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그림

무이구곡도(武夷九曲圖)

從心所欲 2020. 12. 25. 12:32

무이산(武夷山)은 중국 복건성(福建省)에 있는 평균 해발고도 350m의 산들로 이루어진 산맥이다. 침식으로 생긴 붉은색의 사암(砂岩) 절벽과 기둥, 협곡과 계곡, 풍부한 산림이 어우러진 뛰어난 자연 경관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특히 이 무이산의 협곡에는 36개의 봉우리와 99개의 암자가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 무이산을 조선의 사대부들은 모르는 이가 없었다. 이유는 단 하나다. 주희(朱熹)가 은거했던 곳이기 때문이다. 주희는 관직에 있던 9년간을 제외한 일생의 대부분을 무이산 인근에서 살았다. 그리고 54세가 되던 1183년부터는 무이산에 정사(精舍)를 짓고 은거하면서 제자들에게 강론하는 일과 저술 작업에 전념하였다. 주희가 죽은 뒤에도 무이구곡은 주희의 학통(學統)을 이은 후학들의 활동 공간이 되었다.

이로써 무이구곡은 주자성리학의 발원지로 인식되었고, 주희가 남긴 무이산의 아홉 굽이 계곡을 읊은 무이도가(武夷櫂歌)라는 시를 바탕으로 한 <무이구곡도>가 활발히 제작되었다. 무이도가(武夷櫂歌)는 ‘무이의 뱃노래’라는 뜻으로 무이구곡가(武夷九曲歌)라고도 한다.

 

고려말 조선초에 전래된 주자성리학을 깊이 탐구한 조선의 유학자들에게 주희는 학문의 종주이자 무한한 존경의 대상이었기 때문에, 주희가 은거했던 무이구곡은 학문적 이상향처럼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그러던 차에 16세기에 중국으로부터 <무이구곡도>가 전래되자 조선의 유학자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며 유행하였다. 원본을 베껴 그린 모사본(模寫本)이 한성은 물론 지방의 지식인들에게까지 널리 보급되었다. 이후 <무이구곡도>는 구한말까지 약 400년 동안 조선에서 꾸준히 그려졌다.

 

뿐만 아니라 조선의 유학자들은 주희의 무이정사(武夷精舍)를 본받아 자연 경관이 수려한 곳에 집을 짓고 그 주변의 승경 아홉 곳을 골라 구곡(九曲)이라는 이름을 붙이는가 하면, 주희의 <무이도가>를 차운(次韻)한 시를 짓는 것도 유행하였다. 이이가 황해도 고산군 석담리에 은병정사(隱屛精舍)를 짓고 조성한 고산구곡(高山九曲)과 고산구곡가(高山九曲歌), 도산서원(陶山書院)의 모태가 된 이황(李滉)의 도산서당(陶山書堂)과 농운정사(隴雲精舍), 송시열의 괴산 화양구곡(華陽九曲) 등이 모두 그와 같은 예이다.

 

무이구곡은 무이산맥(武夷山脈)의 반류산(盘流山)의 구곡계(九曲溪)가 주요 경관이며, 그 구곡계(九曲溪)는 대왕봉(大王峰), 옥녀봉(玉女峰), 천유봉(天游峰), 접순봉(接笋峰), 소도원(小桃源), 수렴동(水帘洞), 유향간(流香涧), 일선천(一线天)이라 한다. 그러나 주희의 무이도가(武夷櫂歌)에는 이 이름들을 거의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고 있다.  <무이구곡도>는 무이도가를 바탕으로 하여 주희가 읊은 승경의 대상을 실제 지리에서 찾아 화폭에 옮긴 것이다. 

십수(十首)로 된 무이도가의 서시(序詩)격인 첫 수(首)는 이렇게 시작된다.

 

【무이산 산 위에는 신선의 넋이 어려 있고,

산 아래로 흐르는 찬 물줄기는 굽이굽이 맑아라.

그 중 기이한 절경 알아보려 하니,

뱃노래 두세 가락 한가로이 들리네.

