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공(奉公) 제5조 공납(貢納) 2
전조(田租)나 전포(田布)는 국가의 재정에 가장 긴급한 것들이다. 넉넉한 민호(民戶)의 것을 먼저 징수하되, 아전들이 훔쳐 빼돌리지 못하게 해야만 제 기한에 댈 수 있을 것이다.
(田租田布 國用之所急須也 先執饒戶 無爲吏攘 斯可以及期矣)
▶봉공(奉公) : 『목민심서(牧民心書)』 제3편인 봉공(奉公)은 충성으로 임금을 섬기고 공경으로 윗사람을 섬기는 등, 공무를 수행하는 데 필요한 사항을 6조로 나누어 논하였다.봉공(奉公)의 제5조인 공납(貢納)은 ‘국가의 수요품을 조달할 목적으로 각 지역에 토산물을 할당하여 현물로 거두어들이는 제도’를 말한다.
▶전포(田布) : 베로 대납하는 전세(田稅).
요즈음 국가의 재정은 날로 줄어들어 백관의 봉록(俸祿)과 공인(貢人)의 대가 지불이 항상 신구연도(新舊年度)가 이어지지 않음을 걱정하고 있는데도 넉넉한 민호(民戶)나 기름진 토지를 가진 자의 부세(賦稅)는 아전의 전대 속으로 들어가고, 조선(漕船)의 세곡(稅穀) 운반은 해마다 그 기한을 어겨서, 그 때문에 체포되어 문초를 당하고 파면당하는 자가 잇달고 있으나 아직도 이를 깨닫지 못하고 있으니 아쉬운 일이다.
▶공인(貢人) : 나라에 물품을 먼저 바치고 나중에 값을 받을 때 이자를 쳐서 받던 공방(貢房)의 사람. |
호태초(胡太初)가 말하였다.
“고을 아전들은 부강(富强)한 집안과 평소에 서로 표리가 되어, 부강한 집안은 해마다 관에 부세를 바치지 않게까지 하고 다만 선량하고 가난한 백성들만 기한 전에 재촉하여 들볶아서 내게 한다.”
중국에서도 그러하니 이는 아마도 천하의 공통된 걱정거리인 듯하다.
▶호태초(胡太初) : 송나라 사람. |
《한암쇄화(寒巖瑣話)》에 이렇게 말하였다.
“세미(稅米) 한 가지 일로 말하더라도, 호조(戶曹)에 납부해야 할 것이 4천 석이라면, 본읍에서 백성들에게서 징수하는 것은 만 석이 훨씬 넘는다. - 백성들에게서 나오는 양이 넷이라면 나라에 바치는 양은 그 중의 하나다. - 기름진 토지, 넉넉한 민호에서 내는 기름기 흐르는 입쌀로 아침에 명령하여 저녁에 바칠 수 있는 것은 아전들이 모두 부정하게 횡령한다. 혹은 은결(隱結)로써 거두어들이고, 혹은 궁결(宮結)이라 하여 제감(除減)하며, 혹은 저가(邸價)로써 거두어들이고, 혹은 거짓 재결(災結)로써 제감하며, 흑은 돈으로 받고, 혹은 쌀로 받아, 이미 초가을에 구름이 몰려가듯 냇물이 흘러가듯 끝내버려 도둑질한 액수는 다 아전의 전대 속으로 들어간다. 이에 그 중에서 남은 쌀만으로 4천 석의 나라에 내는 세액을 채운다.
▶은결(隱結) : 고의로 양안(量案)에 올리지 않고 경작하는 전지에 매긴 결세(結稅). ▶궁결(宮結) : 궁방(宮房)에서 조세(租稅)를 받아가는 논밭. ▶제감(除減) : 수효를 덜어서 줄임. ▶저가(邸價) : 저리(邸吏)의 역가(役價)이다. ▶재결(災結) : 가뭄이나 홍수•서리•우박•벌레 등으로 인해 해를 입은 전답에 대해 그 세(稅)를 면해주는 것. |
무릇 나라에 내는 부세에 충당되는 것은 모두 온 집안이 몰사한 집이거나, 유리걸식으로 떠나버린 집이거나 홀아비ㆍ과부ㆍ고아(孤兒)ㆍ아들 없는 노인으로 의지할 곳 없는 집이거나, 병들고 피폐한 집이거나, 묵은 밭ㆍ못 쓰게 된 땅에 쑥대가 우거지고 자갈이 뒹구는 밭으로서 살갗을 도려내고, 뼛속을 긁어내도 어찌할 수 없는 무리들일 뿐이다.
