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운(谷雲) 김수증(金壽增)은 병자호란 때 끝까지 주전론(主戰論)을 주장했던 김상헌(金尙憲)의 손자다. 그의 동생 김수흥과 김수항은 모두 영의정을 지냈고, 정선의 스승으로 알려진 김창흡, 김창협 형제는 그의 조카들이다. 뒤에 세도정치의 시발점이 된 김조순 역시 이들의 후손이다. 안동 김씨로 대표적인 서인 노론집안이었던 만큼, 정국에 따라 집안은 많은 부침이 있었다.
김수증은 효종 1년인 1650년에 생원시에 합격한 이래 형조 정랑, 공조 정랑을 역임하며 관직에 있었다. 젊어서부터 산수를 좋아하여 금강산 등 여러 곳을 유람했던 김수증은, 47살이 되던 1670년에 지금의 강원도 화천군 사내면 지역의 산수에 끌려 그곳에 땅을 마련하고 신라 말기 학자이자 문장가인 최치원(崔致遠)을 기리는 농수정(籠水亭)을 지었다. 또한 원래의 지명인 사탄(史呑)을 곡운(谷雲)이라 개칭한 뒤, 용담천 아홉 굽이에 각각 이름을 지어 곡운구곡(谷雲九曲)이라 부르면서 이곳에 곡운정사(谷雲精舍)도 지었다. 곡운(谷雲)은 주자(朱子)가 은거했던 무이구곡 ‘운곡(雲谷)’의 앞뒤 글자를 바꾼 것이다. 그의 호 곡운(谷雲)도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숙종 1년인 1675년, 성천부사(成川府使)로 있던 김수증은, 동생 김수항이 송시열과 함께 유배되자 벼슬에서 물러나 이곳에 들어가 은거를 시작하였다. 1682년에는 화가 조세걸(曺世傑)을 불러 곡운구곡을 그리게 하였다. 그리고 다시 10년 뒤에는, 주자의 「무이구곡도가(武夷九曲櫂歌)」의 운(韻)을 두 아들과 다섯 조카, 외손 등 아홉 명에게 나누어 주어 각 곡(曲)에 대한 칠언절구의 시를 짓게 하고는 이를 모아 조세걸의 그림과 함께 「곡운구곡도첩」이라는 시화첩(詩畫帖)을 만들었다.
도첩의 제서(題書)는 1682년에 조세걸이 그림을 완성했을 때 김수증이 직접 쓴 것이다. ‘농수정 주인이 썼다[龍水亭主人書]‘고 적었다. 임술복월(壬戌復月)‘ 의 ‘임술(壬戌)’은 1682년, ‘복월(復月)’은 양(陽)의 기운이 회복된 달이라는 뜻으로 음력 11월을 가리킨다.
김수증은 예서(隸書)에 많은 애착을 가졌던 서예가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가 쓴 곡운구곡도 제서(谷雲九曲圖 題書)는 예서 특유의 삐침이나 갈고리, 파임 등이 굴곡 없이 매끈하고 곧바로 지나간 획으로 변모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예서임에도 점획이 많이 해서(楷書)화 되었다. 단아하고 말쑥한 느낌은 있지만 고전적 예서체는 아니다.
「곡운구곡도첩」은 글씨 23면(面), 그림 10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림은 곡운구곡에 농수정까지 포함하여 10점이다. 그림을 그린 조세걸은 1636년에 평양에서 태어나 평양지역에서 성장하며 활동하던 화가로, 중년 이후에는 한성을 오가며 어진 제작과 도사(圖寫)에도 참여하였었다. 조세걸이 김수증의 부름을 받아 「곡운구곡도」를 그린 것은 47세 때였다.
조카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이 쓴 발문에는 “곡운 노인이 화사(畵師) 조세걸을 계곡현장에 데려가서 매곡마다 실제 경치를 보고 사생(寫生)하도록 하되, 거울에 비친 물상(物像)을 취하듯 하였다”고 되어 있다. 「곡운구곡도」의 그림들이 일반적인 산수화와 달리 구도가 매우 산만하게 느껴지는 이유이다. 사진 찍듯이 실경 그대로를 담기 원한 김수증의 요구에 따라 화가의 화의(畵意)는 없는 그림이 된 것이다. 그 대신 산, 바위, 나무, 집 등이 사실에 가깝게 묘사되었다.
곡운구곡의 제1곡은 방화계(傍花溪)로, 봄에 강가에 피는 철쭉이 아름다운 곳이다.
제2곡은 맑은 물빛이 옥색과 같다는 청옥협(靑玉峽)으로 그 길이가 3km에 이른다.