武夷山上有仙靈 山下寒流曲曲淸

欲識個中奇絶處 棹歌閑聽兩三聲 】

 

이어 무이구곡을 차례로 노래한다.

 

【일곡(一曲)의 냇가에서 낚싯배에 오르니,

만정봉 그림자가 맑은 내에 잠겼구나.

무지개다리 한번 끊어진 뒤 소식이 없고,

만학천봉은 푸르스름한 안개에 막혀있네.

一曲溪邊上釣船 幔亭峰影蘸晴川

虹橋一斷無消息 萬壑千峰鎖翠烟

 

이곡(二曲)은 우뚝 솟은 옥녀봉(玉女峰)이라

꽃 꽂고 물가에 있어 누구 위한 치장인가.

도인은 다시 양대(陽臺)의 꿈꾸지 않으리

흥에 겨워 앞산으로 들어가니 푸르름이 몇 겹인가.

二曲亭亭玉女峰 揷花臨水爲誰容

道人不作陽臺夢 興入前山翠幾重

 

삼곡에서 그대는 가학선(架壑船)을 보았는가.

노 젓기를 그친 지 몇 해인지 모르겠네.

뽕밭이 바다로 바뀐 것이 이제 얼마련가.

물거품 같고 바람 앞 등불 같아 가련한 우리 인생.

三曲君看架壑船 不知停棹幾何年

桑田海水今如許 泡沫風燈敢自憐】

▶가학선(架壑船) : 무이산에 거주하던 민족(闽族)의 조상들이 사용하던 배 모양의 장례기구

 

강세황(姜世晃)의 <무이구곡도>는 당시에 전하던 두루마리 형식의 <무이구곡도>를 간략한 선묘 위주로 베껴 그린 그림으로 알려져 있다.

 

[강세황 <무이구곡도(武夷九曲圖)> 1곡 부분, 지본수묵, 전체 25.5 x 406cm, 국립중앙박물관]

 

[강세황 <무이구곡도(武夷九曲圖)> 2 ~ 3곡 부분, 국립중앙박물관]

 

[강세황 <무이구곡도(武夷九曲圖)> 4 ~ 6곡 부분, 국립중앙박물관]

 

【4곡의 동서에 우뚝 솟은 두 바위에

바위 꽃 이슬 머금고 푸르게 드리웠네.

금계 울어 새벽을 알려도 사람은 보이지 않고,

달빛은 공산에 가득하고 못에는 물결이 넘실대네.

四曲東西兩石巖 巖花垂露碧監

金鷄叫罷無人見 月滿空山水滿潭

 

5곡은 산 높고 구름 깊어

오랜 안개비에 평평한 숲이 어둡구나.

숲 속의 나그네는 알아보는 이 없고,

뱃노래 소리 속에 변치 않는 만고의 심사러라.

五曲山高雲氣深 長時煙雨暗平林

林間有客無人識 乃聲中萬古心

 

6곡의 창병봉은 푸른 물굽이를 둘러싸고,

초가집의 사립문은 온종일 닫혀 있네.

나그네가 삿대에 의지하여 오니 바위 꽃이 떨어지고,

원숭이와 새는 놀라지도 않고 봄빛만 한가롭구나.

六曲蒼屛繞碧灣 茆茨終日掩柴關

客來倚棹巖花落 猿鳥不驚春意閑】

 

강세황 <무이구곡도(武夷九曲圖)> 7 ~ 8곡 부분, 국립중앙박물관]

 

【7곡에서 배를 저어 푸른 여울에 올라

은병봉과 선장봉을 다시 돌아보노라.

지난 밤 비 내린 봉우리 어여쁘고,

폭포에 물 더하고 그 길은 서늘해라.

七曲移舟上碧灘 隱屛仙掌更回看

却憐昨夜峰頭雨 添得飛泉幾道寒

 

팔곡의 안개가 바람에 흩어져 열리니,

고루암 앞에 물결이 굽이쳐 돌아가네.

