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민심서

목민심서 2 - 목민의 관직은 구해서 얻는 자리가 아니다.

從心所欲 2021. 2. 18. 07:51

[해설]

《목민심서》 제1편인 부임(赴任)은 수령이 고을에 부임하는 데 필요한 사항을 열거한 내용이다.

부임 6조 가운데 제1조인 제배(除拜)는 수령에 임명되는 것을 말한다.

 

[김홍도필풍속도(金弘道筆風俗圖) 8점 中 2, 1770년작, 지본담채, 121.8 x 39.4cm, 국립중앙박물관]

 

 

●부임(赴任) 제1조 제배(除拜) 1항.

다른 관직은 구해도 좋으나, 목민의 관직은 구해서는 안 된다.

(他官可求 牧民之官 不可求也)

 

위를 섬기는 자를 민(民)이라 하고, 민을 다스리는 자를 사(士)라 한다. 사(士)란 벼슬살이[仕]하는 것이니, 벼슬살이하는 자는 모두 백성을 다스리는 자들이다. 그러나 경관(京官)은 혹 왕을 받들어 모시는 것을 직분으로 삼기도 하고, 혹 맡아서 지키는 것을 소임으로 삼기도 하니, 조심하고 근신(謹愼)하면 아마도 죄 되거나 뉘우칠 일은 없을 것이다. 오직 수령(守令)만은 만민을 다스리는 자이니, 하루에 만 가지 일을 처리함이 마치 천하 국가를 다스리는 군왕과도 같아서, 그것의 크고 작음만 다를 뿐, 그 처지는 실로 같은 것이다. 이를 어찌 스스로 구할 수 있겠는가.

▶경관(京官) : 서울 안 각 관아의 관원. 다만 개성부, 강화(江華)부, 수원(水原)부, 광주(廣州)부의 수령인 유수(留守)는 지역은 지방이라도 관직은 경관직에 속했다.

 

옛날에 상공(上公)은 지방이 100리, 후백(侯伯)은 70리, 자남(子男)은 50리였으며, 50리가 못 되면 부용(附庸)이라 일렀는데, 그들은 모두 제후(諸侯)이다. 이제 큰 주(州)는 그 지방이 상공과 맞먹고, 중읍은 후백과 맞먹으며, 하읍은 자남과 맞먹고, 잔소(殘小)한 읍은 부용과 같으니, 그 벼슬 이름은 다를망정 그 직책은 옛날 제후의 바로 그것이다. 옛날 제후들에게는 정승이 있고, 삼경(三卿)이 있으며, 대부(大夫)와 백관이 갖추어져 있어서, 제각기 그 일을 처리해 나갔기 때문에 제후 노릇하기 어렵지 않았다.

▶상공(上公)은 …… 자남(子男) : 옛날 제후(諸侯)의 다섯 가지 등급인 공(公)ㆍ후(侯)ㆍ백(伯)ㆍ자(子)ㆍ남(男).

▶부용(附庸) : 큰 제후국(諸侯國)에 부속된 작은 나라

▶삼경(三卿) : 중국 주(周)나라 때 두었던 제후(諸侯)의 사도(司徒), 사마(司馬), 사공(司空).

▶대부(大夫) : 중국의 하(夏),은(殷),주(周) 때에는 관리에 경(卿)ㆍ대부(大夫)ㆍ사(士)의 세 등급이 있었다. 수(隋)나라 이후에는 품계를 가진 모든 관리를 뜻하였다.

 

오늘날의 수령은 홀로 만민의 위에 우뚝 서서 간사한 백성 세 사람을 좌(佐)로 삼고, 간사한 아전 60~70명을 보(輔)로 삼으며, 사나운 자 몇 사람을 막빈(幕賓)으로 삼고, 패악한 무리 10명을 복례(僕隷)로 삼았다. 이들은 서로 끼리끼리 뭉치어 수령 한 사람의 총명을 가리고, 사기와 농간을 일삼아서 만백성을 못살게 한다.

▶좌(佐) : 속료(屬僚), 속관(屬官). 요즈음으로 치면 비서의 의미.

▶보(輔) : 조선시대에 중앙과 지방의 관아에 속하여 수령의 업무를 돕는 구실아치인 아전(衙前)을 달리 이르는 말.

