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가쟁명

피아니스트 임현정과 운명

從心所欲 2021. 5. 1. 16:07

유튜브의 알고리즘에 이끌려 피아니스트 임현정을 생전 처음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녀가 연주하는 베토벤의 운명을 듣고서야 그동안 수 없이 들었으면서도 그 명성에 합당한 감동을 제대로 느끼지 못했던 곡의 가치를 비로소 알게 된 것 같았다. 또한 그토록 듣기 싫었던 피아노의 강한 해머 소리가 왜 꼭 피아노에 있어야 하는지도 깨닫게 되었다. 피아노 하나만으로 그 어떤 오케스트라의 연주보다도 더 장엄하면서 극적인 느낌을 불러내는 임현정의 연주가 놀랍기만 하다.

 

대개의 음악가들은 국제 콩쿠르를 통하여 자신의 명성을 쌓아간다. 그러나 임현정은 유튜브를 통하여 알려진 피아니스트라는 사실도 새롭게 알게 되었다.

2009년 스위스 바젤에서 열린 쇼팽과 라흐마니노프 에튀드(étude, 연습곡) 전곡 연주회에서 자신이 앙코르 곡으로 연주한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왕벌의 비행(Flight of the Bumble Bee)’ 영상을 한국에 있는 엄마에게 보여주려고 유튜브에 올렸는데, 조회수가 30만을 넘어서면서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이 연주를 두고 사람들은 ‘세상에서 가장 빠른 왕벌’이라고 불렀다. 아래 영상에서 피아노 건반을 치고 있는 그녀의 손은 마치 벌들의 쉴 새 없는 날갯짓처럼 보인다. 관객의 앙코르 요청에 손에 쥐고 있던 손수건을 툭 내던지더니 바로 의자에 앉자마자 연주를 시작하는 임현정의 모습도 흥미롭고 이채롭다.

 

 

임현정을 아는 이들에게는 식상한 이야기겠지만, 임현정은 3살 때에 피아노를 시작하여 12살 때에 홀로 파리로 유학을 갔다. 가려던 예술중학교에 떨어져서 금명여중을 다니다 1학년 때 파리국립음악원을 목표로 떠난 것이다.

콩피엔느 음악원을 5개월 만에 수석으로 조기 졸업한 뒤, 루앙 국립음악원에 진학하여 3년 만에 조기 졸업하고, 그 다음 해인 2003년에 드뷔시와 라벨이 다녔던 파리 국립고등음악원에 최연소로 입학하였다. 그리고 여기도 역시 4년 과정을

3년 만에 조기 졸업하며 최연소, 최우수 졸업자가 되었다.

그리고 모두가 부러워하는 벨기에에 있는 음악학교에 입학했다. 이 음악학교는 1년에 한 두 명의 신입생만 뽑을 정도로 소수정예를 양성하는 학교로, 학생들을 위한 차량, 기사, 요리, 청소까지 제공해주는 고급 학교였다고 한다. 하지만 학교에서 벨기에 왕족들을 위한 연주를 몇 번 하고난 뒤, 자신이 새장 속에 갇혀있는 새와 같다는 느낌이 들어 3개월도 안 되어 자퇴를 하였다.

 

임현정의 천재성은 첫 데뷔 앨범 녹음과정에서도 드러났다.

2011년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열렸던 임현정의 독주회를 EMI 음반사 사장이 참관한 뒤, 음반사는 독주회 연주곡이었던 라벨과 스크랴빈을 첫 음반 수록곡으로 하는 음반제작을 제안했다. 하지만 임현정은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전곡을 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피아노의 신약성서'로 알려진 베토벤 소나타 전곡은 모두 32곡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피아니스트가 이를 녹음하려면 통상 10년 정도가 걸린다고 하는데, 임현정은 9일 만에 모두 끝냈다.