그런데 아전은 그들의 쌀을 배에 싣고, 남으로는 탐라(耽羅)에 가서 팔며, 북으로는 함흥(咸興)에 가서 장사하여, 채색한 배에 북을 둥둥거리면서 저 구름과 물이 맞닿는 바다 위에서 놀고 있는데, 그런 사정도 모르는 현령은 바야흐로 불쌍한 홀아비ㆍ과부ㆍ병자들을 잡아다가 독촉하여 매질이 뜰에 가득하고 칼을 씌워 가둔 사람이 옥에 넘친다.
이에 사람을 뽑아 사방으로 보내되, 검독(檢督)이라 칭하고서 일족과 이웃사람들을 조사하고 침해하여 징수하므로 성(城)의 불을 끄느라 못물이 다 없어지듯 일족과 이웃 사람이 해를 받게 되어, 송아지도 끌어가고, 돼지도 빼앗아가며, 가마솥ㆍ돌솥 등 살림 도구를 빼앗아가니 백성은 울부짖고 길에 쓰러져 곡성은 하늘에 사무치는데, 갈백(葛伯)이 먹어 치우고 또 제사 지내지 않으면 성주(聖主)의 정퇴(停退)하라는 영이 그제서야 현에 도착하게 된다.
▶성(城)의 …… 없어지듯 : 불을 끄느라 못물이 고갈되어 물고기가 말라 죽는다는 뜻으로, 무고한 사람이 연루의 재앙을 받는 것을 이른다. ▶갈백(葛伯)이 …… 않으면 : 갈백은 하(夏)나라 때 제후(諸侯)인데 포학무도하여, 탕왕(湯王)이 제사 지내라고 보내 준 곡물을 제사 지내지 않고 마구 먹어버렸다는 고사를 가리키며, 이에 따라 이 말은 수령의 횡포를 비유한다. ▶정퇴(停退) : 여기서는 조세납부의 기한을 연기하는 일이다. |
가경(嘉慶) 기사년ㆍ갑술년에 남방에 큰 기근이 들었는데, 내가 민간에 있으면서 문이 바로 바다 어귀로 나 있기 때문에 이런 일을 내 눈으로 보았다. 이로써 본다면, 수령들에게 가장 귀한 것은 밝을 명(明) 한 자일 따름이다.
모든 고을이 다 그러했으나 오직 해남 현감(海南縣監) 이복수(李馥秀)만은 가을 추수철에 넉넉한 집에서 먼저 거두어 나라에 내는 부세(賦稅)의 액수를 충당하도록 하며 명령하기를, ‘내가 집행한 것에 대해서는 아전들은 방결(防結) - 백성의 부세를 사사로이 집행하는 것. - 할 수 없으려니와, 백성들도 방납(防納) - 사사로 납부하는 것 - 할 수 없다.’ 하였다. 그 이듬해 봄에 창고를 열고 부세를 거둬들이니, 한 달도 못되어 북을 두들기면서 세곡을 실은 배를 띄워 보내게 되었다. 이에 앙심을 먹은 아전들이 공모하여 그를 음해하여, 드디어 어사(御史)에게 쫓겨났으니 아! 애석한 일이다.
▶가경(嘉慶) : 청 인종(淸仁宗)의 연호. 1796 ~ 1820. ▶기사년 : 1809년. 순조 9년. ▶갑술년 : 1814년. 순조 14년. ▶내가 민간에 있으면서 : 1801년경부터 다산 정약용이 전라도 강진군(康津郡)의 귤동(橘洞)에 유배되어 있던 때를 가리킴. |
예관(倪寬)이 좌내사(左內史)가 되어 조세(租稅)를 바칠 때, 형편에 따라 재량하여 백성들에게 빌려주었으므로 조세가 많이 납입되지 않았다. 조세의 빚을 져 고과(考課)에 전(殿)이 되어 파면을 당하게 되었다. 백성들은 행여나 그를 잃을까 염려하여, 큰 집에서는 우차(牛車)로, 작은 집에서는 지게로 지고 조세를 수송하여 줄줄이 잇달아 끊이지 않으니, 고과(考課)가 다시 최(最)가 되었다.
수령이 백성을 사랑하면 재촉하지 않더라도 과세는 저절로 이와 같이 완료되는 것이다.
