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민심서

목민심서 144 – 잡다한 세금과 공물은 백성을 힘들게 하는 것이다.

從心所欲 2022. 6. 30. 13:35

[일재(一齋) 김윤보(金允輔) <풍속도 10폭 병풍> 中 9폭, 병풍 크기 201 x 564cm, 국립민속박물관]

 

●봉공(奉公) 제5조 공납(貢納) 5
잡세(雜稅)나 잡물(雜物)은 가난한 백성들이 몹시 괴로워하는 것들이다.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은 보내 주고, 갖추기 어려운 것은 사절하여야 허물이 없게 될 것이다.
(雜稅雜物 下民之所甚苦也 輸其易獲 辭其難辦 斯可以无咎矣)
▶봉공(奉公) : 『목민심서(牧民心書) 제3편인 봉공(奉公)은 충성으로 임금을 섬기고 공경으로 윗사람을 섬기는 등, 공무를 수행하는 데 필요한 사항을 6조로 나누어 논하였다. 봉공(奉公)의 제5조인 공납(貢納) ‘국가의 수요품을 조달할 목적으로 각 지역에 토산물을 할당하여 현물로 거두어들이는 제도’를 말한다.

 

이사중(李師中) 낙주(洛州지주(知州)가 되었는데 백성들이 다세(茶稅)를 바치지 못하여 붙잡혀 오는 자가 매우 많았다. 이사중은 관대하게 처리해 주고 마을마다 궤짝 한 개를 놓아두게 하고 그 이름을 적고 매일 돈 1전씩을 넣어서 바치도록 하였더니, 연말에 포흠(逋欠)진 것이 모두 채워졌다.

이사중(李師中) : 송나라 관리.
포흠(逋欠) : 여기서는 조세(租稅)를 내지 않아 발생한 결손액.

 

조세환(趙世煥)이 동래 부사(東萊府使)로 있을 적에 청렴하게 공무를 봉행하여, 상고세(商賈稅)로 받은 은()을 호부(戶部)로 보낸 것이 9개월 동안에 14천 냥이나 되었으니, 전에는 없던 일이었다. 자기 녹봉으로 백성의 부세(賦稅)를 모조리 감해 주매, 관찰사가 왕에게 아뢰었더니, 왕은 말을 하사하여 포상(褒賞)하였다.

▶조세환(趙世煥) : 1615~1683. 호는 수촌(樹村), 본관은 임천(林川)이다. 효종 때 대구 부사(大丘府使)ㆍ연안 부사(延安府使) 등을 지냈고, 숙종 때 동래 부사ㆍ전라도 관찰사ㆍ병조 참지 등을 지냈는데, 특히 동래 부사로 있을 때에는 사재를 털어 빈민을 구제하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기공(祈公두연(杜衍)이 영흥 지부(永興知府)로 있을 때였다. 그때 하()땅 사람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섬서(陝西) 지방이 그 병란에 가장 괴로움을 당하였다. 아전이 그것을 빙자하여 백성들에게 침탈(侵奪)해서 징발(徵發)하는데 독촉이 각박하여 백성은 파산하고 그중에 목을 매거나 물에 빠져 죽는 자도 있었다. 두연은 물건의 귀천을 헤아리기도 하고 길의 원근을 재기도 하여, 그 기한을 관대하게 해 주면서 차례로 수송하게 하니, 이로 말미암아 물건 값이 뛰어오르지 않았고 아전들도 농간을 부리지 못하였다.

▶두연(杜衍) : 송나라 관리.

 

이당(李簹)이 양구 현감(楊口縣監)이 되었는데 고을에는  주원(廚院)에 납부하는 백토(白土)의 부역이 있어 큰 폐단이 되었다. 그는 처음 부임하여 역부(役夫)가 압사 당하는 것을 보고 불쌍한 마음을 견디지 못하여, 한편으로는 경사(京司)에 호소하고 한편으로는 감영(監營)에 낱낱이 보고하여 드디어 그 부역을 정파(停罷)하게 되었다.

후에 주원(厨院)의 계청(啓請)에 의해서 환원시키려 할 즈음에, 마침 그가 차원(差員)으로 명을 받들어 입대(入對)하게 되었다. 그는 백토의 수량을 반으로 감하고, 아울러 수륙 운반의 노고를 감해 주며, 또 경관(京官)을 보내지 말고 따로 도내의 수령 한 사람이 이 일을 관장하도록 청하였더니, 모두 허락을 얻었다.

이당(李簹) : 1661~1712. 본관은 덕수(德水)이다. 음보(蔭補)로 사산감역(四山監役)ㆍ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ㆍ양구 현감 등을 지냈고 시에 능하였다.
주원(廚院) : 궁중의 음식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청인 사옹원(司饔院)의 별칭.

 

상국(相國이경여(李敬輿) - 호는 백강(白江)이다. - 가 광해조(光海朝) 때 충원 현감(忠原縣監)이 되었다. 하루는 여름철에 칡을 캐게 하였는데, 백성들은 어디에 쓰려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듬해 봄이 되자 영건도감(營建都監)이 과연 칡 수천 묶음을 징수하매, 칡값이 모시 값과 맞먹었는데, 이 고을 사람들만은 예비되어 있었기 때문에 안연(晏然)하였고, 여분으로는 이웃 고을의 급한 사정을 도와주고, 그 값을 대략 쳐서 받아다가 다른 부역의 대가로 지급하기도 하였다.

도감(都監)이 또 장목(長木) 수만 개를 징수하였다. 공은 전에 현의 북쪽에 위치한 산에 재목이 많은 것을 보고는 벌채를 특별히 금지해 두었었다. 이때에 이르러, 강가로 달려가서 여러 상인들을 불러 놓고 말하기를,

너희들 중 저것을 베어서 도감에게 바치는 자는 절반을 주겠다.”

