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꽃 가득한 못’, 연담(蓮潭)이라는 고상한 호와 ‘취한 늙은이’, 취옹(醉翁)이라는 자조적인 호를 같이 썼던 화가가 있다. 옛 그림에 관심이 없어도 언젠가 모두 한번쯤은 보았을 그 유명한 <달마도>를 그린 김명국(金明國)이다.
그의 생몰년도는 제대로 밝혀진 것이 없으나 1581년생인 이징(李澄)보다 20년쯤 뒤의 인물로 추정되고 있다. 김명국은 도화서 화원이었던 만큼 다양한 화목의 그림을 두루 잘 그렸고, 수묵과 채색을 모두 잘 다루었다고 한다.
그가 그린 산수화로 전하는 작품들은 안견파(安堅派)의 화풍을 따른 것도 있고 절파풍의 그림도 있는데 특히 절파풍의 그림들은 광태사학파(狂態邪學派)의 특징을 보인다는 평을 받고 있다. 광태사학파(狂態邪學派)는 15세기 후반에서 16세기 명나라 절파(浙派) 후기의 화풍을 가리킨다. 이들의 화풍은 중경(中景)을 끼어 넣은 복잡한 구성과 거친 필치로 인하여 그림 전체가 조잡하게 보이는 느낌을 준다는 비평을 받았는데, 그 경향이 점점 더 심해지자 문인화가들이 ‘미치광이 같은 사학(邪學)’이라고 비난하여 부른 데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그런 김명국이 이금으로 그린 《사시팔경도》가 전한다. 역시나 계절별로 이른 때와 늦은 때를 오른쪽과 왼쪽으로 나누어 첩을 펼쳤을 때 중앙에 트인 공간이 생기는 구도로 화폭 각기의 양 끝에 무게가 실리게 그렸다. 이징에 비해서는 솜씨가 거칠다는 평을 듣고 있다.
조선 중기를 풍미했던 절파화풍은 김명국을 정점으로 하여 쇠퇴하게 된다. 절파계 화풍은 김명국의 제자인 조세걸(曺世杰)이 뒤를 이었지만 뛰어난 면모를 보이지 못하면서 점차 시들해졌다. 그리고 18세기로 넘어가면서 조선 화단에 남종산수화와 진경산수화의 거센 흐름에 밀려오면서 절파계 화풍은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금빛의 산수, 조선중기 이금산수화(오다연, 국립중앙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 한국 역대 서화가사전(2011, 국립문화재연구소), 우리역사넷,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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