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그림

김홍도 서원아집도(西園雅集圖)

從心所欲 2021. 1. 15. 09:09

1085년 중국 송나라의 제7대 황제인 철종(哲宗)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르자, 철종의 할머니인 선인태후(宣仁太后) 고씨(高氏)가 섭정을 하게 되었다. 고태후는 구법당(舊法党)의 영수인 사마광(司馬光)을 재상으로 등용하고 그간 실시되었던 왕안석(王安石)의 신법(新法)을 모두 폐지하였다.

 

이렇게 구법당이 다시 세력을 되찾기 시작하던 때인 1086년, 당시 송나라 수도인 개봉(開封)에 있는 왕선(王詵)의 저택 서쪽 정원에서 구법당 인물들의 모임이 있었다. 왕선(王詵)은 송나라 5대 황제인 영종(英宗)의 부마(駙馬)로 귀족이면서 산수화에 뛰어난 화가이기도 했다. 그는 평소 교유하던 소식(蘇軾), 미불(米芾), 황정견(黃庭堅)을 비롯하여

당시 명성이 높던 문인, 유학자, 승려 등의 묵객 (墨客)을 불러 아회(雅會)를 가졌다. 그리고 이공린(李公麟)이 모임의 정경을 그림으로 그리고, 미불(米芾)이 여기에 찬(贊)을 썼다.

이를 서원아집도(西園雅集圖)라 하는데 이후 역사상의 유명한 문사들을 숭상하는 화제(畵題)가 되어, 중국은 물론 조선에서도 많은 그림이 그려졌다.

김홍도(金弘道)도 서원아집도(西園雅集圖)를 그렸고, 34세 때인 1778년에 그린 6폭 병풍이 전해지고 있다.

 

[<서원아집도(西園雅集圖)>, 6폭 병풍, 견본담채, 122.7 x 287.4cm, 국립중앙박물관]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은 시중을 드는 동자나 비녀(婢女)를 제외하고 16인 또는 17인이다. 인원이 오락가락하는 것은 시인이었던 진사도(陳師道)를 넣기도 하고 빼기도해서 그렇다.

애초에 이공린이 그렸다는 서원아집도는 없어지고 미불이 썼다는 찬(贊)인 ‘서원아집도(西園雅集圖) 기(記)’만 전하여 후대의 그림들은 이 기(記)에 의탁하여 제작되었다.

 

[<서원아집도(西園雅集圖)>, 6폭 병풍 中 1폭, 국립중앙박물관]

 

[<서원아집도(西園雅集圖)>, 6폭 병풍 中 2폭, 국립중앙박물관]

 

 

[<서원아집도(西園雅集圖)>, 6폭 병풍 中 3폭, 국립중앙박물관]

 

기(記)에 ‘당건(唐巾)에 심의(深衣)를 입고 머리를 들어 돌에 글씨를 쓰는 이는 미원장(米元章)’이라고 했다. 원장(元章)은 서예가이자 미법산수로도 유명한 화가 미불(米芾)의 자이다. 기(記)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이름은 대부분 자로 적혔다.

‘복건(幅巾)을 쓰고 소매에 손을 넣은 채 바라보는 이는 왕중지(王仲至)’. 왕중지는 장서가(藏書家)이자 관리였던 왕흠신(王欽臣)이다. 사신으로 고려(高麗)를 방문하기도 했다고 한다.

 

[<서원아집도(西園雅集圖)>, 6폭 병풍 中 4폭, 국립중앙박물관]

 

오른쪽 앞부터 시계 반대방향으로,

‘돌 탁자 곁에 앉아 도인 모자를 쓰고 자줏빛 옷을 입고 오른손은 의자에 기대고 왼손은 책을 집어든 채 그림을 보는 이는 소자유(蘇子由)’: 소식의 동생 소철(蘇轍)로 아버지 소순(蘇洵), 형 소식과 함께 당송팔대가의 1인이다.

‘도건(道巾)에 흰옷 입고 무릎을 누른 모습으로 기대어 그림을 보는 이는 정정로(鄭靖老)’: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복건(幅巾)에 거친 베옷 입고 두루마리에 도연명의 귀거래(歸去來)를 그리는 이는 이백시(李伯時)’: 사대부이자 화가였던 이공린(李公麟)이다.