▶예관(倪寬) : 한(漢)나라 무제(武帝) 때 좌내사를 거쳐 어사대부(御史大夫)를 지냈다. ▶전(殿) : 고과(考課)에 있어서 성적의 상등은 최(最), 하등은 전(殿)으로 매겼다. |
당(唐)나라 하이우(何易于)는 부역을 독촉함에 있어서 차마 잔약한 백성들을 다그칠 수 없어서, 자기의 관봉(官俸)을 가지고 백성들의 조세를 대납하여 주었다.
고승간(高承簡)이 형주 자사(邢州刺史)로 옮기자, 관찰사의 세곡 재촉이 매우 다급하니, 고승간은 잔약한 백성들 수백 호의 세곡을 대납하여 주었다.
당나라 노탄(盧坦)이 수안령(壽安令)이 되자, 하내(河內) 지방의 부세 기한이 이미 급박하게 되었다. 고을 사람들이 호소하기를,
“베틀에 있는 베도 아직 짜지 못하였습니다.”
하므로 노탄은 부(府)에 나아가 열흘만 연기해 줄 것을 청하였으나 들어주지 않았다. 노탄은 백성들에게 타일렀다.
“기한을 돌보지 말고 세만 내도록 하라. 벌이 있어도 수령의 봉록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조개(趙槩)가 청주 지주(靑州知州)로 있을 적에 관하의 고을을 신칙하여 부세를 함부로 독촉하지 못하게 하였더니, 그해 여름 부세(賦稅)는 한 달 앞서 마련되었다. 이는 예관(倪寬)이 최(最)로 고과된 일과 비슷한 것이다.
▶조개(趙槩) : 송나라 때의 관리. |
소송(蘇頌)이 항주 지주(杭州知州)가 되어 나가는데, 백여 명이 길을 막고 울면서 호소하기를,
“우리들은 전운사(轉運使)에게 포흠(浦欠)진 시역민전(市易緡錢)의 상환을 독촉받아, 낮에는 관정(官庭)에 잡혀 있고, 밤이면 상원(廂院)에 감금되어 있는데, 비록 죽는 한이 있더라도 갚을 길이 없습니다.”
하였다. 그는,
“내가 이제 너희들을 풀어 주어, 너희들로 하여금 생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할 것이니, 먹고 입고 남은 것으로는 모조리 관의 빚을 갚겠는가.”
하였더니 모두들 말하기를,
“감히 저버리지 않겠습니다.”
하였다. 이에 모두 풀어놓아 주니, 전운사가 크게 노하여 소송을 탄핵하려 하였으나, 빚을 갚는 백성들이 모두 기한보다 앞서 내므로 드디어 다시 다른 말이 없었다.
▶소송(蘇頌) : 송나라 때의 관리. ▶전운사(轉運使) : 당나라에 설치된 벼슬 이름으로 처음에는 군량(軍糧) 나르는 일만을 맡았으나 뒤에는 변방(邊防)ㆍ도적(盜賊)ㆍ옥송(獄訟)ㆍ전곡(錢穀)의 일까지 맡아보았다. ▶포흠(浦欠) : 관가(官家)의 물건을 빌려 사사로이 소비하는 것 또는 갚지 못한 것. ▶시역민전(市易緡錢) : 송나라 왕안석(王安石)이 신설한 신법(新法)의 하나인 시역법(市易法)으로, 소상인(小商人)의 물품을 관에서 사들이기도 하고, 또 그들에게 저리의 자금을 융자해 줌으로써 호상(豪商)의 횡포를 막아 상품 유통을 원활하게 하려는 제도였다. 민전은 융자받은 자본금이란 뜻으로 추정된다. ▶상원(廂院) : 상군(廂軍)이 묵는 집. 상군은 당송(唐宋) 때 군대 이름이다. |
조극선(趙克善)이 군읍에 있을 때, 부세를 거둬들이는 데 말질을 반드시 백성이 스스로 하게 하니, 백성들은 그의 청렴하고 공평함에 즐거워하여 벌을 주지 않아도 제 기한 내에 자진 납부하였다.
