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그림

김홍도 해동명산도첩(海東名山圖帖) 1

從心所欲 2020. 11. 18. 16:58

1788년 가을 정조의 명을 받아 김홍도와 김응환이 50여일에 걸쳐 강원도와 금강산 일대의 절경을 그렸던 일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아직도 진본 여부는 확정되지 않았지만 『금강사군첩(金剛四君帖)』을 그때의 김홍도 작품으로 인정하고 있는 추세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은 1997년에 『해동명산도첩(海東名山圖帖)』을 구입하여 공개한 일이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의 소장 목록에는 ‘전 김홍도필 해동명산도(傳 金弘道筆 海東名山圖)’로 되어 있는 이 첩은, 지난 해 ‘우리 강산을 그리다’ 특별전에서는 김홍도가 『금강사군첩』을 제작하기 위하여 현지에서 사생한 초본(草本)으로 소개되었다.

『해동명산도첩(海東名山圖帖)』은 채색 없이 유탄(柳炭)과 먹으로만 그려져 있다. 하지만 『금강사군첩』과 대조하여 보면 비전문가라도 두 그림의 연관성을 단번에 알 수 있을 정도로 유사하다. 그리고 그 자체만으로도 훌륭해 보인다.

 

이 초본은 원래 60개의 사생화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지금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는 그림은 32점뿐이다. 나머지는 유실된 것인데,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지 않은 나머지 그림 가운데 2점이 경매에 출품된 일도 있다.

 

[김홍도 『해동명산도첩(海東名山圖帖)』中 <대관령>, 30.4㎝ x 43.7㎝, 안산시]

 

<대관령>은 2018년 안산시가 경매를 통하여 구입한 작품이다. 그림에는 ‘대관령앙강릉 (大關嶺卬江陵)’이라는 글 옆에 ‘七’자가 써있는데 이는 김홍도가 사생한 그림 순서를 적은 것으로 보인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그림은 ‘십(十)’부터 시작된다. 2010년에는 8번 그림인 <천연정(天然亭)>이 경매에 출품되어 개인에게 낙찰되기도 하였다.

 

[김홍도 『금강사군첩(金剛四君帖)』中 <대관령>, 30.5 x 43cm, 개인]

 

『금강사군첩』과 『해동명산도첩』간 그림 크기의 차이는 측정 상의 기준 차이에서 오는 오차로 보일 정도로 미세하여, 실제 두 첩의 그림들은 같은 크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김홍도 『해동명산도첩(海東名山圖帖)』中 10번 <경포대>, 30.4㎝ x 43.7㎝, 국립중앙박물관]

 

[김홍도 『금강사군첩(金剛四君帖)』中 <경포대>, 30.5 x 43cm, 개인]

 

[김홍도 『해동명산도첩』中 11번 <호해정(湖海亭)>, 30.4㎝ x 43.7㎝, 국립중앙박물관]

 

[김홍도 『금강사군첩』中 <호해정>, 30.5 x 43cm, 개인]

 

[김홍도 『해동명산도첩』中 12번 <능파대(凌波臺)>, 국립중앙박물관]

 

[김홍도 『금강사군첩』中 <능파대>, 개인]

 

[김홍도 『해동명산도첩』中 14번 <무릉계(武陵溪)>, 국립중앙박물관]

 

[김홍도 『금강사군첩』中 <무릉계>, 개인]

 

『해동명산도첩』의 13번째 그림이 유실되었는데, 『금강사군첩』을 미루어보면 삼척의 죽서루(竹西樓)였을 가능성이 높다. 죽서루는 바다에 접하지 않은 내륙에 있으면서도 관동팔경의 하나로 꼽히던 곳이었다.

 

[김홍도 『해동명산도첩』中 15번 <망양정(望洋亭)>, 국립중앙박물관]

 

[김홍도 『금강사군첩』中 <망양정>, 개인]

 

[김홍도 『해동명산도첩』中 16번 <문암(門巌)>, 국립중앙박물관]

 

[김홍도 『금강사군첩』中 <문암>, 개인]

 

울진의 망양정에서 갑자기 북쪽 강원도 고성의 문암으로 옮겨갔다. 그리고는 다시 울진으로 원대 복귀하여 성류굴(聖留窟)을 그렸다. 번호를 나중에 매기는 과정에서 착오가 생긴 것일까?

 

[김홍도 『해동명산도첩』中 17번 <성류굴(聖留窟)>, 국립중앙박물관]

 

[김홍도 『금강사군첩』中 <성류굴>, 개인]

 

[김홍도 『해동명산도첩』中 18번 <월송정(越松亭)>, 국립중앙박물관]

 

[김홍도 『금강사군첩』中 <월송정>, 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