‘피건(被巾)에 푸른 옷을 입고 어깨를 만지며 서 있는 이는 조무구(晁無咎)’: 사대부 화가인 조보지(晁補之)이다.

‘단건(團巾)에 비단옷 입고 한손에 파초 부채를 잡은 채 자세히 바라보는 이는 황노직(黃魯直)’: 시인이자 화가, 서예가였던 황정견(黃庭堅).

‘무릎을 굽혀 돌 탁자에 기대어 그림을 보는 이는 장문잠(文潛)’: 관리이자 시인인 장뢰(張耒)로, 황정견, 조보지, 진관(秦觀)과 함께 소동파(蘇東坡) 문하(門下)의 네 학사를 의미하는 ‘소문사학사(蘇門四學士)’로 불렸다.

 

[<서원아집도(西園雅集圖)>, 6폭 병풍 中 5폭, 국립중앙박물관]

 

‘의자에 앉아 옆으로 기대어 보고 있는 이는 이단숙(李端叔)’: 소식과 시를 주고받는 사이였던 시인 이지의(李之儀).

‘선도건(仙挑巾)에 자주색 갖옷을 입고 앉아 보는 이는 왕진경(王晋卿)’ : 모임이 열린 서원(西園)의 주인인 왕선(王詵)

‘오모(烏帽)를 쓰고 누런 도복에 붓을 잡고 글씨를 쓰는 이는 동파선생(東坡先生)’ : 흔히 소동파로 알려진 중국의 대문호 소식(蘇軾).

‘복건에 푸른 옷을 입고 방궤(方几)에 의지하여 우두커니 바라보고 있는 이는 채천계(蔡天啟) : 관리이자 화가였던 채조(蔡肇).

 

기(記)에는 주변 풍경을 “뒤에 계집종이 구름머리에 비취장식을 하고 서 있는데 자태가 부귀하고 우아하다. 바로 왕진경의 여종이다. 한 그루 소나무가 울창하고, 뒤로는 능소화가 얽혀 붉은 빛과 초록이 서로 교차하고, 아래에는 큰 돌 탁자가 있어 옛 자기와 거문고를 진설하였으며 파초로 둘러싸여 있다.”고 묘사했다.

 

[<서원아집도(西園雅集圖)>, 6폭 병풍 中 6폭, 국립중앙박물관]

 

‘뒤로는 금석교(錦石橋)가 있고, 맑은 시내 깊은 곳으로 흘러드는 곳에 대나무 숲길이 있어 비취빛 그늘이 빽빽하다. 그 가운데 가사입고 부들방석에 앉아 무생론(無生論)을 설하는 자는 원통대사(圓通大師)이고, 복건에 갈의(葛衣)를 입고 경청하는 이는 유거제(劉巨濟)이다.’

원통대사(圓通大師)는 관세음보살의 다른 명칭이기도 한데, 그림 속의 원통대사에 대해서는 따로 알려진 바가 없다. 유거제(劉巨濟)는 관리이자 화가였던 유경(劉涇)으로 소식과 서화(書畫)로 교유하던 사이였다.

 

그림 아래쪽으로는 ‘뿌리가 감겨 얽힌 늙은 노송나무 아래 두 사람이 앉아 있는데 복건에 푸른 옷 입고 소매에 손을 넣고 듣는 이는 진소유(秦少游)이고, 금미관(琴尾冠) 쓰고 자줏빛 도복(道服)에 완함(阮咸)을 연주하는 진벽허(陳碧虛)‘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진소유는 고문과 시에 능하였던 진관(秦觀)이란 인물이고, 진벽허는 미상의 인물이다.

미불의 서원아집도기(西園雅集圖記)는 다음과 같이 끝을 맺는다.

 

【세상의 맑고 밝은 즐거움이 이보다 낫지 않다.

오호라! 명리에 머물며 물러나는 것을 알지 못하는 자가 어찌 이를 쉽게 얻겠는가?

