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율기(律己) 제1조 칙궁(飭躬) 7
술을 금하고 여색을 멀리하며 가무(歌舞)를 물리치며 공손하고 단엄하기를 큰 제사 받들 듯하며, 향락에 빠져 정사를 어지럽히고 시간을 헛되이 보내는 일이 없어야 한다.
(斷酒絶色 屛去聲樂 齊遬端嚴 如承大祭 罔敢游豫 以荒以逸)
▶율기(律己) : 『목민심서(牧民心書)』 제2편인 율기(律己)는 자신을 가다듬는 일을 말한다. 수신(修身)ㆍ제가(齊家)ㆍ치국(治國)ㆍ평천하(平天下)가 일체 자기의 행동을 바르게 하는 수신(修身)을 근본으로 삼는 만큼, 수령 자신의 몸가짐을 가다듬는 일부터 은혜 베푸는 일까지 6조로 나누어 논하고 있다. ▶칙궁(飭躬) : 자신의 몸가짐을 가다듬는 일. |
정선(鄭瑄)은 이렇게 말하였다.
“총명에는 한도가 있고 일의 기틀은 한이 없는데, 한 사람의 정신을 다하여 뭇사람의 농간을 막아내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술에 녹아떨어지고 여색에 빠지며, 시 짓고 바둑 두어서 마침내 옥송(獄訟)은 해를 넘기며 시비(是非)는 뒤바뀌어 소송거리는 더욱 많아지고 일의 기틀도 더욱 번잡해질 것이니 어찌 한탄스럽지 않은가. 닭이 울면 일어나 정사를 처리하고 집안일은 아예 물리쳐 버리며, 주색 때문에 스스로 피곤하거나 행락(行樂)으로 몸을 해치는 일이 없도록 하라. 어느 일은 처결해야 하고 어느 공문은 보고해야 하며 어느 부세(賦稅)는 가려내야 하고 어느 죄수는 풀어 주어야 하는지 등을 때때로 살펴서 급급히 처리해야 할 것이요, 내일을 기다리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면 어떤 일이고 처리되지 않는 일이 없고 자기 마음도 편안해질 것이다.”
▶정선(鄭瑄) : 중국 명(明)나라 때 사람으로, 옛사람의 격언(格言)과 의행(懿行)을 기록한 《작비암일찬(昨非菴日纂)》을 지었다. 정약용(丁若鏞)은 《목민심서》에서 이 《작비암일찬》을 ‘鄭瑄曰’ 또는 ‘鄭漢奉曰’ 등 그의 이름이나 자를 밝혀서 인용하기도 하고, 때로는 《작비암일찬》에서 인용한 사람의 고사를 그대로 또는 중략(中略)하거나 하략(下略)하여 인용하기도 하였다. |
부승우(傅僧祐)와 그의 아들 부염(傅琰), 염의 아들 부홰(傅翽)는 다 수령이 되어 모두 특이한 치적(治績)을 나타냈었다. 그때 사람들이, “부씨(傅氏) 집안에는 《치현보(治縣譜)》가 전해오는데 그것은 남에게는 보이지 않는다.” 하였다.
유현명(劉玄明)은 치민(治民)하는 재주가 있었는데, 건강(建康)ㆍ산음(山陰)의 수령을 역임하면서 치적이 천하제일이었다. 부홰가 그의 후임으로 산음령(山陰令)이 되어 유현명에게 묻기를,
“원컨대 구정(舊政)을 신관(新官)에게 알려 주시오.” 하니,
유현명이 대답하기를, “내게는 기묘한 방법이 있는데 그대의 가보(家譜)에는 없을 것이오. 오직 날마다 한 되 밥만 먹고 술은 마시지 말 것, 이것이 제일 상책이오.” 하였다.
▶부승우(傅僧祐), 부염(傅琰) : 중국 남조(南朝) 송(宋)나라 때의 관리 ▶부홰(傅翽), 유현명(劉玄明) : 중국 남조(南朝) 남제(南齊) 때의 관리 ▶《치현보(治縣譜)》: 군현을 다스리는 방법을 기록한 책자. 여기서는 군현을 다스리는 비법을 의미. |
매지(梅摯)가 소주 지주(韶州知州)로 있을 때 장설(瘴說)을 지었는데 다음과 같다.
