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민심서

목민심서 143 – 새로운 공물 요구로 인한 폐해를 막아야 한다.

從心所欲 2022. 6. 28. 10:33

[일재(一齋) 김윤보(金允輔) <풍속도 10폭 병풍> 中 8폭, 병풍 크기 201 x 564cm, 국립민속박물관]

 

●봉공(奉公) 제5조 공납(貢納) 4
공물(貢物)이나 토산물(土產物)은 상사(上司)에서 배정하는 것이다. 전에 있던 것은 성심껏 이행하고 새로 요구하는 것을 막아야 폐단이 없게 될 것이다.
(貢物土物 上司之所配定也 恪修其故 捍其新求 斯可以無弊矣)
봉공(奉公) : 목민심서(牧民心書) 3편인 봉공(奉公)은 충성으로 임금을 섬기고 공경으로 윗사람을 섬기는 등, 공무를 수행하는 데 필요한 사항을 6조로 나누어 논하였다.봉공(奉公)의 제5조인 공납(貢納)국가의 수요품을 조달할 목적으로 각 지역에 토산물을 할당하여 현물로 거두어들이는 제도를 말한다.
상사(上司) : 상급 관청.

 

정선(鄭瑄)은 말하였다.

수령이 된 자는 새로운 사례 만드는 것을 꺼려야 한다. 옛날에 토산물을 공물로 바쳐서 그 지방에 많은 해독을 끼친 이가 있었으니교지(交趾)의 여지(荔枝같은 것이 그것이다.”

정선(鄭瑄) : 명나라 때의 사람으로 자는 한봉(漢奉)이다. 의종(毅宗) 때 진사 출신으로 벼슬은 응천순무(應天巡撫) 등을 지냈다. 인용문 수령이……그것이다.’는 그의 저서 작비암일찬(昨非菴日纂)에 실려 있다.
교지(交趾)의 여지(荔枝) : 여지라는 나무의 높이는 5~6()쯤 되고 푸른 잎에 꽃은 푸르며 열매는 붉은데, 열매는 익으면 달고 수즙(水汁)이 많다. 당서(唐書)에 의하면, 양 귀비(楊貴妃)가 여지를 좋아하므로 교지에서는 해마다 여지를 바치게 되었는데 날씨가 더워서 하루만 지나면 썩어버리므로 그것이 썩기 전에 바치느라 교지 지방은 폐해가 막심했다 한다.

 

양성(陽城)이 도주 자사(道州刺史)가 되었는데, 그 주에서 난쟁이가 많이 나서 해마다 정조에 바치고 있었다. 양성은 그들의 생이별을 불쌍히 여겨 상주하기를,

주민이 전부가 난쟁이라서 바치자니 누구를 바쳐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였더니, 이로부터 그만두게 되었다. 그 고을 백성들이 감복하여 양()자를 따서 아들의 이름을 지었다.

▶양성(陽城) : 당나라 때의 관리.

 

상우(上虞) 사람 곽남(郭南)이 상숙지현(常熟知縣)이 되었는데, 우산(虞山)에 연율(軟栗)이 생산되어 백성 중에 이를 바치는 자가 있었다. 곽남이 급히 연율 종자를 없애도록 하고는

앞으로 고을 백성에게 해가 될까 두렵다.”

하였으니, 백성을 위하여 먼 뒷날 일까지 걱정함이 이러하였다.

곽남(郭南) : 명나라 때의 관리.
연율(軟栗) : 연한 밤.

 

손백순(孫伯純) - 백순은  손순효(孫舜孝)의 자() - 이 해주 목사(海州牧使)로 있을 적에 조정에서 군기(軍器)를 조발(調發)하는데 노춘(弩椿)ㆍ전간(箭幹)따위가 있었다. 해주에는 본래 이런 물건이 생산되지 않으므로 백성들이 부레풀로 그것을 대충(代充)하기를 청하였다.

손순효는,

노춘(弩椿)ㆍ전간(箭幹)이 해주에서 생산되지 않는 것은 모두 알고 있는데, 만일 이곳 토산물로 그것을 대충하면 해마다 그것을 부과하여 그칠 때가 없을까 염려된다.”

하니, 유식한 사람은 이를 지당한 말이라고 하였다.

손순효(孫舜孝) : 1427 ~ 1497. 호는 물재(勿齋)ㆍ칠휴거사(七休居士), 시호는 문정(文貞), 본관은 평해(平海)이다. 벼슬은 도승지ㆍ형조 판서ㆍ공조 판서ㆍ경기도 관찰사 등을 거쳐 영중추부사에 이르렀으며, 특히 성리학에 밝고 문장에도 뛰어났다.
노춘(弩椿)ㆍ전간(箭幹) : 노춘은 참죽나무 활, 전간은 화살대.
대충(代充) : 다른 것으로 대신 채움.

 

장구(張彀)가 동주판관(同州判官)이 되어 출병하여 변방을 수비하게 되었는데, 그 주에 화살 10만 개를 징발하되 독수리나 기러기 깃으로 만들어야 하므로 깃의 값이 뛰어올라 살 수가 없게 되었다.

장구는

화살은 쏘아 버리는 물건이니, 어떤 깃인들 안 되겠습니까?”

하자, 절도사는,

마땅히 상서성(尙書省)에 보고해야 한다.”

하였다. 장구는,

여기에서 서울까지는 2천 리나 되며, 백성들은 살길이 급한데 어찌하겠습니까? 만일 문책이 있으면 하관(下官)이 그 허물을 지겠습니다.”

하였더니, 하루 사이에 가격이 몇 배나 떨어졌다. 상서성(尙書省)에서도 마침내 소청대로 들어주었다.

▶장구(張彀) : 금(金)나라 때의 관리.