동파(東坡)이하 모두 열여섯 사람이 문장을 논할 때, 박학변식하고 훌륭한 말과 묘묵(妙墨), 옛것을 좋아하고 들은 것이 많음과 시속을 떠난 영웅호걸의 모습과 고승(高僧), 도사와 같은 걸출함이 모두 자연스럽게 높은 경지에 이르렀다. 뒤에 보는 이들은 단지 도화(圖畵)만 볼 것이 아니라 그 인물들을 방불(仿佛)하는 것으로 족할 것이다.】

 

이 미불의 서원아집도기는 당시에는 전하지 않다가 16세기 명나라 때 갑자기 처음 나타난 것 때문에 위작이란 주장이 근래에 제기되었다. 따라서 ‘서원아집’이란 아회 자체도 실제 있었던 것이 아니라 후대에 만들어진 허구일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그 진위와 관계없이 시서화와 학문에 뛰어난 이들이 모여 풍류를 즐긴 고상한 모임을 숭상하는 것이 이 화재(畵材)의 본뜻이다.

 

김홍도의 서원아집도 5폭과 6폭 상단에는 강세황이 쓴 제발(題跋)이 적혀있는데 김홍도에 대한 칭찬이 가득하다.

 

[<서원아집도(西園雅集圖)> 6폭 병풍 中 제발(題跋) 부분]

 

【내가 이전에 본 아집도가 무려 수십 점에 이르렀는데 그 중에 구십주(仇十洲)가 그린 것이 제일이었고, 그 외 변변치 않은 것들은 논할 가치가 없다. 이제 김홍도의 이 그림을 보니 필세가 빼어나게 아름답고 고상하며 포치(布置)가 적당함을 얻었으며 인물이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하다.

미불이 절벽에 글씨를 쓰고, 이공린이 그림을 그리고 소식이 글씨 쓰는 것 등에 있어 그 참된 정신을 살려 그 인물과 서로 들어맞으니 이는 정신으로 깊이 깨달은 것이거나 하늘이 주신 재능인 것이다.

구십주의 심약한 필치에 비하면 이 그림이 훨씬 좋다. 이공린의 원본과도 우열을 다툴 정도이다. 뜻하지 아니하게 우리나라에 이런 신필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림은 진실로 원본에 못하지 않은데 나의 필법이 성글고 서툴러 미불에 비할 수 없으니 다만 좋은 그림을 더럽히는 것이 부끄럽다. 어찌 보는 이의 꾸지람을 면할 수 있으랴.

무술년 납월(臘月) 표암이 제하다.】

▶구십주(仇十洲) : 중국 명대(明代) 중기의 화가 구영(仇英). 풍속과 관련된 인물화에 뛰어났었다.
▶무술년 납월(臘月) : 1778년 12월

 

이 6폭 병풍을 그린 1778년에 김홍도는 같은 서원아집도를 부채에도 그렸다. 물론 구체적 도상은 병풍 그림과는 차이가 있다.

 

[<김홍도필서원아집도(金弘道筆西園雅集圖)>, 지본담채 선면화, 27 x 80.3cm, 국립중앙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명보다는 <선면(扇面) 서원아집도>로 더 잘 알려진 그림이다.

그림의 관지는 ‘무술년 여름 비 오는 중에 용눌에게 그려주다(戊戌夏雨中寫贈用訥).’로 되어있다. 그런데 그림에 쓰인 제발은 정유(丁酉)년 7월에 강세황이 쓴 것으로 되어있다. 정유년은 1777년이니 무술년 1778년보다 한 해 전이다. 김홍도가 미리 강세황에게 제발을 받아두었다가 나중에 그린 것임을 알 수 있다.

 

 

여담이지만 그럼 이 그림을 받은 용눌(用訥)은 누구일까?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김홍도필선록도(金弘道筆仙鹿圖)>의 관지에도 같은 이름이 등장한다.

 

[<김홍도필선록도(金弘道筆仙鹿圖)>, 견본담채, 131.5 x 57.6cm, 국립중앙박물관]

 

[<김홍도필선록도(金弘道筆仙鹿圖)> 관지 부분]

 

【이군 용눌(用訥)이 그림을 사랑하는 정도가 골수에 미쳐 있다. 내가 용눌을 사랑하는 것이 용눌이 그림을 사랑하는 것과 같아 이 그림을 그려준다. 정밀함이 극단에 이르면 뜻은 그림 밖에 있게 된다. 세상에 자운(子雲)이 있다면 자운을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기해년(1779) 음력 시월 사능.