“벼슬살이에 다섯 가지 고질적인 병통이 있다. 급히 재촉하고 함부로 거두어들이며 아랫사람에게서 긁어다가 윗사람에게 바치는 것은 조부(租賦)의 병통이요, 엄한 법조문을 함부로 사용하여 선악을 분명하게 못하는 것은 형옥(刑獄)의 병통이요, 밤낮으로 주연을 베풀고 국사를 등한히 하는 것은 음식의 병통이요, 백성의 이익을 침해하여 자기의 주머니를 채우는 것은 재물의 병통이요, 계집을 많이 골라 음악과 여색을 즐기는 것은 유박(帷薄)의 병통이다. 이 중에 하나만 있어도 백성은 원망하고 신(神)은 노하여, 편안하던 자는 반드시 병이 들고 병이 든 자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벼슬살이하는 자가 이것을 모르고 풍토의 병을 탓하니 또한 잘못된 것이 아닌가.”
▶장설(瘴說) : 풍토병에 대한 설이라는 뜻인데, 여기서는 벼슬살이의 고질병을 의미한다. ▶유박(帷薄) : 집안에 가린 장막과 발이란 뜻으로 깊숙한 여자의 거소를 말한다. |
《상산록(象山錄)》에,
“술을 즐기는 것은 모두 객기(客氣)이다. 세상 사람들은 이를 잘못 인식하여 청취(淸趣)인 양하지만, 다시 객기를 낳아서 그것이 오랜 습성이 되면 폭음하는 주광(酒狂)이 되어 끊으려 해도 끊지 못하게 되니, 진실로 슬픈 일이다. 마시면 주정하는 자, 마시면 말이 많은 자, 마시면 자는 자도 있다. 주정하지 않는 자는 스스로 폐단이 없다고 생각하나, 잔소리나 군소리는 이속들이 괴롭게 여기고, 술에 곯아떨어져 깊이 잠들어 오래 누워 있으면 백성들이 원망할 것이다. 어찌 미친 듯 소리 지르고 마구 떠들어대며 부당한 형벌과 지나친 곤장질을 해야만 정사에 해를 끼친다고 하겠는가. 수령이 된 자는 술을 끊지 않아서는 안 된다.” 하였다.
《다산필담(茶山筆談)》에,
“매년 12월ㆍ6월 두 철에 시행되는 팔도(八道) 포폄(褒貶)의 조목을 보면 ‘과도한 징수[斛濫]는 비록 공평해졌으나 주도(酒道)는 경계해야 한다.[斛濫雖平 觴政宜戒]’ 하였고, ‘다스림을 원하지 않음이 아니나 술을 좋아함을 어찌하랴.[非不願治 奈此引滿]’ 하였다. 이러한 것들이 잇달아 있는데도 다시 술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니 또한 무슨 심정인가?” 하였다.
▶다산필담(茶山筆談) : 정약용(丁若鏞)이 지은 책으로 추정하나,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에는 없다. ▶포폄(褒貶) : 관원의 근무 성적을 고사하여, 우수한 자는 승진시키고 불량한 자는 강등 또는 면직하는 것. 조선시대에는, 경관(京官)은 그 관사(官司)의 당상관(堂上官)ㆍ제조(提調) 및 소속 조(曹)의 당상관이, 외관(外官)은 관찰사(觀察使)가 매년 6월과 12월에 성적을 고사하여 등급을 정해서 중앙에 보고하였다. 중앙에서는 이 자료를 바탕으로 등용이나 추출・이동의 자료로 삼았으며, 이를 도목정(都目政)이라 하였다. |
옛날에 한 현령이 술에 빠져 일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였는데, 감사(監司)가 그의 치적(治績)을 고사하여 쓰기를,
“술이 깬 날도 취해 있다.[醒日亦醉]” 하여, 온 세상이 웃음거리로 삼았다.
창기(娼妓)들의 음란한 풍습은 삼고선왕(三古先王)의 습속이 아니다. 후세에 오랑캐의 풍속이 점차 중국으로 젖어
들어와서 드디어 우리나라에까지 미친 것이다.
