불화의 제작은 자연스럽게 줄어들었다. 하지만 왕실과 관료들 사이에서 감상용 이금화 제작은 계속되었다. 이 시기 이금을 감상화의 안료로 시도하고 이러한 흐름을 이끌었던 주체가 종실 화가였다. 당시 엄격한 금의 규제정책에도 불구하고 종친들은 신분상으로 금이나 이금을 제약 없이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왕실에서 대량으로 제작한 순금불화나 이금으로 그려진 장식화를 가까이에서 접할 수 있었기에 이금화에도 익숙했다. 이경윤의 동생인 이영윤(李英胤)은 이미 20대에 이금으로 화조영모화를 그린 것이 기록으로 확인되고 이경윤 역시 이금화를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이경윤의 아들인 이징(李澄)의 이금화가 지금 가장 많이 전해지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징 <독수리>, 견본금니, 22 x 15cm, 북한 조선미술관. 여덟 폭으로 된 이금화 화첩 가운데 하나로 알려져 있다,]

 

[이징 <공작새>, 견본금니, 22 x 15cm, 북한 조선미술관]

 

허주(虛舟) 이징(李澄, 1581 ~ 1653년 이후)은 이경윤(李慶胤)의 5남 2녀 중 둘째 아들이지만 서자(庶子)였다. 서자지만 종실이라는 신분 때문에 정식 도화서 화원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나라에서 중요한 그림을 제작할 때면 불려가 참여하였다. 원접사(遠接使)를 수행하기도 하고 왕실의 도감 제작에 참여했으며, 태조의 영정을 개수하여 그 공으로 동반(東班)직 6품에 제수되었다.

▶원접사(遠接使) : 명나라와 청나라의 사신을 맞아들이던 관직. 2품의 관료 중에서 선발하여 의주까지 가서 중국 사신을 마중하고 잔치를 베푸는 임무를 맡았다.

 

허균(許筠, 1569 ~ 1618)은 그를 가리켜, “아버지와 삼촌을 따라 배워서 화가가 되었고, 산수, 인물, 영모(翎毛), 초충(草蟲)에 모두 능하며 이정(李楨)사망 후의 본국제일수(本國第一手)”라며 당시의 가장 뛰어난 화가로 평가하였다.

▶이정(李楨) : 1554 ~ 1626. 세종의 현손으로 묵죽화(墨竹畵)를 잘 그렸던 왕실 출신 화가였다. 유덕장(柳德章), 신위(申緯)와 함께 조선시대 3대 묵죽화 화가로 꼽힌다. 이정 역시 이금을 사용하여 대나무 그림을 그리기도 하였다. 왕손에게 주어지는 정3품직이 제수되어 석양정(石陽正)에 봉해졌다.

 

[전(傳) 이징 <니금산수도>, 흑견금니, 87.9 x 63.6cm, 국립중앙박물관]

 

이 그림은 따로 관지가 없음에도 1917년 『이왕가박물관소장품사진첩』에는 ‘이징의 <운봉강각(雲峰江閣>’으로 게재하였고 1931년 조선명화전람회(朝鮮名畫展覽會)에서는 ‘이징의 <설봉강각지도(雪峰江閣之圖)>’로 소개하였다. 국립중앙박물관의 소장 목록은 ‘전(傳) 이징 <니금산수도>’로 되어있고 ‘<전이징필산수도(傳李澄筆山水圖)>’라는 다른 명칭도 쓰고 있다.

이 그림 외에도 지금 ‘전(傳) 이징’으로 전하는 이금화들은 더 있다.

 

[전(傳) 이징 <고사한거도(高士閑居圖)> 비단에 이금, 87.8 x 61.2cm, 간송미술관]

 

[전(傳) 이징 <이금산수도>]

 

[이징 <거북이>, 견본금니, 22 x 15cm, 북한 조선미술관]

 

[이징 <사슴>, 견본금니, 22 x 15cm, 북한 조선미술관]

 

인조가 이징을 좋아하여 가까이 한 일은 실록에도 나온다. 인조 때에는 이징이 도화서 교수를 역임하기도 하였다. 비록 서자이기는 하지만 같은 왕실 집안으로 족보상의 서열은 확인 못했지만 이징이 인조보다 14살이 많았던 점을 미루어 일반 화원을 대하는 것과 같은 관계는 아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런 인조의 후원 덕에 이징이 유달리 많은 이금화를 남길 수 있었을 것이다.

 

 

 

 

참고 및 인용 : 금빛의 산수, 조선중기 이금산수화(오다연, 국립중앙박물관), 한국 역대 서화가사전(2011, 국립문화재연구소),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