제3곡은 신녀협(神女峽)이다. 신녀협 옆의 벼랑은 계곡을 전망하기 좋은 곳으로 「금오신화(金鰲新話)」의 저자로 널리 알려진 조선 전기의 문인 김시습(金時習, 1435 ~ 1493)이 신녀협의 풍치를 굽어보고 삼미(三味)에 빠진 곳이라 하여 그의 법호를 따서 청은대(淸隱臺)라고 불렸다. 지금 이곳에 있는 정자는 근래에 지어진 것이다.
제4곡은 안개와 구름이 머무는 백운담(白雲潭)이다.
제5곡은 옥이 부서지는 듯한 소리를 내는 여울이라는 명옥뢰(鳴玉瀨)이다.
제6곡은 와룡이 숨었다는 깊은 못인 와룡담(臥龍潭)이다.
농수정은 이 와룡담 한쪽에 세워졌는데 그림 중간에 보이는 작은 초막(草幕)이다. 조세걸은 <와룡담(臥龍潭)>에 이어 농수정을 더욱 근접하여 그렸다. 농수정 뒤편으로 많은 건물과 소를 몰고 가는 모습도 보인다. 김수증은 이곳에 농수정(籠水亭) 외에도 곡운정사(谷雲精舍)와 가묘(家廟), 그리고 생활에 필요한 시설들을 지었다.
제7곡은 밝은 달이 비치는 계곡물이라는 명월계(明月溪)다.
제8곡은 의(義)를 높인다는 융의연(隆義淵)이다.
제9곡은 층층이 쌓인 바위인 첩석대(疊石臺)다. 화폭 중간 왼쪽에 희미하게 그려진 탑은 예전 그곳에 있던 신수사(神秀寺)라는 절의 탑이라 한다.
그림 속 곳곳에는 김수증으로 짐작할 수 있는 인물의 모습이 보인다. 김창협은 도첩의 발문에 이곳을 주유(周遊)하던 김수증의 모습을 이렇게 적었다.
【지난날 어떤 선비가 산중에 들어갔다가 우연히 소를 타고 시냇가를 지나가는 선생을 만났는데, 선생은 수염과 눈썹이 말끔하고 의관이 고풍스러웠으며 아이종 하나가 지팡이를 지고 뒤따르고 있었다고 한다. 그 분위기가 매우 한가로워 선비는 말을 세우고 가만히 바라보며 신선 세계의 사람이 아닐까 생각하고는 돌아와서 사람들에게 그가 본 대로 말했다고 한다. 이 일단의 광경은 참으로 그림으로 그릴 만한데, 안타깝게도 화가 조씨가 멀리 있어 불러올 수가 없다. 그 일을 여기에 대략 기록하여 그림을 대신하는 바이니, 이 글을 보는 사람이 이 대목을 보면 마음이 상큼해질 것이다.】
또한 김수증이 조세걸로 하여금 「곡운구곡도」를 그리게 한 이유에 대하여서도 이렇게 밝혔다.
【우리 백부와 곡운과의 관계를 본다면 전후 십 수 년 동안 음식과 기거, 침석(枕席)이며 궤장(几杖)이 구곡 안을 떠난 적이 거의 없다. 이곳의 중첩된 산과 시내, 울창한 초목은 모두 자신의 폐부며 모발이요, 이곳의 안개와 이내는 모두 자신이 들이키고 내쉬는 공기요, 이곳의 물고기와 새, 고라니와 사슴들은 모두 자신이 벗 삼아 노는 반려이니, 이곳에서 구하여 얻지 못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그런데도 종소문(宗少文)의 일처럼 화가의 손을 빌린 것은 어째서인가? 나는 그 까닭을 정말 모르겠다. 하지만 ‘이곳을 독실히 좋아하여 즐거움이 깊기 때문이다.’라고 말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중략)....
내가 이 발문을 쓴 뒤에 선생이 읽어 보시고는, “네 말이 좋기는 하다. 그러나 내가 이 그림을 그린 것은, 내 이 두 다리가 때때로 산을 나가지 않을 수 없는 관계로 이 구곡(九曲)이 눈 안에 늘 있지는 못하기 때문에 그럴 때에 보려고 한 것뿐이다.” 하였다.】
▶종소문(宗少文) : 종병(宗炳, 375 ~ 443). “어진 사람은 산수를 통하여 형(形)으로서 도(道)를 아름답게 한다”는 산수화론을 따라 명산명천(名山名川)의 생활화를 주장하며 각지의 명산을 유랑했고, 노년에 병이 들자 유랑할 때 그려둔 산수를 벽에 그리고 앉아 이것을 보고 즐겼다는 ‘와유(臥遊)’의 일화가 유명하다. |
참고 및 인용 : 국립중앙박물관, 한국 역대 서화가 사전(201, 국립문화재연구소), 한국고전번역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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