수령이 된 자는 결코 창기를 가까이해서는 안 된다. 한번 가까이하게 되면 그 정령(政令) 하나하나가 의심과 비방을 살 것이며, 비록 공정한 일일지라도 모두 계집의 말에 떨어진 것으로 의심을 받을 것이니 또한 민망하지 아니한가. 매양 보면 소박하고 순진하여 바깥출입이 없던 선비가 처음 기생을 가까이하면 홀딱 빠지고 말아 잠자리에서 소곤소곤 이야기한 것을 철석같이 믿으니, 기생이란 사람마다 정을 주어 사람의 본성이 이미 없어지고 따로 정부(情夫)가 있어서 밖으로 누설되지 않는 말이 없다는 것을 모른다. 밤중에 소곤거린 말이 아침이면 이미 성안에 온통 퍼지고 저녁에는 사경(四境)에 쫙 퍼지는 것이다. 평생에 단정하던 선비가 하루아침에 어리석은 사람이 되니 어찌 애석한 일이 아니겠는가. 무릇 기생이란 요염한 것이니 눈짓을 주고받아서는 안 된다. 초하루와 보름의 점고(點考) 때를 제외하고서는 일체 문 안에 들어오게 해서는 안 된다.
▶삼고 선왕(三古先王) : 중국 고대의 성군(聖君)인 하(夏)의 우왕(禹王), 은(殷)의 탕왕(湯王), 주(周)의 문왕(文王)과 무왕(武王). ▶점고(點考) : 명부(名簿)에 하나하나 점을 찍어가며 대조 확인하는 일. 기생의 점고는 관노비(官奴婢)의 현황파악 차원에서 실시되었다. |
자제나 친척 손님들이 기생을 가까이하는 것은 더욱 엄하게 막아야 할 것이니, 만일 금계(禁戒)가 본래 엄하면 설혹
범하는 자가 있더라도 깊이 빠져들어 가지는 않을 것이다. 이미 발각이 되면 여러 사람 앞에서 꾸짖지 말고 다만 밀실로 불러놓고 그가 금법(禁法)을 범한 것을 책망한 후, 그 이튿날 말을 주고 여장을 준비시켜 곧 돌아가도록 함으로써 자신의
정사를 어지럽히지 않도록 하고 자신의 법을 무너뜨리지 않게 하는 것이 다시 없이 좋은 방편이다.
조 청헌공(趙淸獻公)이 촉(蜀)을 다스릴 때, 한 기녀가 살구꽃을 머리에 꽂았으므로
공이 우연히 희롱하기를, “머리 위의 살구꽃이 참으로 행(幸)이구나[髻上杏花眞有幸]” 하니,
기녀가 즉시 응하기를, “가지 끝의 매실(梅實)은 중매가 없을쏜가.[枝頭梅子豈無媒]”하였다.
저녁이 가까워지자, 공이 노병(老兵)을 시켜 그 기녀를 불러오게 하였는데 2고(鼓)가 되도록 오지 않으므로 사람을 시켜 재촉하고는 공이 방안을 거닐고 있다가 문득 소리 높여 부르기를, “조변(趙抃)아, 무례해서는 안 된다.” 하고, 곧 불러오지 말도록 명령하였다. 그때 노병이 장막 뒤에서 나오면서, “저는 상공(相公)께서 몇 시각이 못 되어 그런 마음이 식으리라 짐작하고 실상 부르러 가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였다.
조청헌(趙淸獻)이 매양 색욕을 끊을 때면 침상(寢床) 위에 부모의 화상을 걸어 두고 스스로를 감계(監戒)하였다.
