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징은 부친 이경윤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집안에서 옛 그림을 많이 보았을 것이고 또한 자연스럽게 그림도 배울 수 있었을 것이다. 이징은 안견파 화풍과 절파 화풍의 산수화를 모두 그렸는데, 때로는 안견파와 절파의 화풍을 혼용한 화풍도 보였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안견파 화풍을 더 선호했다는 의견도 있다. 그런가 하면 왕실의 그림은 안견파 화풍으로 그리고, 왕실 외의 덜 중요한 그림 요구에는 간략한 절파화풍의 그림을 그렸을 것이라는 추리도 있다.
조선 성종 때의 대유학자였던 정여창(鄭汝昌)의 옛 별장을 그린 <화개현구장도(花開縣舊莊圖)>는 이징의 작품가운데 제작시기가 밝혀진 몇 안 되는 작품 중 하나로 이징이 63세 때인 1643년에 그린 것이다. 글자를 붙여 써서 제목이 어렵게 느껴지지만,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지방의 옛 이름인 화개현(花開縣)에 있는 옛 별장을 그렸다는 뜻이다. 정여창은 영남 사림의 종조로 불리는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 한 때 지리산 섬진(蟾津) 나루에 별장을 짓고 대나무와 매화를 심으며 생활한 적이 있었다. 그 별장이 훼손되어 정여창이 지냈던 자취가 사라지는 것을 아쉬워한 정씨 문중에서 기록으로 남겨두기 위해 이 그림을 제작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 그림은 이징이 현지에 가서 직접 보고 그린 것은 아니다. 여러 기록을 참고하여 그린 것이라 한다.
계회축(契會軸) 형식을 따른 이 그림의 상단에는‘花開縣舊莊圖’라는 제목이 전서체(篆書體)로 쓰여 있고, 중단에는 담채로 정여창의 옛 별장과 일대의 풍경이 그려져 있다. 그림 아래에는 정여창이 지은 <악양시(岳陽詩)>라는 시와 유호인(兪好仁)의 <악양정시(岳陽亭詩)>, 그리고 이 그림의 제작 배경을 적은 발문(跋文)에 이어 조식(曺植)의 <유두류산록(遊頭流山錄)>과 정구(鄭逑)의 <유가야산록(遊伽倻山錄)>에 수록된 정여창의 옛 별장에 관한 글을 발췌하여 기록했다.
그림은 안견파(安堅派) 화풍에 부분적으로 절파계(浙派系) 화풍을 수용하여 이징이 새로운 화풍을 보여주었다는 평이다. 구체적으로는 “조선 전기 전통적인 산수화의 3단 구성이 사라지고 한쪽으로 치우친 구성 대신 전경의 경물들이 중앙에 배치되고 리듬감 넘치는 원산이 분산되면서 수평감이 강화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특징들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소상팔경도》 화첩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 화첩은 현존하는 조선 전반기 소상팔경도들 가운데 ‘전(傳)’자를 붙이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작품이라 한다.
이징의 작품으로 전하는 소상팔경도 그림이 여럿 있다. 전하는 이징의 다른 소상팔경도 그림들을 보면 이징 역시 다양한 화풍의 그림을 그렸음을 확인할 수 있다. 어쩌면 이징은 어느 화풍에 집착하지 않고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또는 기분에 따라, 아니면 붓 가는대로 그리고 싶은 그림을 그렸는데, 후세의 전문가들이 너무 요란한 분석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참고 및 인용 : 금빛의 산수, 조선중기 이금산수화(오다연, 국립중앙박물관), 한국 역대 서화가사전(2011, 국립문화재연구소),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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