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그림

정선 사공도시품첩 4

從心所欲 2021. 2. 26. 06:05

사공도의 「이십사시품(二十四詩品)」 열 번째는 ‘자연(自然)’이다. ‘저절로 그렇게 되는 모양(模樣)’이나 ‘인공의 힘을 더하지 않은 천연(天然) 그대로의 상태(狀態)’를 가리킨다.

 

俯拾卽是(부습즉시) : 구부려 주우면 곧 그것이므로

不取諸隣(불취제린) : 다른 곳에서 취하지 말아야 한다.

俱道適往(구도적왕) : 도(道)와 더불어 알맞게 가니

著手成春(저수성춘) : 손을 대면 곧 봄이로다.

如逢花開(여봉화개) : 활짝 핀 꽃을 만난 것 같고

如瞻新歲(여첨신세) : 새로운 해를 우러름 같도다.

眞與不奪(진여불탈) : 진실로 더불어 있으면 뺏기지 않고

强得易貧(강득이빈) : 억지로 얻는 것은 쉽게 잃는다.

幽人空山(유인공산) : 사람 없는 산중에 숨어사는 사람은

過雨菜蘋(과우채빈) : 비가 지나간 뒤에 마름을 따도다.

薄言情晤(박언정오) : 말없이 정다움으로 만나니

悠悠天鈞(유유천균) : 유유히 천연(天然)으로 되어 감이라.

 

[《사공도시품첩(司空圖詩品帖)》 중 <자연(自然)> ⑩, 견본담채, 27.8 × 25.2cm, 국립중앙박물관]

 

[《사공도시품첩(司空圖詩品帖)》 중 <자연(自然)> 정선 그림과 이광사 글씨ㅣ전서]

 

이 그림에 대한 화평 역시 곱지가 않다.

“짙으나 맛은 적으니, 이는 영웅이 남을 속이는 솜씨이다(濃而少味 此英雄欺人手也)”

 

시품의 열한 번째는 ‘함축(含蓄)’이다.

 

不著一字(부저일자) : 한 글자를 쓰지 않고도

盡得風流(진득풍류) : 풍류를 모두 얻도다.

語不涉己(어불섭기) : 말은 자신과 연관이 없어도

若不堪憂(약불감우) : 근심을 견디지 못하는 것과 같도다.

是有眞帝(시유진제) : 여기에는 진제(眞帝)가 들어있어

與之沈浮(여지침부) : 그것과 더불어 부침하도다.

如淥滿洒(여록만쇄) : 술을 가득히 걸러놓고

花時返秋(화시반추) : 꽃 피는 때에 수심에 잠긴다.

悠悠空塵(유유공진) : 떠다니는 하늘의 먼지

忽忽海漚(홀홀해구) : 홀홀히 꺼지는 바다 물거품.

淺深聚散(천심취산) : 얕고, 깊고, 모이고 흩어지며

萬取一收(만취일수) : 만에서 하나를 취해들이도다.

 

[《사공도시품첩(司空圖詩品帖)》 중 <함축(含蓄)> 첩에서의 순서는 16번, 견본담채, 27.8 × 25.2cm, 국립중앙박물관]

 

[《사공도시품첩(司空圖詩品帖)》 중 <함축(含蓄)>, 정선 그림과 이광사 글씨ㅣ해서]

 

화평 : “깊은 맛은 적으나, 매이지 않아 담백하다(維少沈深之味 却自澹宕)”

 

열두 번째 시품은 ‘호방(豪放)’이다. ‘의기(義氣)가 장하여 작은 일에 거리낌이 없는 것’이다.

 

觀花匪禁 : 꽃구경 막지 않으며

呑吐太虛 : 천지를 삼켰다 토해낸다.

由道返氣 : 도리를 따라 기(氣)로 돌아가고

處得以狂 : 사나운 기세로 처할 곳을 얻도다.

天風浪浪 : 하늘에 바람은 거침이 없고

海山蒼蒼 : 바다와 산은 푸르기만 하도다.

眞力彌滿 : 참된 힘이 가득차고

萬象在旁 : 삼라만상이 그 곁에 있도다.

前招三辰 : 앞으로는 달과 별과 해를 부르고

後引鳳凰 : 뒤로는 봉황새를 끌어온다.

曉策六鼇 : 해 뜰 무렵 여섯 큰 거북을 채찍질하여

濯足扶桑 : 동쪽 바다 부상(扶桑)에서 발을 씻는다.

 

[《사공도시품첩(司空圖詩品帖)》 중 <호방(豪放)> 첩에서의 순서는 20번, 견본담채, 27.8 × 25.2cm, 국립중앙박물관]

 

[《사공도시품첩(司空圖詩品帖)》 중 <호방(豪放)>, 정선 그림과 이광사 글씨ㅣ행서]

 

화평은 “이는 겸재 노인이 처음 붓을 시험한 것이라 표일한 기운이 적다(此謙老初次試筆 故少飄逸之氣)”라고 했다. 첩에는 이 그림이 스무 번째에 장황되었지만 ‘처음 붓을 시험한 것’이라는 글로 미루어 정선이 《사공도시품첩(司空圖詩品帖)》의 전체 그림 중 이 <호방(豪放)> 그림을 제일 먼저 그렸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가 있다. 또한 화평을 쓴 사람은 정선이 그림을 그리는 과정을 곁에서 지켜봤을 것이라는 유추도 가능해진다.

 

열세 번째 시품은 ‘정신(精神)’이다.

 

欲返不盡(욕반부진) : 돌아가려했으나 가지 못해

相期與來(상기여래) : 서로 함께 오기로 기약하였네.

明漪絶底(명의절저) : 맑은 물결 바닥까지 보이고

奇花初胎(기화초태) : 기이한 꽃이 갓 봉오리를 맺는다.

靑春鸚鵡(청춘앵무) : 푸른 봄날의 앵무새들은

楊柳樓臺(양류누대) : 버드나무 사이 누대에서 노닌다.

碧山人來(벽산인래) : 푸른 산에 사람이 찾아와

淸酒滿杯(청주만배) : 맑은 술이 술잔에 가득하다

生氣遠出(생기원출) : 생기는 멀리 뻗어가고

浮蛆死灰(부저사회) : 꺼진 재는 다시 불붙지 않는다.

妙造自然(묘조자연) : 묘한 조화는 자연스러우니

伊誰與哉(이수여재) : 그 누가 이를 함께 할 것인가.

 

[《사공도시품첩(司空圖詩品帖)》 중 <정신(精神)> ⑭, 견본담채, 27.8 × 25.2cm, 국립중앙박물관]

 

[《사공도시품첩(司空圖詩品帖)》 중 <정신(精神)>, 정선 그림과 이광사 글씨ㅣ해서]

 

“제재가 쓸데없으니 운치가 속되다.(題冗故韻俗)”

화평을 보면 볼수록, 천하의 정선 그림에 이런 쓴 소리를 늘어놓을 수 있었던 인물이 누구였는지 궁금하다.

 

 

 

참고 : 사공도시품첩과 18세기 회화비평(유승민), 국립중앙박물관,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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