▶조 청헌공(趙淸獻公) : 송(宋)나라 인종(仁宗)ㆍ신종(神宗) 때의 조변(趙抃)을 가리키며, 청헌(淸獻)은 그의 시호이다. ▶“가지 ... 없을쏜가.” : 짝이 될 남자를 기다린다는 의미. 《시경》 <국풍 표유매(摽有梅)>에서 취한 말인데, 이 시는 여자가 짝을 구하는 급한 심경을 매화나무 가지에 매실이 떨어져가는 것에 비유해서 표현한 내용이다. ▶2고(鼓) : 밤을 5등분하여 각기 북을 쳐서 시각을 알리는데, 2고는 두 번째 북을 치는 때로 2경(更). 밤 9시 ~ 11시. |
유봉서(柳鳳瑞)가 북평사(北評事)가 되어서 한 요사스러운 기생을 만나 헤어나지 못하여, 그 아버지인 정승 유상운(柳尙運)의 화상을 걸어 놓고 밤낮으로 쳐다보며 울었으나 - 유 정승이 그가 여색에 빠져서 혹할 줄 미리 알고서 임지(任地)로 떠나던 날 화상을 주었다. - 끝내 금하지 못하고 마침내 임지에서 죽었으니, 아 슬픈 일이다.
▶유봉서(柳鳳瑞) : 조선 문신(1654 ~ 1699).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 등을 지냈는데, 교리 때 김춘택(金春澤)을 논핵하였다가 외직으로 쫓겨났다. ▶북평사(北評事) : 조선조 때 북병영(北兵營)에 속하여 병사(兵使)를 보좌하던 정6품의 문관. 함경도를 남도(南道)와 북도(北道)로 갈라, 남도에는 남병영(南兵營), 북도에는 북병영을 두었으며, 각각 종2품의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가 영(駐營)에 주재하였다. 조선 전기에는 평안도와 함경도에 두었으나 후기에는 함경북도의 북평사만 남았다. ▶유상운(柳尙運) : 조선 문신(1636 ~ 1707). 시호는 충간(忠簡)이고, 벼슬은 영의정에 이르렀다. |
장괴애(張乖崖)가 촉(蜀) 지방을 맡아 다스릴 때 빨래와 바느질하는 두 계집이 있었는데, 그중 한 계집을 좋아하였다. 밤중에 정욕이 동하자 일어나 방 안을 이리저리 서성이면서, “장영은 소인이다, 소인이다.” 하고는, 드디어 그만두었다.
▶장괴애(張乖崖) : 중국 송(宋)나라 때의 장영(張詠)이란 인물로 청렴 강직하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괴애(乖崖)는 그의 호이다. 여기서 말한 ‘촉(蜀)’은 익주(益州)를 가리킨다. |
정선(鄭瑄)이,
“정욕이 일어났을 때 그것을 채우고 나면 반드시 후회하고 참고 넘기면 반드시 즐겁다. 분노도 마찬가지이다.” 하였다.
장괴애(張乖崖)가 촉(蜀) 지방을 진무(鎭撫)할 때에 유연(遊宴)이 베풀어지면 사녀(士女)가 좌우를 에워쌌지만 3년 동안 그들을 돌아다본 일이라곤 없었다.
《상산록》에,
“수령이 성부(城府)를 출입할 때나 여염집들을 지날 때에 담장 머리, 거리 위에 여자들이 있는 것을 알더라도 눈길을 흘려보내서는 안 된다.” 하였다.
장영(張詠)이 익주지주(益州知州)로 있을 적에 요속(僚屬)들이 그의 준엄한 성품을 두려워하여 감히 비첩(婢妾)을 거느리지 못하였다. 공은 사람들의 인정(人情)을 끊게 하고 싶지 않아서 드디어 여종 하나를 사서 시중을 들게 하였다. 이로부터 요속들이 점차 시중하는 계집을 두게 되었다. 촉 지방에 있은 지 4년 만에 부름을 받아 조정으로 돌아가면서 그 여종의 부모를 불러 재물을 주면서 시집을 보내게 하였는데, 그 여종은 그대로 처녀였다.
정언빈(程彥賓)이 나성(羅城)에 사자(使者)로 나갔을 때 좌우가 세 처녀를 바쳤는데 모두 예뻤다. 공이 그 처녀들에게, “너희는 내 딸과 같다. 어찌 서로 범할 수 있겠느냐?” 하고 손수 문을 잠그고 한 방에 두었다가 이튿날 아침에 부모들을 찾아서 돌려보내니 모두 울면서 감사하였다.
