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사 안 짓고 시골살기

혼술

從心所欲 2021. 8. 15. 15:03

집에서 혼자 술 마신다는 사람 평생 이해 못하고 살다가 시골에 내려오고 난 후에는 혼술이 일상이 되어버렸다. 시골에서 밖에 나가 술을 마신다는 것은 생각보다 꽤 성가신 일이다.

우선은 마땅한 술집 찾기가 어렵다. 혹시 있더라도 거리가 좀 있으면 오가는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 여기저기 들리느라 시간 오래 걸리고 낮에도 뜨문뜨문 다니는 버스는 생각할 수도 없고 술 한 잔 마시자고 매번 몇 만원씩 왕복 택시비를 써야하는 것도 마뜩치 않다. 대리운전 부르기도 쉽지 않다. 그래서 친구 집에 가서 술을 마시는 날이면 그 집에서 자고 와야 한다. 그렇지만 민폐도 싫고 남의 집에 자는 것도 불편하다. 그래서 친구가 술 마시자고 불러도 자꾸 핑계대고 피할 궁리만 하게 된다. 시골에 내려올 때 매일 친구나 이웃과 어울려 저녁에 술 한 잔 걸치는 낭만을 꿈꿨던 것과는 정반대다. 이제는 웬만하면 혼술이다. 익숙해지고 나니 그게 훨씬 더 편하다.

 

혼자 마시는 술이라도 때로는 더 마시고 싶을 때가 있다. 마실지 말지를 두고 갈등을 하다 보면 문득 권주가(勸酒歌)라 할 정철의 장진주사(將進酒辭)가 떠오르기도 한다.

 

한 잔(盞) 먹세 그려. 또 한 잔(盞) 먹세 그려.
꽃 꺾어 산(算)놓고 무진무진(無盡無盡) 먹세 그려.
이 몸 죽은 후(後)면
지게 위에 거적 덮어 줄이어 매어가나,
유소보장(流蘇寶帳)의 만인(萬人)이 울어 예나.
어욱새, 속새, 떡갈나무, 백양(白楊) 숲에 가기곳 가면,
누른 해, 흰 달, 가는 비, 굵은 눈, 소소리 바람 불 제
뉘 한잔 먹자 할꼬.
하물며 무덤 위에 잔나비 휘파람 불제야
뉘우친들 어떠리.

 

꽃가지 꺾어 잔을 세며 술 마시는 운치도, 거적데기에 말려 지게에 실려가 묻히든 호화롭게 꾸민 상여 뒤에 많은 사람들이 울며 뒤따르는 속에 묻히든, 결국 죽으면 그만이라고 한다.

온갖 잡풀이 우거진 산 속에 묻히면 술 같이 마시자 권할 사람이 없고, 찾는 사람 없어 무덤 위에 원숭이가 올라와 온갖 짓을 다하며 뛰노는 상황이 되면 그때 가서 살아서 더 마시지 못한 것을 후회해봐야 소용이 없단다.

 

 

정철은 술을 무척이나 좋아했던 인물로 그로 인한 실수도 많았다. 그래서 선조가 은(銀) 잔 하나를 하사하면서 그것으로 하루에 세 잔만 마시고 그치면 술로 인한 실수로 남의 미움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술이 부족하다고 생각한 정철이 술잔을 두들겨 잔을 키워 마셨다는 일화가 전한다.

그런 정철이 한편으로는 술을 경계하는 글도 남겼다.

 

내가 술을 즐기는 데는 네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불평(不平)하여 마시는 것이고, 둘째는 흥이 나서 마시는 것이며, 손님을 대하느라 마시는 것이 셋째이고, 남이 권하는 것을 거절하지 못하여 마시는 것이 넷째이다.
某之嗜酒有四 不平一也 遇興二也 待客三也 難拒人勸四也

불평이 있으면 순리대로 풀어버리면 되고, 흥이 나면 시가(詩歌)를 읊으면 되고, 손님을 대접하는 것은 성신(誠信)으로 하면 되고, 비록 남이 번거롭게 권하더라도 나의 의지가 굳으면 억지로 마시게 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런데도 이 네 가지 좋은 방도를 버리고 한 가지 불가(不可)한 데 빠져들어 끝내 미혹되어 일생을 그르치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不平則理遣可也 遇興則嘯詠可也 待客則誠信可也 人勸雖苛 吾志旣樹 則不以人言撓奪可也 然則捨四可 而就一不可之中 終始執迷 以誤一生 何也

내가 벼슬을 그만두고 물러나 쉴 때에 임금님의 부름을 다섯 번이나 받았다. 금년 봄에는 부득이 병을 무릅쓰고 조정에 달려가 물러나게 해달라고 소(疏)를 올렸다. 내 뜻이 정말 은거하는데 있다면 의당 두문불출하여 종적을 감추고 언행을 삼가야 할 것이다.
余休官退處 五承恩旨 到今年春 迫不得已 力疾趨召 陳疏乞退 志在丘壑 則當杜門斂跡 愼言與行可也