▶막빈(幕賓) : 비장(裨將), 또는 막하(幕下)에서 가까이 믿는 사람.

▶복례(僕隷) : 지방의 관노(官奴)와 사령(使令)

 

그런데 옛날 제후들은 아비가 아들에게 그 지위를 물려주어 대대로 그 자리를 승습(承襲)하였다. 그래서 신민이 죄를 지으면 혹 종신토록 등용되지 못하거나, 더러는 여러 대가 되어도 다시 일어나지 못하게 되어, 그 명분과 의리가 지극히 소중하였다. 그러므로 비록 악한 자가 있더라도 감히 복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늘날의 수령은 오래 가야 혹 2년이요, 그렇지 않으면 몇 달 만에 바뀌니, 그것은 마치 여관에 지나가는 과객과도 같다. 저 좌(佐)ㆍ보(輔)ㆍ막빈ㆍ복례(僕隷) 따위들은 옛날 세습(世襲)하는 경상(卿相)들처럼 그 직을 아비가 아들에게 물려준다. 주객의 처지가 이미 다르고 권한은 오래 사는 사람과 잠깐 다녀가는 사람이 아주 다른데, 그들에게 군신의 대의와 천지의 정분(定分)이 있을 리 없다. 비록 죄를 저지른 자가 있더라도 도피하였다가 손인 수령이 떠난 뒤에 주인인 좌(佐)ㆍ보(輔)ㆍ막빈들은 집으로 돌아와서, 예나 다름없이 안녕과 부를 누리게 되니, 무엇을 또 두려워할 것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수령 노릇의 어려움은 공후(公侯)보다도 백배나 더하니, 이 어찌 구할 수 있는 것이겠는가. 비록 덕망을 갖추었다 하더라도 위엄이 없으면 하기 어렵고, 비록 하고 싶은 뜻이 있다 하더라도 밝지 못하면 하지 못한다. 무릇 그런 능력이 없는 자가 수령이 되면 백성들은 그 해를 입어 곤궁하고 고통스러우며, 사람이 비난하고 귀신이 책망하여 재앙이 자손들에게까지 미칠 것이니, 이 어찌 구할 수 있는 것이겠는가.

 

오늘날 무관(武官)들이 몸소 전관(銓官)에게 청탁하여 수령되기를 빌어 얻는 버릇이 한 풍습으로 되어 조금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다. 그 재주와 슬기로써 그 직책을 감당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대해서는, 구하는 사람도 스스로의 실력을 헤아리지 않고, 들어 주는 자도 또한 다시 더 묻고자 하지도 않으니, 이는 진실로 잘못된 일이다.

▶전관(銓官) : 문무관(文武官)의 임명에 대한 전형(銓衡)을 맡아보는 관리. 문관은 이조(吏曹)에서, 무관은 병조(兵曹)에서 하였다.

 

[김홍도필풍속도(金弘道筆風俗圖) 8점 中 2 부분]

 

문신(文臣)으로 옥당(玉堂)이나 은대(銀臺)가 된 이는, 부모의 봉양을 위해 고을살이를 청하는 법이 있다. 아래에서는 부모에의 효성 때문에 청하고 위에서는 그 효도 때문에 허락하는데, 그것이 풍습이 되어서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다. 그러나 중국의 고대 우(虞)ㆍ하(夏)ㆍ은(殷)ㆍ주(周)의 세대에 있어서도 이런 일은 결코 없었던 것이다.

▶옥당(玉堂) : 홍문관(弘文館)의 별칭. 부제학(副提學)이하 홍문관의 실무를 담당하는 관원의 총칭.

▶은대(銀臺) : 승정원(承政院)의 별칭.

▶옥당(玉堂)이나 …… 법 : 조선 시대에는 문과 급제자에 한하여 늙은 부모가 있고 집안은 빈곤한 시신(侍臣)이 수령이 되기를 주청하면 허락하게 되어 있다. 《大典會通 吏典 雜令》

 

대체로 집은 가난하고 어버이는 늙었으되, 끼니도 잇기 어려운 것은 그 사정으로 보아서는 진실로 딱한 일이기는 하다. 그러나 천지의 공리(公理)로 말하면 벼슬을 위해서 사람을 고르는 것이요, 사람을 위해서 벼슬을 고르는 법은 없다. 한 집안의 봉양을 위하여 만민의 수령이 되기를 구하는 것이 옳은 일이겠는가. 남의 신하 된 이가 만민에게 거두어다가 내 부모 봉양하기를 바라는 것은 이치에 당치 않은 일이요, 남의 임금 된 이가 만민에게 거두어다가 네 부모를 봉양하라 허락하는 것도 이치에 당치 않은 일이다.