한지(韓祉)가 감사(監司)로 있을 때에 시기(侍妓) 수십 명을 항상 한 방에 두고 끝내 범하는 일이 없으니 여러 속관(屬官)들도 감히 여자와 가까이하는 자가 없었다. 하루는 조용히 속관들에게 묻기를, “오랜 나그네 생활을 하는 동안에 더러 여색을 가까이해 본 일이 있는가?” 하니, 모두 사실대로 대답하였다.
한지가 웃으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어찌 내 자신이 금하고 있다 하여 다른 사람까지 막을 수 있겠는가? 다만 난잡하게 하지 않을 따름이다. 그러나 색정을 참기 어려움이 이러하단 말인가. 내가 일찍이 호서 아사(湖西亞使)로 있을 적에 토지를 점검(點檢)하는 일[檢田都會]로
청주(淸州)에 보름 동안 머물러 있었는데, 재색(才色)이 뛰어난 강매(絳梅)란 기생이 늘 곁에 있었다. 사흘째 되던 날 밤 잠결에 무심코 발을 뻗으니 문득 사람의 살결이 닿았다. 물어보니 강매였다. 그녀가 말하기를 ‘주관[主官, 청주원을 가리킴]이 잠자리를 모시지 못하면 장차 죄를 주겠다고 명하시기에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몰래 들어왔습니다.’ 하였다. 나는 ‘그것이야 쉬운 일이다.’ 하고 곧 이불 속으로 들어오게 하였다. 그 후 13일 동안 동침하였으나 끝내 어지러운 짓은 하지 않았다. 일이 끝나서 돌아올 적에 강매가 울기에 내가 ‘아직도 정이 남아 있느냐?’ 하니, 강매가 대답하기를 ‘무슨 정이 있겠습니까. 다만 무료했기 때문에 울 뿐입니다.’ 하였다.
주관이 희롱하기를, ‘강매는 좋지 못한 이름을 만년에 남기고 사군(使君)은 좋은 이름을 백대에 끼쳤구나.’ 하였다.”
▶호서 아사(湖西亞使) : 충청도 도사(忠淸道都事). 각 도의 도사는 감사의 다음가는 벼슬로 왕명을 봉행(奉行)하는 관원이므로 아사(亞使)라 하였다. 주로 관내 수령의 불법을 규찰(糾察)하고 향시(鄕試)를 관장했던 종5품직. ▶토지를 점검하는 일[檢田都會] : 조선 후기 각 군현의 토지를 도사(都事)의 입회하에 점검하던 일. 행전도회(行田都會)라고도 한다. ▶사군(使君) : 왕명을 받들어 지방으로 나가는 관원에 대한 존칭. 여기서는 청주(淸州)에 나온 도사(都事) 한지(韓祉)를 가리킨다. |
조운흘(趙云仡) - 호는 석간(石澗). - 이 강릉부사(江陵府使)로 있으면서 빈객들과 접촉하기를 좋아하지 않고 백성을 번거롭게 괴롭히지 않아 지금까지도 청백하다고 일컫는다. 하루는 부(府)의 기생들이 자리에 앉아서 서로 희롱하며 웃으므로 공이 그 까닭을 물으니, 한 기생이 대답하기를, “소첩이 꿈에 주관(主官)을 모시고 잤는데, 이제 친구들과 함께 해몽(解夢)을 해 보았을 따름입니다.” 하였다. 공이 붓을 찾아 들고 다음과 같이 글을 지었다.