 

진인(陳麟)이 민현지현(閩縣知縣)으로 있을 때, 사자(使者)가 와서 취우(翠羽)를 요구하는데, 다른 고을에서는 명령에 따랐으나 그만은 응하지 않았다.

사자가 노하여,

너는 누구를 믿고 감히 이러느냐?”

하므로, 그는,

오직 나 자신을 깨끗이 하고 스스로를 지킬 뿐이오.”

하였다.

진인(陳麟) : ()나라 때의 관리.
취우(翠羽) : 물총새의 깃털. 초록색 옥()인 비취(翡翠)라는 설도 있다.

 

송택(宋澤)이 액현(掖縣)을 맡았을 때, 호부(戶部)에서 제거사(提擧司)를 보내어 우황(牛黃)을 할당하여 사들이도록 하였는데, 재촉이 성화같았다. 백성들은 다투어 소를 잡아 우황을 취하였지만, 송택만은 글로써 제거사에게 말하기를,

소는 돌림병을 만나면 병들어 우황이 있지만, 지금은 태평이 오래되어 화기(和氣)가 온 고을에 충만하여 소들이 모두 살쪄서, 채취할 만한 우황이 없다.”

하니, 사자도 힐문할 수 없어 온 고을이 우황 부과에서 면하게 되었다.

송택(宋澤) : ()나라 때의 관리.
제거사(提擧司) : 궁궐 청소와 자물쇠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아.

 

공규(孔戣)가 화주 자사(華州刺史)가 되었을 때, 해마다 주에서 바치는 공물을 조사해 보았더니 해충(海蟲)ㆍ협채(浹菜)ㆍ합감(蛤蚶) 등 먹음직한 것들이었는데, 바다에서 서울까지 실어 보내는 데 드는 인원이 해마다 436천 명이었다. 이에 소를 올려 이 일을 그만두게 하였다.

▶공규(孔戣) : 당나라의 관리로 공자의 38세손.

 

다산록(茶山錄)에 이렇게 말하였다.

제주에서 전복이 나는데 크기가 자라만 하였다. 재 속에 묻었다가 꺼내어 말리는데 대꼬챙이로 꿰뚫은 구멍이 없으므로 무혈복(無穴鰒)이라 한다. 수년 이래 감사가 이를 요구하므로 점차로 민폐가 되었다.
또 강진(康津)ㆍ해남(海南) 등지에는 이른바 생달자(生達子)라는 것이 있는데, 그 나무의 잎이 겨울에도 푸르러 마치 산다(山茶) 같으며, 기름을 짜서 나쁜 종기를 치료할 수 있다. 수년 이래 감사가 이를 요구하므로 점차로 민폐가 되었다. 이런 일들을 수령이 이어받아서는 안 된다.”

 

조계원(趙啓遠)이 수원 부사(水原府使)가 되었는데, 그 고을의 밀면(蜜麪) - 속명으로는 약과(藥果). - 이 중국에서 유명하였다. 인조(仁祖)가 병중에 있을 때  어주(御廚)에는 입에 맞는 것이 없었다. 환관(宦官)이 사람을 시켜 그 약과를 구하니, 조계원은 대답하기를,

주부(州府)에서 사사로이 헌납하는 것은 신하로서 임금을 섬기는 체모가 아니니, 조정의 명령이 아니면 안 되겠다.”

하였다. 인조가 이 말을 듣고 웃으면서,

비록 군신의 사이라 하더라도 인척으로 얽힌 인정마저 없을 것인가.”

하였다. - 방언으로 약()이란 꿀[]이다. 그러므로 밀밥[蜜飯]을 약밥[藥飯]이라 하고, 밀주(蜜酒)를 약주(藥酒)라 하며, 밀과[蜜果]를 약과(藥果)라 한다. -

조계원(趙啓遠) : 1592~1670. 호는 약천(藥泉), 시호는 충정(忠靖), 본관은 양주(楊州). 광해군 때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를 지내고, 인조 때 정언(正言)ㆍ수원 부사ㆍ충청도 관찰사ㆍ예조 참판 등을 지내고 효종 때 전라도 관찰사, 현종 때 함경도 관찰사ㆍ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ㆍ형조 판서 등을 지냈다.
어주(御廚) : 임금의 음식을 장만하는 주방.

 

유정원(柳正源)이 자인 현감(慈仁縣監)이 되었는데 순찰사가 갈려 돌아가게 되었다. 신구(新舊)의 순찰사가 오고 갈 때에 서피(黍皮) 3백 장을 바치는 것이 상례로 되어 있었다. 유정원은 다시 순찰사에게,

서피 3백 장이면 말 3백 필을 잡는 데 해당되니, 작은 고을에서는 감당할 수 없습니다.”

하니, 순찰사는 그 수를 줄여 40장을 정액으로 해 주었다.

▶유정원(柳正源) : 1703~1761. 호는 삼산(三山), 본관은 전주(全州). 영조 때 지평(持平)ㆍ수찬(修撰)ㆍ판결사(判決事) 등을 거쳐 대사간(大司諫)에 이르렀다.

 

주광제(朱光霽)가 중경부 통판(重慶府通判)이 되어, 몸가짐을 청렴하고 검약하게 하고 일을 당하면 자기 의견을 지킴이 있었다. 하루는 감사가 은()을 내어 비녀를 만들도록 하므로, 광제가 은을 가지고 들어가서,

통판(通判)은 어려서부터 독서 할 줄만 알았지 비녀 만드는 법은 배우지 못하였습니다.”

하니, 감사가 노하였으나 한편 부끄럽기도 하여 그만두었다.

 

 

번역문 출처 : 한국고전번역원(이정섭 역, 1986), 다산연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