(李君用訥愛畵入髓. 我愛用訥, 如用訥之愛畵, 寫此持贈. 精到之意, 自在筆外. 世如有子雲, 可以知子雲. 己亥 陽月 士能)】

 

이 그림에도 왼쪽 상단에 표암 강세황의 찬문(讚文)이 곁들여져 있다. 당시 김홍도의 그림 한 점 값이 서울에서 기와집 한 채를 살 수 있는 가격에 근사했다는 말도 있는데, 이렇게 강세황의 글까지 곁들인 김홍도의 그림을 두 번씩이나 받은 용눌은 김홍도와의 관계가 각별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용눌(用訥)은 이민식(李敏埴)이라는 한어(漢語) 역관이다. 1754년생으로 김홍도보다 9살이 어리다. 대대로 역관에 종사한 집안 출신이었지만 김홍도의 말대로 그림을 좋아한 인물이다.

 

또 다른 이야기로 건너뛰지만, 그가 소장한 그림 중에는 심사정의 〈와룡암소집도(臥龍庵小集圖)>가 있었다. 〈와룡암소집도(臥龍庵小集圖)>는 심사정이 1744년에 또 다른 서화수장가(書畵收藏家)였던 김광수(金光遂)의 집인 와룡암(臥龍菴)에 들렸다가 ‘비가 온 후 와룡암에서 흥이 일어나 명나라의 문인화가 심주(沈周)를 방(仿)하여 그렸다‘는 그림이다. 김광수는 연암 박지원으로부터 ’감상지학(鑑賞之學)의 개창자‘라는 칭찬을 들었던 인물이다.

 

[심사정 〈와룡암소집도(臥龍庵小集圖)>, 지본담채, 28.7 x 42.0cm, 간송미술관]

 

이 그림이 그려진 자리에는 심사정과 김광수 외에 김광국(金光國)이라는 인물도 함께 있었다. 김광국(金光國)은 의관직(醫官職)을 세습했던 명문 중인(中人) 집안 출신으로, 역시나 서화가이자 수장가, 감식가였다. 말년에 자신이 수집한 조선과 중국, 일본의 그림을 모아 《석농화원(石農畵苑)》이라는 화첩을 만든 장본인이다. 그림이 그려졌을 때 그는 17세였다. 나무 그늘 아래 탕건을 쓰고 앉은 인물이 주인 김광수이고, 돌아앉은 뒷모습에 머리는 갓 테두리만 보이는 두 사람이 심사정과 김광국이다.

 

김광국은 소시적 자신의 모습이 들어있는 이 〈와룡암소집도(臥龍庵小集圖)>를 47년 후에 다시 용눌 이민식의 집에서 보게 된다. 이에 김광국은 용눌에게 그림을 얻어와 그 내력을 〈와룡암소집도(臥龍庵小集圖)>에 적어 붙였다. 

 

[김광국 《석농화원(石農畵苑)》화첩 속 <와룡암소집도> 발문]

 

【.....(전략)....신해년 가을 우연히 이민식의 집을 지나다 소장한 그림을 (보았다). 〈와룡암소집도〉가 거기에 있었다. 이 그림을 만지며 추억에 잠겼다. 두 사람의 무덤가에 심은 나무는 이미 아름드리가 되었고 나 또한 백발노인이 되었다. 지나간 시간을 돌아보니 감회가 너무 깊다. 용눌에게 (이 그림을) 얻어 나의 ‘화원’에 돌려놓았다. 매일 한 번씩 …… 한참을 슬퍼하였다.

辛亥秋, 偶過李敏埴用訥□□所藏畵卷, 所謂臥龍庵小集圖在焉. 摩挲追憶, 顧□陳昔, 而二人者之墓木已拱, 余亦老白首矣. 俯仰今昔, 感懷殊深, 乃丐於用訥, 而復置我畵苑中. 每一□□□, 爲之愴懷移時】

▶신해년 : 1791년

 

별 감흥이 없던 그림도 이런 사연을 알고나니 더 특별해 보인다.

 

 

참고 및 인용 : 국립중앙박물관, 한국학, 그림을 그리다(이경화 외, 2013, 태학사), 세계미술용어사전(1999. 월간미술), 미술대사전(1998., 한국사전연구사 편집부),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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