▶조극선(趙克善) : 1595~1658. 인조 때 호조 정랑(戶曹正郞)ㆍ면천 군수(沔川郡守)ㆍ온양 군수 등을 지내고 효종 때 장령(掌令)을 지냈다. 자는 유저(有諸), 호는 야곡(冶谷), 본관은 한양(漢陽), 시호는 문목(文穆)이다. |
당나라 위욱(韋澳)이 경조 윤(京兆尹)으로 있을 적에 황제의 외삼촌인 정광(鄭光)의 장주리(莊主吏)가 방자하여 여러 해 동안 관의 세곡을 바치지 않았다. 위욱은 그를 잡아 두고 황제에게 아뢰기를,
“폐하(陛下)께서 신을 발탁하여 경조 윤(京兆尹)으로 삼았는데, 어찌 법을 제한하여 가난한 백성들에게만 실행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황제는 들어가 태후(太后)에게 아뢰기를,
“위욱은 절대 범할 수 없습니다.”
하니, 태후가 주리를 위하여 조세를 바쳐서 이에 죄를 면하였다.
▶장주리(莊主吏) : 농장(農莊)을 주관하는 이서(吏胥). |
고려 때, 왕해(王諧)가 나가서 영남(嶺南)을 안찰(按察)할 때, 온 도(道)가 두려워 복종하였다. 최이(崔怡)의 아들 중 만종(萬宗)과 만전(萬全)이 쌀 50여만 석을 저축하여, 백성들에게서 이식을 취하였는데, 그들의 문도(門徒) 둘을 보내어 징수하되 매우 혹심하게 독촉하기 때문에, 백성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던 것을 모조리 보내 주니, 조세를 못 바치는 일이 자주 있었다.
왕해가 명령하기를,
“백성이 아직 세곡을 납부하기도 전에, 사채(私債)를 독촉하는 자는 죄를 주겠다.”
하였다. 그제야 이 두 중이 감히 함부로 굴지 못하게 되어, 조세가 제때에 납부될 수 있게 되었다.
▶왕해(王諧) : 고려 시대의 문신(? ~ 1246). 고종 때 감찰어사(監察御史)ㆍ소부소감(小府少監)을 거쳐 경상도 안무사(慶尙道按撫使)로 있을 때 최만종(崔萬宗) 등의 횡포를 견제하는 등 선정을 베풀었고, 그 후 진주 부사(晉州副使)가 되어서도 선정을 베풀었다. ▶최이(崔怡) : 고려 때의 권신(權臣). 원래 이름은 최우(崔瑀, ?~1219)였으나 뒤에 이(怡)로 개명하였다. 고려 무신정권의 최고 권력자였던 최충헌(忠獻)의 아들이다. |
상국(相國) 이원익(李元翼)이 안주 목사(安州牧使)가 되었는데, 고을의 부세는 으레 변읍(邊邑)에 납입하도록 되었다. 이서(吏胥)들이 배로 징수하여 남겨 먹는 것이 이어와서 크나큰 병통이 되었다. 그는 세액을 밝혀 정하고, 남는 수량은 탕감한 후, 몸소 가지고 가서 바쳐 부정과 횡령을 방지하였다. 변읍이 험하고 먼데도 친히 그곳에 오는 것을 보고, 몹시 놀라서 다투어 술과 기생을 베풀어 맞이하여 위로하였지만, 공은 일체 받지 않았다.
▶상국(相國) : 재상(宰相)의 별칭. ▶이원익(李元翼) : 1547~1634. 자는 공려(公勵), 호는 오리(梧里), 시호는 문충(文忠), 본관은 전주이다. 선조 때 형조 정랑ㆍ호조 참의ㆍ도승지ㆍ안주 목사ㆍ평안도 관찰사 등을 거쳐 영의정에 이르고 완평부원군(完平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다. 문장에도 뛰어났으며, 저서에는 《오리집(梧里集)》ㆍ《오리일기(梧里日記)》가 있다. |
감사(監司) 정언황(丁彥璜)이 회양 부사(淮陽府使)가 되었는데, 본부의 전세(田稅)는 면포로 상납하게 되어 있었다. 그는 산골 백성들의 가난한 실정을 불쌍히 여겨, 이민(吏民)들에게 호랑이를 잡아 오게 하여 호랑이나 표범 가죽을 호조(戶曹)로 보내어 한 고을의 1년 세포를 다 제감하도록 하였다.
▶정언황(丁彥璜) : 인조 때 신계 현령(新溪縣令)ㆍ병조 참지ㆍ회양 부사ㆍ제주 목사(濟州牧使)ㆍ우부승지ㆍ강원도 관찰사 등을 지냈다. 1597~1672. 자는 중휘(仲徽), 호는 묵공옹(默拱翁), 본관은 나주(羅州)이다. |
번역문 출처 : 한국고전번역원(이정섭 역, 1986), 다산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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