하니, 여러 상인들은 모두 좋아 날뛰며 명령에 따랐다. 이웃 고을의 산골 백성들은 장목을 마련하느라 부산하였으나 그 고을 사람들만 부역이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었다.

이경여(李敬輿) : 1585~1657. 호는 백강(白江) 또는 봉암(鳳巖), 시호는 문정(文貞), 본관은 전주이다. 광해군 때 검열(檢閱), 인조 때 부제학(副提學), 전라도 관찰사 이조 참판ㆍ형조 판서 등을 거쳐 효종 때 영의정에 이르고, 시문과 글씨에 능하였다.
안연(晏然) : 마음이 편안하고 침착한 모양.
영건도감(營建都監) : 조선시대 국가적인 건축공사를 관장하던 임시 관청.
장목(長木) : 건축에 쓰는 재목.

 

이시현(李時顯)이 성주 목사(星州牧使)가 되었는데 그때 산릉도감(山陵都監)이 철물(鐵物)을 부과하였다. 수량은 많고 기한은 촉박하므로 이속들은 마련하지 못하여 죄를 얻게 될까 두려워하였으나 공()만은 태연하기가 마치 아무 생각도 없는 듯하였다. 기일이 더욱 임박하자 이속들은 더욱 애타고 두려워하였다. 공은 드디어 사형당할까 걱정하고 있는 죄수 두 사람을 관정(官庭)에 내 놓고는,

너희들이 철물 약간을 마련해 바치면 나는 너희들의 죄를 용서해 줄 것이다.”

하였다. 그때 죄수들은 기꺼이 응답하기를,

심히 다행입니다.”

하였다. 그때 두 죄수의 자제들과 친족들이 문밖에 빽빽이 늘어서서 호미ㆍ삽ㆍ도끼ㆍ낫 등속을 다투어 가져오니, 잠깐 동안에 일이 이루어졌다.

생각건대, 이는 백성의 농기구를 거두어서 상사(上司)의 요구에 응하는 것이니, 그것이 좋은 방편인지는 모르겠다.

이시현(李時顯) : 자호는 미상이나, 1671~1672년경에 개령 현감(開寧縣監)으로 있을 때 선정을 베풀어 포상까지 받고, 1674년에 성주 목사가 되어 치적이 훌륭하므로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품계를 받기까지 하였다.
산릉도감(山陵都監) : 조선시대 왕이나 왕비의 능을 조성하기 위해 설치되었던 임시 관청.

 

상산록(象山錄)에 이렇게 말하였다.

가경(嘉慶) 기미년 봄에 칙사(勅使장승훈(張承勛)이 황주(黃州)에 이르러 관찰사에게 말하기를, ‘나의 장인이 일찍이 칙사로서 황주에 도착하자, 그때 관찰사가 토산물인 주반(朱槃) - 방언으로는 함지(函支)라고 한다. - 5()을 주었는데, 장인은 돌아와서 딸인 나의 아내에게 주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오래되어 부서졌으므로 마침 내가 또 그런 직분을 띠고 떠나게 되니, 아내의 요구가 있기에 감히 부탁하는 것이요.’ 하였다.
관찰사는 후일의 폐단이 될까 두려워서 이를 거절하였다. 왕이 듣고는 어찌 칙사가 이런 작은 물건을 요구하는데 거절할 수 있겠는가?’ 하고 밤을 새워서라도 만들어서 칙사가 돌아가는 길에 대어 주도록 하였다.
이에 감사는 갑자기 곡산부(谷山府)에 영을 내려 성화처럼 독촉하여 만들도록 하였으나, 칙사가 돌아가는 날은 3일 밖에 남지 않았으며, 역참(驛站)에서 곡산부의 나무가 나는 곳까지는 3백 리나 되었다. 감독하는 아전은 애달프게 부르짖으며 목매어 죽으려고까지 하였다.
내가 몰래 사람을 서울로 보내서 주반(朱槃)을 사오도록 하여 그것을 바쳤다

반송사(伴送使) - 김사목(金思穆) - 와 관찰사  - 조윤대(曺允大) - 는 깜짝 놀라 귀신 같다고 칭찬하였는데 그것을 서울에서 사온 줄을 몰랐던 것이다.” - 주반(朱槃)은 아주 커서 물 10여 동이가 든다. -

가경(嘉慶) : 중국 청나라 인종 때의 연호.
기미년 : 정조 23년인 1799.
칙사(勅使) : 조선시대 중국에서 들어온 사신(使臣).
반송사(伴送使) : 중국 사신을 호송하던 임시 벼슬.
황주(黃州) : 황해도 황주군.
김사목(金思穆) : 1740~1829. 호는 운소(雲巢), 시호는 경헌(敬獻),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음보(蔭補)로 김제 군수(金堤郡守)가 되고, 문과에 급제하여 병조 참판ㆍ대사헌ㆍ평안도 관찰사ㆍ예조 판서 등을 거쳐 좌의정ㆍ영중추부사를 지냈다.
조윤대(曺允大) : 1748~1813. 호는 동포(東浦), 본관은 창녕(昌寧)이다. 정조 때 대사성ㆍ이조 참의ㆍ강화 유수ㆍ황해도 관찰사 등을 지냈고, 순조 때 형조 판서ㆍ이조 판서ㆍ한성부 판윤 등을 거쳐 지중추부사를 지냈으며 명필로 유명하였다.

 

번역문 출처 : 한국고전번역원(이정섭 역, 1986), 다산연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