"2009년부터 베토벤의 편지 3000여 쪽과 관련 서적을 모두 구해 읽으면서 작곡가의 삶과 음악에 미쳐 있었어요. 마치 저 자신보다 베토벤을 더 잘 아는 느낌이었지요."라는 임현정의 말대로 준비되었었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하지만 또한 천재성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기도 한 것이다.

 

[임현정 앨범 자켓 : 임현정은 베토벤의 의사와 상관없이 출판된 소나타 19번, 20번 2곡을 이 앨범에서는 작곡가에 대한 예의와 존중의 차원에서 녹음하지 않고 30곡만 녹음했다고 한다.] 

 

임현정의 연주만큼이나 그녀의 당당한 행보도 매혹적이다.

임현정은 초청받은 연주회에서 항상 첫 번째 앙코르곡으로 자신이 편곡한 ‘아리랑 판타지’를 연주한다고 한다. 이 곡은 임현정이 런던의 로얄 스코틀랜드 국립 오케스트라와 협연을 한 영국 로얄 알버트홀(Royal Albert Hall) 데뷔 무대에서 한국을 알리기 위해 우리 민요 아리랑을 변주해 만든 곡이라 한다.

그런데 임현정이 일본 연주회 때 일본 주최 측에서 이 곡을 연주하지 말아달라는 무례한 요구를 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임현정은 자신이 준비한 레퍼토리를 끝낸 뒤 이어서 바로 이 아리랑 판타지를 연주하였다. 일본 주최 측에서 화를 내며 다시 초청하지 않겠다고 하자 “굳이 나를 불러주지 않아도 괜찮다”고 하며 자리를 떠났다는 전설 같은 에피소드도 전해진다.

 

임현정은 2018년에 어떤 국제 콩쿠르 창립자의 초대를 받아 콩쿠르의 심사위원으로 참석했는데, 콩쿠르에 출전한 심사위원장 제자가 모차르트 소나타를 연주하다가 중간에 한 악장을 다 빼먹고 연주했는데도 심사위원장과 심사위원들이 그걸 못 본 체하는 것을 보고는 참다못해 이를 지적한 뒤 심사위원을 사퇴하고 그 자리를 떠나기도 했다.

 

임현정은 자신이 그동안 콩쿠르에 참석하지 않았던 이유에 대하여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밝혔다.

“열아홉 살 때 정말 먹고살려고 프랑스 플람 콩쿠르에 나가 대상을 받긴 했어요. 이후 잘츠부르크 등에서 연주 기회가 열렸죠. 남들은 한참 더 큰 콩쿠르에 도전할 나이였지만, 저는 이제 굶어 죽는 한이 있어도 두 번 다시 안 나가겠다고 결심했어요. 누군가의 불행 없이는 승자가 나올 수 없는 경쟁 시스템에서 벗어나서 나 자신을 우주의 ‘숭고한 계획’에 맡기고 믿어보자고 각오한 거죠.”

그리고 임현정은 기존의 틀을 벗어나 자신의 새로운 해석을 바탕으로한 음악을 연주해갔다.

아래 영상을 보면 임현정이 베토벤의 운명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지, 그래서 왜 그녀가 연주하는 운명이 다른 감동을 주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가 있다. 대담을 들어보면 솔직하면서도 털털한 성격을 만날 수 있다. 운명 연주는 6분 30초부터시작된다.

 

 

 

 

임현정은 2016년 음악과 영성에 관한 에세이인 ‘침묵의 소리(Le Son du Silence)'를 출간하였다.  2018년에는 그녀가 유럽 활동을 위해 거주하고 있는 스위스 뇌샤텔의 주의회가 제정한 국제문화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그녀의 파리 국립음악원 스승이었던 앙리 바르다 교수는 임현정에 대하여 “그녀는 몸의 세포 하나하나까지도 음악적인 사람”이라고 말했다.

 

어떻게 우리나라에는 이처럼 뛰어난 여성들이 많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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