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그림

심사정 강상야박도(江上夜泊圖)

從心所欲 2021. 3. 20. 08:50

‘봄비’라고 하면 무언가 낭만적인 생각이 먼저 떠오르지만, 농사짓는 이들에게는 반가운 단비라는 생각이 먼저 떠오를듯하다. 불과 얼마전만해도 봄에 가뭄이 들면 그해 농사 걱정을 하는 뉴스들로 떠들썩하곤 했었다. 이제 그런 걱정이 없어진 것인지 아니면 그런 소식이 더 이상 뉴스의 가치가 없어진 것인지, 근래에 들어서는 봄 가뭄이 들어도 걱정하는 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는다.

 

관개시설이 미비해 하늘만 쳐다보던 그 옛날은 어떠했을까?

시성(詩聖)이라 불렸던 중국 당나라 때의 시인 두보(杜甫)가 지은 시 가운데 <춘야희우(春夜喜雨)>라는 오언율시가 있다. ‘봄밤에 내린 기쁜 비’라는 뜻이다.

 

好雨知時節 좋은 비는 시절을 알아

當春乃發生 봄이 되니 이내 내리네.

隨風潛入夜 바람 따라 몰래 밤에 찾아 들어와

潤物細無聲 만물을 적시네, 가만 가만 소리도 없이.

野徑雲俱黑 들길은 구름이 드리워 어두운데

江船火燭明 강 위에 뜬 배의 불빛만이 밝구나.

曉看紅濕處 새벽에 붉게 젖은 곳을 보노라면

花重錦官城 금관성에 꽃들이 겹겹이 피어있으리라.

 

가뭄으로 메마른 땅에 밤에 소리 없이 내리는 봄비를 보고 이제 곧 이 단비로 인하여 만물이 소생할 것을 기대하는 마음을 시로 옮긴 것이다.

시 맨 끝 구절에 나오는 금관성(錦官城)은 중국 사천성(四川省)의 성도(成都)를 가리킨다.

당시 두보는 지방관으로 있다가 대기근을 만나 관직을 버리고 처자와 함께 식량을 구하려고 전전한 끝에 사천성(四川省)의 성도(成都)에 도착하여 교외의 완화계(浣花溪)에다 완화초당(浣花草堂)을 짓고 지내던 때였다. 초당은 비바람에 쓰러질 만큼 초라했고 가족의 굶주림은 여전한 삶이었다. 두보는 이곳에서 4년을 지내면서 약 240여 편의 시를 남겼다고 한다.

 

[심사정 <강상야박도>, 1747년, 지본담채, 153.5 × 61cm, 국립중앙박물관]

 

<강상야박도(江上夜泊圖)>는 현재(玄齋) 심사정(沈師正, 1707 ~ 1769)의 산수화를 대표하는 작품 중의 하나다. ‘강에 정박한 배에서 밤을 지내다’라는 뜻의 이 수묵산수화는 시서화가 결합된 남종산수화이다. 심사정이 40세가 되던 해 정월에 그린 것이다. 그림의 세로 길이가 153cm가 넘을 정도의 크기에다 그림의 수준까지 높아 심사정이 마음먹고 그린 그림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림 상단에 적힌 화제는 ‘野逕雲俱黑 江船火獨明’, ‘들길은 구름이 드리워 어두운데 강 위에 뜬 배의 불빛만이 밝구나.’이다. 두보의 <춘야희우(春夜喜雨)>의 전(轉)에 해당하는 2구를 옮겨 적은 것이다.

 

[심사정 <강상야박도> 부분]

 

그림에 대한 국립중앙박물관 전인지 큐레이터의 설명이다.

 

【그림은 얼른 보아 세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맨 아랫부분이 보는 사람 시선에서 가장 가까운 풍경인데 둥근 언덕 위에 잎사귀가 뾰족한 나무들이 서너 그루 서 있습니다. 또한 가장 분명하고 진하게 그렸습니다. 둥근 언덕에서 지그재그로 연결된 길을 따라가 본 그림의 중간에는 수초가 드문드문 우거진 강물 속에 배가 한 척 떠있습니다. 그림에서 유일하게 채색이 조금 가해진 부분인데 붉은 색으로 배에 켜진 등불을 암시합니다. 가장 먼 풍경은 가려진 듯 희미하게 보이지 않으며 멀리 두 개의 산봉우리가 우뚝 솟아 전체의 균형을 잡아줍니다. 수묵만으로 그려진 점, 배에 켜진 불빛, 어둠에 싸인 듯 희미한 먼 풍경들로 볼 때, 이 장면이 밤의 물가 풍경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림을 들여다보면 볼수록 먹을 다루는 작가의 실력이 예사롭지 않음을 느끼게 됩니다.】

 

봄비를 맞는 두보의 반가움과는 달리 그림의 정경은 쓸쓸하기만 하다. 특히 비 내리는 배위에서 노를 쥔 채 웅크리고 있는 사내의 모습은 처량하기까지 하다.

 

[심사정 <강상야박도> 부분]

 

심사정은 이 사내를 누구로 생각하며 그렸을까?

봄비 내리던 밤의 기쁨을 잊은 채 성도를 떠나 배를 타고 떠돌며 살다가 병이 들어 59세에 동정호(洞庭湖)에서 죽은 두보였을까, 아니면 명문사대부 집안에 태어났으나 역모 죄인 집안의 후손이란 굴레에 갇혀 평생 직업화가처럼 그림만 그리고 살아야 했던 자신의 불우한 모습이었을까?

 

 

 

참고 및 인용 : 강상야박(江上夜泊) - 강에 뜬 배 등불 밝구나(전인지, 국립중앙박물관), 낯선 문학 가깝게 보기 : 중국문학(박재우, 2013. 인문과 교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