 

만약, 재주를 가지고 도(道)를 지닌 사람이 스스로 제 능력을 헤아려 보아, 목민(牧民)할 만하면, 글을 올려 자신을 천거하여, 한 군을 다스리기를 청하는 것은 좋다. 그저 집이 가난하고 어버이는 늙었는데 봉양이 어려움을 핑계 삼아 한 군을 빌어 얻는 것은 이치에 당치 않다.

옛날에는 경연(經筵)에 참석하는 신하로서 본래 백성들의 신망을 받고 있던 이가 어쩌다가 한 군을 빌어 얻기를 바랄 때는, 조정에서는 그 사람을 보내되 그가 능하지 못하리라고 염려하지도 아니하고, 군민들도 이 사람 얻는 것을 모두 좋아하고 기뻐하였다. 그런데 후세에 재주도 덕망도 없는 자가 이를 끌어대어 전례로 삼아, 집은 가난하지도 않고 부모 봉양이 어렵지도 않은 자가 또한 모두 염치없이 고을살이를 구하니 예(禮)가 아니다. 기필코 이런 예의 뒤를 밟아서는 안 된다.

▶경연(經筵)에 참석하는 신하 : 임금을 모시고 경서(經書)를 강론하는 자리에 참석할만한 실력을 가진 관리.

▶고을살이 : 수령 자리.

 

퇴계(退溪)가 이강이(李剛而)에게 보내는 답서(答書)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맛있는 음식이 없으면 남의 자식으로서 큰 걱정거리가 되겠지만, 요새 사람들은 매양 영양(榮養)을 빙자하여 의롭지 못한 국록(國祿)을 받고 있으니 이는 공동묘지에서 제사 음식을 빌어다가 봉양에 쓰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또 말하였다.

“모의(毛義)가 수령의 임명을 받고서 기뻐하자 장봉(張奉)은 이를 아름답게 여겼는데, 이는 다른 하나의 설(說)인 것이다. 모공(毛公)은 본래 고상히 숨을 뜻을 가졌으나, 부모 봉양을 위해 뜻을 굽힌 까닭에 이를 아름답게 여겼던 것이다. 만일 의롭지 못한 수령의 임명을 얻고서 기뻐했다면 장봉은 침을 뱉고 갔을 것이다.”

▶모의(毛義)와 장봉(張奉) : 모두 후한(後漢) 때의 사람들로 모의(毛義)는 효행(孝行)이 높았다.

▶영양(榮養) : 자신이 영화롭게 되어 그 녹으로 부모를 봉양한다는 의미.

▶공동묘지에서 ... 봉양 : 《맹자(孟子)》에 나오는 고사로, 옳지 못한 방법으로 얻은 녹으로 부모를 봉양하는 것은 영화가 아니라 욕된 일이라는 의미로 인용.

 

살피건대, 재주는 부족하고 집은 넉넉한데도 고을살이를 구하여 어버이 봉양을 핑계하는 것은 어찌 불의(不義)가 아니겠는가? 만일 백성을 다스릴 재주가 있다면 비록 자천(自薦)해도 좋을 것이다.

 

후한(後漢) 때 경순(耿純)이 한 군을 다스려 있는 힘을 다하여 스스로 능력을 바치기를 청하였더니, 임금은 웃으면서,

“경이 백성을 다스려 능력을 바치고자 하는군.”하고, 드디어 동군 태수(東郡太守)에 임명하였다.

당(唐)나라 때, 이포진(李抱眞)이 한 주(州)를 맡아서 스스로 시험해 보기를 원하여, 처음에 노주(潞州)에 임명되었고, 다시 회주(懷州)로 옮겨 8년 동안 백성을 다스리매 백성이 편안하게 되었다.

 

 

 

번역문 출처 : 한국고전번역원(이정섭 역, 19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