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가쟁명

ABC제도와 ABC협회

從心所欲 2021. 7. 11. 15:40

며칠 전 문화체육관광부는 ABC협회가 제도개선 권고를 이행하지 않은 것에 대하여 그동안 정부광고 집행에 참고자료로 삼고 언론보조금 지급의 기준으로 삼아왔던 ABC협회의 자료를 향후에는 사용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앞서 금년 봄에 문체부는 신문사들의 '부수 부풀리기' 의혹이 제기되자, ABC협회에 대한 사무 검사를 실시하였다. 그 결과 각 신문사에서 주장한 구독자수와 실제 구독자수의 비율을 의미하는 성실율이 ABC협회는 98%라고 발표했지만 문체부의 조사 결과로는 60% 미만으로 나타났다. 이에 문체부는 협회에 전반적인 제도 개선을 권고하였다. 그러나 ABC협회는 이후 제도개선 노력에 별다른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ABC협회는 문체부 소관의 사단법인으로, 문체부가 관리와 감독 권한을 갖고 있으며 설립허가를 취소할 수 있는 권한도 있다. 게다가 협회의 안정적 운영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매년 정부로부터 공적자금까지 지원받고 있는 단체다. 그런데도 협회는 말 그대로 개긴 것이다. 이에 문체부는 향후 ABC협회 자료 대신 다른 지표를 이용하여 정부광고를 집행하겠다는 것과 금년에 배정된 공적자금의 잔액 약 45억 원도 환수하겠다고 밝힌 것이다. 모두 ABC협회 스스로가 자초한 결과다.

그동안 적폐언론들의 행태에 환멸을 느끼며 언론개혁을 원했던 시민들은 이 소식을 반겼다. 그나마 정부가 언론개혁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신호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ABC는 원래 Audit Bureau of Circulations의 약자이다. ‘발행부수 공사(公査) 기구’ 정도로 해석될 수 있다. 신문과 잡지와 같은 인쇄매체(print media)의 발행과 판매부수 등을 조사해 인증하는 발행부수 공시제도인 동시에 이 제도를 주관하는 기구이기도 하다. 이러한 제도는 광고라는 업종이 새로운 산업으로 폭발적 성장을 하고 있던 미국에서 1914년 처음 탄생하였다. 이후 프랑스, 스위스, 영국에서도 같은 성격의 기구가 설립되었고, 아시아에서도 인도를 선두로 일본,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등에서 운영되고 있다. 우리나라는 신문사를 비롯한 인쇄매체 발행사와 광고주인 기업, 광고회사, 조사회사 등이 참여하여 1989년에 설립되었다. 우리나라 ABC협회는 Audit Bureau of Certification의 약자다.

 

이 제도는 신문, 잡지와 같은 인쇄매체의 실제 발행부수와 구독자수를 각 매체사의 자체 주장이 아닌 독립적 기관에서 객관적으로 공증한다는데 그 의미가 있다. 발행부수와 구독자수는 각 매체의 위상을 증명하는 증거가 되기도 하지만, 이러한 제도가 도입된 가장 근본적 이유는 각 기업이 지출하는 광고비의 과학적, 합리적 집행이라는 목적에서였다. 막대한 광고비를 지출하는 기업들로서는 얼마의 광고예산이 적정한지, 자신이 지출하는 광고비가 과연 효율적으로 집행되는지, 또 광고가 기업 활동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에 대해 의문을 갖지 않을 수가 없다. 그래서 기업들은 자신들의 광고를 대행하는 광고회사들에게 끊임없이 그 답을 요구해왔다. 이러한 광고주의 질문에 그나마 객관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방법은 숫자였다. 그리고 그 시작이자 가장 기본적인 데이터가 바로 각 매체의 실제 구독자수이다. 그러나 각 신문사에서 발표하는 발행부수와 실제 구독자수가 일치하는 경우는 없다. 모두가 구독자수보다 더 많은 부수를 발행하기 때문이다. 추가발행 부수의 양도 각각이고 의도적으로 부풀려서 발표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각 매체사가 발행부수를 늘려 발표하는 것은 구독자수를 호도하려는 목적에서다. 그렇게 함으로써 더 많은 광고를 유치하고 더 높은 광고비를 받을 수 있다는 계산에서다. ABC는 바로 이런 관행을 바로잡기 위한 제도이다. 당연히 공정함이 그 생명이다.

 

그런데 한국ABC협회는 그 기능을 다하지 못한 것이다. 실제로 한국ABC협회가 설립된 이후 단 한 때라도 그 기능을 온전히 발휘한 일이 있었는지도 의문이다. 모든 협회의 주요 경비는 회원사들의 회비로 운영되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그런데 한국ABC협회의 창립회원 78개 회사 가운데 신문, 잡지 발행사가 34개사로 그 비중이 가장 높았다. 그런 협회가 신문사들의 주장과 요구에 반하여 공정한 실사를 한다는 것은 어쩌면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특히나 그동안 조선일보가 지녔던 막강한 힘과 영향력을 감안할 때 협회가 그런 신문사의 이익에 반하는 행위를 한다는 것은 그 즉시로 자멸의 길로 가는 것이라는 것쯤은 협회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밖으로는 공정기관 행세를 하면서도 안에서는 알아서 긴 것이다.