그러나 나는 행실이 일정하지 못하고 말에 늘 실수를 범하니, 이 모든 잘못과 망령됨은 모두 이 술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래서 술이 취했을 때에는 마음 내키는 대로 행했다가, 술이 깬 뒤에는 취했을 때의 일을 알지 못한다. 혹 남이 취했을 때의 일을 얘기해 주면 처음에는 믿지 않다가 나중에 참으로 그런 일이 있었음을 알고 나면 부끄러움에 죽고 싶은 생각이 든다.
而動靜無常 言語失宜 千邪萬妄 皆從酒出 方其醉時 甘心行之 及其醒也 迷而不悟 人或言之 則初不信然 旣得其實 則羞媿欲死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도 그런 실수를 저지르고 내일 또 그런 실수를 되풀이하여 허물과 후회가 산더미처럼 쌓이되 그 허물을 만회할 날이 없는지라, 가까운 사람은 나를 슬퍼하고 소원(疎遠)한 사람은 나에게 침을 뱉는다. 그리하여 천명(天命)을 더럽히고 도덕규범을 모멸함으로써 유가(儒家)의 가르침에 어긋남이 적지 않았다.
今日如是 明日又如是 尤悔山積 補過無時 親者哀之 疏者唾之 褻天命 慢人紀 見棄於名敎者不淺焉

이달 초하루에 가묘(家廟)에 하직 인사를 드리고 국문(國門)을 나와 강가에 이르니 전송 나온 사람들이 배안에 가득했다. 이 때 한양 쪽으로 머리를 돌려 지난날을 돌이켜 생각해 보니 내 자신이 마치 도둑처럼 남의 집에 뛰어 들어갔다가 창과 화살을 피해 몸을 빼냈더니 훤한 대낮에 사람을 만난 격이라, 놀라고 당황한데다 처지가 난감하여 몸 둘 곳이 없더라. 큰 죄라도 지은 것처럼 종일 전전긍긍해 마지않았다.
月之初吉 辭家廟 出國門 臨江將濟 送者滿舟 回首洛中 追思旣往 則恰似穿窬之人 抽身鋒鏑 白日對人 惶駭窘迫 無地自容 終日踧踖 如負大罪

내가 다시 강가에 돌아왔는데, 때 마침 선친(先親)의 기일(忌日)이었다. 목이 메어 눈물을 삼키면서 애통해하는 가운데 일말의 선(善)한 마음이 우러나와 마침내 개연히 스스로 다음과 같이 반성한다.
及去而更來于江上也 先忌適臨 嗚咽呑聲 哀慘之中 善端萌露 遂慨然自訟曰

어찌하여 정호(程顥)와 같은 경지에 이르러서도 사냥하기 좋아하던 마음이 10년 뒤에 다시 싹 트고, 호전(胡銓)과 같은 강직한 인물이 그 심한 고통을 겪고도 여색을 사모하였던가?
喜獵何到於明道 而萌動於十年之後 好色何到於澹菴 而繫戀於動忍之餘

잡아 간직하기 어려운 것이 마음이요, 잃어버리기 쉬운 것이 뜻이라. 이 마음과 이 뜻을 누가 주장하는가. 주인옹(主人翁)이여, 항상 스스로 경계하여 각성할지어다. 진실로 이 말과 같이 하지 못한다면 내가 어떻게 다시 이 강물을 보겠는가.
難操者心 易失者志 心兮志兮 孰主張之 主人翁兮 常惺惺兮 苟不如此言 吾何以更見江水兮
▶주인옹(主人翁) : 정철 자신.

만력 5년(선조 10년 : 1577년) 4월 7일에 서호정사(西湖亭舍)에서 쓴다.
萬曆五年丁丑四月。書于西湖亭舍。

 

정철이 42살 때 지은 <계주문(戒酒文)>이다. 술 마시는 사람치고 글 속에 있는 후회와 결심을 안 해본 이가 누가 있을까!

 

혼술의 좋은 점은 언제든 내 편한 때 마실 수 있고, 마시고 싶은 만큼만 마시고, 술자리를 끝내고 싶을 때 끝낼 수 있으며, 혹시라도 술에 취해 남에게 추한 모습을 보이거나 폐 끼칠 염려가 없는 것이다.

좋아하는 음악을 곁들여도 누가 뭐랄 사람이 없고, 안주도 내 마음대로 고를 수 있다. 처음에는 조금 번거롭게 느껴졌지만 저녁에 먹을 안주를 고민하고 내 손으로 준비하는 것 또한 혼술하면서 얻게 된 즐거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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