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사 안 짓고 시골살기

친구네 과수원

從心所欲 2021. 7. 20. 10:30

작년에는 사과나무에 꽃이 많이 피고 열매도 많이 달려 풍년을 예상했는데 장마철 오랜 비로 사과가 제대로 익질 못했다. 수확한 사과도 제 맛이 나지 않았다. 농사를 망친 해다. 금년에는 시작부터 꽃이 적게 열리더니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꽃이 피는 시기에 냉해까지 입어 그야말로 사과가 듬성듬성 달렸다.

농촌생활 10여년에 이미 농부가 돼버린 친구는 그것만이라도 잘 자라기를 바라며 푹푹 찌는 날씨에도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다. 농촌에 워낙 일손이 모자라다보니 또 불려갔다.

 

 

 

시나노스위트라는 품종의 사과다. 아오리와 같은 계통의 품종이라 하는데, 8월 하순부터 수확하는 아오리는 조생종이고 이 품종은 조금 늦게 9월 초에 수확하는 중생종이다.

관심이 별로 없어서 3년을 과수원에 드나들면서도 이제야 겨우 머릿속에 정리된 내용이다.

지금 하는 일은 도장지를 쳐내는 것이다. 도장지란 열매가 달리지 않은 웃자란 나뭇가지다. 과일에 햇볕 가리는 것을 막고 나무에 바람 통할 길을 만들어주는 일이다.

 

아침부터 내리쬐는 뜨거운 햇볕에다 전날 내린 비를 머금은 땅에서 올라오는 습기로 과수원은 한증막이나 다름없다. 일 시작한지 30분도 안 되어 옷이 땀으로 흠뻑 젖는다. 어쩌다 한 번씩 스쳐가는 바람에 “어~! 좋다!” 소리가 절로 나온다. 그 잠깐의 상쾌함은 성능 좋은 최신형 에어컨에서도 절대 경험할 수 없는 천상의 것이다.

친구네 과수원에서 일을 할 때는 장화를 신는다. 아침에는 이슬 맺힌 풀 사이를 오가야 하기 때문이고 혹시 모를 뱀 때문이기도 하다. 덥기도 하지만 발도 무겁고 아프다. 7단이나 8단 높이의 사다리를 옮기며 작업을 하다보면 일주일 전에 예초를 했다는 데도 그새 자란 사과 밭의 긴 풀들이 사다리를 감고 놓아주질 않는다. 몸에서도 긴요하지 않아 보이는 손톱과 수염이 유난히 잘 자라듯 사과밭의 풀들은 깎아놓고 돌아서기가 무섭게 자란다. 사과밭 예초를 1년에 적어도 네댓 번은 해야 하고 그 비용만도 몇 백만원이 든다.

 

 

 

친구가 농사 규모를 늘리기 전에는 이런 간이 텐트 하나 치고 같이 자면서 지난 세월들의 이야기를 나누던 밤들도 있었다. 계곡을 타고 부는 바람을 즐겼고 밤하늘의 별도 보았다. 이제는 머나먼 옛이야기다.

 

해질녘 일을 마치고 짜면 물이 나오는 젖은 옷에 싸여 과수원에서 돌아올 때면 역시 농사 안 짓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집에 돌아가서 샤워하고 시원한 맥주 한잔 들이킬 생각을 하면 고달팠던 하루가 오히려 뿌듯하기도 하다.

그저 이만큼이면 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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