 

[미디어오늘 사진]

 

지금도 이사회 구성을 보면 전체 23명의 이사 중 중앙지 6, 지방지 2, 경제지 1로 일간지가 9석을 차지하고 잡지와 전문지가 각각 1자리씩으로 발행인 측 이사가 총 11석이다. 그리고 광고주를 대표하는 기업이 6, 광고회사가 5석으로 11석을 차지하는데, 여기에 협회의 임원이 1석을 차지하여 양측의 의견이 갈릴 때 캐스팅보터(casting voter) 같은 역할을 하도록 구성되어 있다. 쪽수는 그럴싸하게 양쪽을 맞춰 놓았지만 언론 발행사 측에 맞대응하여 반발할 기업이나 광고회사는 없다. 크게 문제만 되지 않으면 발행인들에 유리한 방향으로 운영되었을 것은 불문가지다. 협회가 문체부의 권고를 받고도 개선 방안을 내놓지 못한 이유이기도 하다.

 

협회의 신문발행사 비호가 드러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02년도에도 조선일보의 유료부수를 놓고 한번 논란이 있었다. 조선일보가 자신들의 유료부수를 191만 몇 부라고 신고하여 협회에서 조선일보 지국을 샘플링 하여 조사한 결과 실제 부수는 신고 부수의 88.7% 수준으로 나타났다. 그러자 협회 간부들이 자진해서 “조선일보 신고부수의 90% 수준에 맞춰야 한다.” 며 그 숫자를 조작한 일도 있었다.

 

이때의 88.7%라는 수치를 보고 나름 성실 신고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조선일보가 조작할 수 있었던 최대 수치에 가깝다. 이번에도 드러난 것처럼 협회는 자신들이 조사할 지국을 신문사가 넘겨주는 자료에 따라 찾아다녔고, 그 사이에 지국들은 조사에 대비하여 이전 구독자를 현재 구독자인 것처럼 명단 조작을 하고, 그도 모자라면 남의 지국 구독자까지 끌어다 명단에 넣었는데 그런 일이 올해 처음일 리가 만무하기 때문이다.

 

신문사들의 부수 조작과 관련하여 펼쳐보지도 않은 신문들이 바로 동남아와 아프리카에 포장지로 팔려간다는 것이 큰 이슈가 되었다. 종이를 수입해서 쓰는 우리로서는 생각도 할 수 없는 자원낭비다. 조금 더 넓게 생각하면 환경파괴행위이기도 하다. 도덕적으로 지탄 받을 일이고 또 지탄받아 마땅하지만 그것으로 끝날 일이 아니다. 신문사들의 부수 조작은 사기 행위다.

 

연비가 리터당 20km라고 광고해서 차를 구매했는데, 실제로는 10km밖에 못 간다면 이것은 사기인가 아닌가? 용기에 2리터라고 표시된 음료수를 샀는데 실제로는 1.5리터였다면?

일례로 어느 신문사가 자기네 구독자가 100만이라고 해서 1억을 주고 광고를 게재했다. 이 경우 광고의 효율성을 따지는 가장 기본적인 수치인 1인당 도달비용(cost/reach)은 100원이다. 그런데 알고 봤더니 실제 구독자수가 50만에 불과했다면 광고주는 실제로 2배의 비용을 지불한 셈이 되는 것이다. 연비 속이는 자동차와 용량 속이는 음료수와 무엇이 다른가!

그러나 씁쓸한 것은 이런 사실을 그동안 기업이나 광고회사가 모르고 있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입을 다물어 왔던 것은 신문사들의 힘이 그만큼 막강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다양한 매체가 출현하면서 인쇄매체는 쇄락의 길을 걸어왔다. 앞으로도 그런 추세는 계속되고 더 가속화될 수도 있다. 인쇄매체가 몰락하여 대중이 외면하는 매체가 되면 어차피 ABC의 존립가치는 없다. 미국의 ABC는 2012년에 기구의 이름을 Alliance for Audited Media로 변경했다. 매체 환경의 변화로 인쇄매체의 부수 공사(公査)만으로는 그 역할의 한계를 느꼈기 때문이다.

 

공정하지도 못하고 존재가치조차 회의적인 그런 협회에 정부는 매년 100억 원에 이르는 공적자금을 지원해왔다. 뿐만 아니라 대다수의 국민이 보지도 않는 포장지에, 그것도 국론을 분열시키는 일에 열심인 불쏘시개 같은 휴지 쪼가리에 정부는 한 해 2천5백억에 가까운 광고비를 집행해왔다. 관행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아직도 공무원들이 신문사를 겁내고 있는 이유도 있다.

 

늦었지만 작게라도 시작한 것은 용기 있고 의미 있는 일이다. 물론 적폐언론들은 다시 또 어떤 형태로든 반격을 가해올 것이다. 그들은 아직도 '밤의 황제' 자리를 되찾으려는 꿈을 버리지 않았다. 다만 자신들이 지금 죽은 자식 놓고 살아나길 바라며 불알을 만지고 있는 줄을 모르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고 해도 대세는 변하지 않는다. 

“요즘 누가 신문을 보냐?”는 말을 저들만 못 들은 척하고 있는 것이다.

'백가쟁명' 카테고리의 다른 글

완장의 올바른 사용법  (0) 2021.08.29
조중동은 왜 이 정권을 그렇게 까댈까?  (0) 2021.07.15
한번 뿐인 삶.  (0) 2021.06.28
피아니스트 임현정과 운명  (0) 2021.05.01
우리가 행복하지 않은 이유  (0) 2021.04.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