마음이 영서(靈犀)같아 뜻이 통했는데 / 心似靈犀意已通
비단이불 함께하기 쉽지 않구나 / 不須容易錦衾同
태수(太守)의 풍정(風情)이 박하다 이르지 말라 / 莫言太守風情薄
예쁜 여인의 길몽(吉夢) 속에 먼저 들었거니 / 先入佳兒吉夢中
▶조운흘(趙云仡) : 고려와 조선의 문신(1332 ~ 1404). 고려 때 서해도 관찰사 (西海道觀察使)를 지냈고, 조선조 때 강릉부사(江陵府使), 교정당문학(檢校政堂文學)을 지냈다. ▶영서(靈犀) : 신령스러운 물소. 뿔의 가운데에 구멍이 나 있어서 양쪽이 통하게 되어 있다. 따라서 두 사람의 의사가 모르는 사이에 소통하여 투합(投合)한다는 비유로 쓰인다. ▶태수(太守) : 지방관의 별칭. 여기서는 조운흘을 가리킨다. |
박신(朴信)이 젊어서부터 명성이 있었는데 강원도 안렴사(按廉使)가 되었을 때 강릉 기생 홍장(紅粧)을 사랑하여 정이
자못 두터웠다. 임기가 차서 돌아가게 되자 부윤(府尹) 조운흘이 거짓으로, “홍장은 이미 죽었습니다.” 하니 박신은
슬퍼하여 어쩔 줄 몰랐다.
강릉부에 경포대(鏡浦臺)가 있는데 부윤이 안렴사를 청하여 나가 놀면서 몰래 홍장에게 곱게 단장하고 고운 의복 차림을 하도록 하며, 따로 놀잇배 한 척을 마련하고 또 눈썹과 수염이 허연 늙은 관인 한 사람을 골라 의관을 크고 훌륭하게
차리도록 한 다음 홍장과 함께 배에 태우게 하였다. 또 배에는 채색 액자를 걸고 그 위에 시를 지어 쓰기를,
신라 성대(聖代)의 늙은 안상(安詳)이 / 新羅聖代老安詳
천년 풍류를 아직도 못 잊어 / 千載風流尙未忘
사자(使者)가 경포대에 노닌다는 말 듣고 / 聞說使華游鏡浦
난주(蘭舟)에 다시 홍장 싣고 왔네 / 蘭舟聊復載紅粧
하였다.
천천히 노를 두드리며 포구(浦口)로 들어와서 바닷가를 배회하는데 풍악 소리가 맑고 그윽하여 마치 공중에 떠있는
듯하였다. 부윤이, “이곳에 신선이 있어 왕래하는데 바라다만 볼 뿐 가까이 가서는 안 됩니다.” 하니, 박신은 눈물이 눈에 가득하였다. 갑자기 배가 순풍을 타고 눈 깜빡하는 사이에 바로 앞에 다다르니, 박신이 놀라, “신선이 분명하구나.” 하고 자세히 보니, 바로 기생 홍장이었다. 한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손뼉을 치면서 크게 웃었다.
▶박신(朴信) : 고려와 조선 때의 문신(1362 ~ 1444). 고려 우왕(禑王) 때 예조ㆍ형조의 정랑을 역임하고, 조선조에서 여러 벼슬을 거쳐 이조 판서에 이르렀다. ▶안렴사(按廉使) : 고려 때의 지방 장관. 안찰사(按察使)를 고친 이름. 조선조 초기 태조 2년에 도관찰 출척사(都觀察 黜陟使)로 고쳤다. ▶난주(蘭舟) : 목란(木蘭)으로 만든 아름다운 배. |
생각하건대, 박 안렴사는 본디 색에 빠진 사람이지만, 조공(趙公)이 꾸며서 상관을 놀려준 것도 잘못이다.
내가 서읍(西邑)에 있을 때 이런 일을 겪었는데, 기생을 아프다 핑계하고 모시고 놀지 못하게 하였다가 놀이가 끝나서야 바른대로 말했더니 안찰사(按察使)도 사례할 뿐 노엽게 여기지 않았다.
▶서읍(西邑) : 서도(西道) 즉 황해도의 고을이란 뜻으로, 정약용(丁若鏞)이 1797년부터 1799년까지 3년 동안 곡산부사(谷山府使)를 지냈었다. |
정한강(鄭寒岡)이 안동 부사(安東府使)가 되었는데 관사에 전부터 ‘기녀(妓女)’라 불리는 꽃나무가 있었다.
공이 그 꽃나무를 베어버리게 하였다. 회곡(晦谷) 권춘란(權春蘭)이 그 까닭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사람이 빠지기 쉽기가 여색보다 더한 것이 없으므로 그 이름을 미워해서 베어버렸을 뿐이다.” 하였다.