이곳에 좋은 경치가 없다고 말하지 말라.

유람객이 오지 않는 게 오히려 좋구나.

八曲風煙勢欲開 鼓樓巖下水濚洄

莫言此處無佳景 自是遊人不上來】

 

[강세황 <무이구곡도(武夷九曲圖)> 9곡 부분, 국립중앙박물관]

 

【구곡에 다다르니 눈앞이 탁 트이고,

뽕나무 삼나무에 비이슬 내리는 속에 평천(平川)이 보이네.

뱃사공은 다시 무릉도원 가는 길을 찾지만,

이곳 말고 인간 세상에 별천지가 있으랴.

九曲將窮眼豁然 桑麻雨露見平川

漁郞更覓桃源路 除是人間別有天】

 

조선의 유학자들은 이 무이도가를 주자가 무이구곡을 보고 일어난 감흥을 노래한 산수시(山水詩)로 받아들이기도 했지만, 한편에서는 주자학의 오묘한 이치와 도학을 성취해가는 단계를 노래한 도학시(道學詩)로 보기도 하였다.

 

강세황의 <무이구곡도>가 문인화 취향의 간결하고도 함축적인 그림이라면 이성길(李成吉)의 <무이구곡도권(武夷九曲圖券)>은 좀 더 실제의 무이 계곡과 근사하게 그려진 실경산수화에 가깝다. 이성길의 <무이구곡도권>은 현존하는 무이구곡도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1592년에 제작된 것이다. 이 <무이구곡도권>은 중국에서 전래된 그림을 모사(模寫)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무이구곡의 특색 있는 경물들을 재구성하여 묘사한 것이지만, 무이산(武夷山) 관계 지리지(地理誌)에 기재된 유적들과 거의 일치할 정도로 구성력이 치밀하다는 평을 받고 있다.

이성길은 <무이구곡도>의 맨 앞부분에 율곡 이이의 고산구곡가를 적어 두었다.

[이성길 <무이구곡도권(武夷九曲圖券)>오른쪽부터 1, 견본수묵, 33.3 x 401.5cm, 국립중앙박물관]

 

[이성길 <무이구곡도권(武夷九曲圖券)>오른쪽부터 2, 견본수묵, 33.3 x 401.5cm, 국립중앙박물관]

 

[이성길 <무이구곡도권>오른쪽부터 3, 국립중앙박물관]

 

[이성길 <무이구곡도권>오른쪽부터 4, 국립중앙박물관]

 

[이성길 <무이구곡도권>오른쪽부터 5, 국립중앙박물관]

 

[이성길 <무이구곡도권>오른쪽부터 6, 국립중앙박물관]

 

[이성길 <무이구곡도권>오른쪽부터 7, 국립중앙박물관]

 

화폭 왼쪽에 ‘만력20년 임진 창주 이성길(萬曆二十年 壬辰 滄洲 李成吉)’이라는 관지가 보인다. 만력(萬曆)은 중국 명나라의 제13대 황제인 만력제 때의 연호로 1573년을 원년으로 한다. 만력 20년은 1592년으로 적힌 대로 임진년(壬辰年)이다.

이성길(1562 ~ 1621)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서화가이다. 사마시에 장원으로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그 후 증광문과에 급제하였다. 임진왜란 때에는 광해군이 이끄는 분조(分朝)의 병조참판을 맡았었다.

 

[이성길 <무이구곡도권>오른쪽부터 8, 국립중앙박물관]

 

이 <무이구곡도권>은 안견파 화풍을 토대로 하되 산봉우리와 토파에는 발묵(發墨)의 흑백대비, 강약이 강조된 선묘(線描) 등 절파화풍(浙派畵風)의 특색이 가미되었다고 설명된다.

 

 

 

참고 및 인용 : 한시작가작품사전(2007. 국학자료원), 중국문화답사기 1(권석환, 2002, 다락원), 중국국가급풍경명승구총람(이현국, 2011. 황매희), 한국 역대 서화가 사전(2011. 국립문화재연구소),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