▶정한강(鄭寒岡) : 조선의 문신이자 학자인 정구(鄭逑, 1543~1620)로, 한강(寒岡)은 호이다.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와 공조참판을 지냈으며, 예학(禮學)에 밝으면서 명문장으로 이름이 있었다. ▶권춘란(權春蘭) : 청송부사(靑松府使)를 지낸 조선의 문신(1539 ~ 1617) |
성악(聲樂)은 백성의 원망을 자아내는 풀무이다.
내 마음은 즐겁지만 좌우의 마음이 반드시 다 즐거울 수는 없고, 좌우의 마음이 다 즐겁더라도 한 성(城)안 남녀의 마음이 반드시 다 즐거울 수는 없으며, 한 성안 남녀의 마음이 반드시 다 즐겁더라도 사경(四境)안 만민의 마음이 반드시 다 즐거울 수는 없다. 그 중에는 혹 가난하여 춥고 배고프거나, 형옥(刑獄)에 걸려 울부짖고 넘어져서 하늘을 보아도 빛이
없고 참담하여 세상을 살아가는 즐거움이 없는 자가 있어서 한번 풍악을 울리는 소리를 들으면 이마를 찌푸리며 눈을
부릅뜨고 길에서 욕하며 하늘에 저주할 것이다. 배고픈 자가 들으면 그의 주림을 더욱 한탄할 것이요, 옥에 갇혀 있는
자가 들으면 그의 갇혀 있음을 더욱 슬퍼할 것이니 《맹자(孟子)》의 금왕고악장(今王鼓樂章)을 깊이 음미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시경》 〈소아(小雅) 백화(白華)〉에,
“궁중에서 종을 두들기면 소리가 궐문 밖까지 들려온다.” 하였고,
《주역(周易)》 〈예괘(豫卦) 초육(初六)〉에는,
“즐거움을 입 밖에 내면 흉하다.” 하였다.
▶금왕고악장(今王鼓樂章) : 《맹자(孟子)》 〈양혜왕 하(梁惠王下)〉에, 임금이 백성과 함께 즐기면 백성이 임금의 풍악을 듣고 좋아하고, 임금이 백성과 함께 즐기지 않으면 백성이 오히려 싫어하여, 부자(父子)가 서로 쳐다보지도 않으며, 형제와 처자(妻子)가 이산(離散)한다는 내용이다. |
매양 보면, 수령으로서 부모를 모신 사람이 부모의 생일에 풍악을 베푸는데, 자신은 효도라 생각하지만 백성들은 이를
저주한다. 백성들로 하여금 부모를 저주하게 한다면 이는 불효가 아니겠는가. 만약 부모의 생일에 양로(養老)의 잔치도 겸하여 행한다면 백성들이 저주하지는 않을 것이다.
백일장(白日場)을 베풀고 선비를 시험보이는 날에도, 바야흐로 음식상을 올릴 때에 잠깐 풍악을 베풀 것이요 자리가 끝날 때까지 계속할 필요는 없다.
▶백일장(白日場) : 유생(儒生)의 학업을 장려하기 위하여 각 지방에서 베풀던 시문(詩文)을 짓는 시험. |
당(唐)나라 설평(薛平)은 3진(鎭)의 절도사(節度使)를 역임하였는데도 집에서 풍악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헌종(憲宗)이 그의 치행(治行)을 보고 어사대부(御史大夫)로 발탁하였다.
▶설평(薛平) : 당(唐)나라 때의 무신(武臣). 나이 12세에 자주 자사(磁州刺史)를 지냈다. |
유관현(柳觀鉉)은 성품이 검약(儉約)하였다. 그는 벼슬살이할 때 성대한 음식상을 받고는, “시골의 미꾸라지찜만 못하다.” 하였고, 기생의 노래를 듣고는, “논두렁의 농부 노래만도 못하다.” 하였다.
▶유관현(柳觀鉉) : 조선 문신(1692 ~ 1764). 경성 판관(鏡城判官), 사간(司諫), 장령(掌令), 세자시강원 보덕(世子侍講院輔德)을 거쳐 형조 참의(刑曹參議)를 지냈다. |
번역문 출처 : 한국고전번역원(이정섭 역, 1986), 다산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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