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민심서

목민심서 146 – 궁궐에 상납하는 일은 기일을 어기면 문제가 커진다.

從心所欲 2022. 7. 5. 10:08

[풍속화 <참외서리>, 국립민속박물관]

 

●봉공(奉公) 제5조 공납(貢納) 7
내수사(內需司)나 제궁(諸宮)에의 상납은 그 기일을 어기면 또한 사단(事端)이 생길 것이니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內司諸宮 其上納愆期 亦且生事 不可忽也)
봉공(奉公) : 목민심서(牧民心書) 3편인 봉공(奉公)은 충성으로 임금을 섬기고 공경으로 윗사람을 섬기는 등, 공무를 수행하는 데 필요한 사항을 6조로 나누어 논하였다. 봉공(奉公)의 제5조인 공납(貢納) 국가의 수요품을 조달할 목적으로 각 지역에 토산물을 할당하여 현물로 거두어들이는 제도를 말한다.
내수사(內需司) : 궐내에서 쓰는 곡물ㆍ베ㆍ잡물과 노비 등에 관한 사무를 맡아보던 관아.
제궁(諸宮) : 후궁(後宮), 대군(大君), 왕자군(王子君), 공주(公主), 옹주(翁主)의 궁가(宮家). 각 궁마다 별도의 토지와 노비를 소유 관리하였다.

 

옛날에 내수사나 제궁의 전장이 각 도(道)에 널려 있었는데 환관[奄人]이나 숙궁(稤宮), - 숙(稤)의 음은 숙(肅)인데 속자이다. - 들의 간악한 짓이 사방에서 일어나서 백성들에게 해독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에 영종(英宗) 이래로 이를 걱정하여 바로잡아 무토면세전(無土免稅田)의 전세(田稅)는 해당 고을에 납부하여 돈으로 바꾸어서 호조에 납부하도록 하고, 유토면세전(有土免稅田)은  도장(導掌)만 보내게 하고  궁노(宮奴)를 보내지 못하도록 하니, 그 폐단이 비로소 약간 수그러졌다.

숙궁(稤宮) : 궁방(宮房)의 일을 담당하던 사무원이다.
영종(英宗) : 고종 때 바뀌기 이전까지 영조의 묘호는 영종이었다.
무토면세전(無土免稅田) : 조세를 궁방(宮房)에 납부하도록 되어 있는 토지.
유토면세전(有土免稅田) : 궁방(宮房)의 소유로서 조세를 내지 않도록 되어 있는 토지.
도장(導掌) : 궁방의 토지를 관리하던 이원(吏員)으로 주로 도조(賭租) 징수하는 일을 맡아보았다.
궁노(宮奴) : 궁방(宮房)에 딸린 노비.

 

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이귀(李貴)가 안산 군수(安山郡守)로 임명받았는데, 군에 내수사(內需司)의 노비(奴婢)가 있어 모두 법에 어긋나게  복호(復戶)되고 있었다.

공은 법대로 집행하면서 허락하지 않았더니, 노비가 내수사로 가서 호소하여 작은 인장이 찍힌 문서를 가지고 와서 내지(內旨)라 일컬으며 전대로 복호하려 하였다. 공은,

참으로 왕의 명이 있었다면 정원(政院)으로부터 내렸을 것이다. 작은 인장이 찍힌 내지(內旨)를 외신(外臣)이 어찌 감히 펴 볼 수 있겠는가.”

하고는 드디어 거절하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귀(李貴) : 1557~1633. 호는 묵재(默齋), 시호는 충정(忠定), 본관은 연안(延安)이다. 선조 때 벼슬에 나아갔으며 인조 때에 정사공신(靖社功臣) 1등으로 연평 부원군(延平府院君)에 봉해지고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복호(復戶) : 호역(戶役)이 면제되는 일.
내지(內旨) : 임금의 은밀한 명령.

 

이세화(李世華)가 영남(嶺南)을 안찰(按察)할 때, 내수사(內需司) 절수장(折受章)이 본도에 하달된 것이 잇달아 몇 고을에 걸쳐 있어서 관세(官稅)가 많이 줄어들었다. 서울에서 온 차인(差人)들이 소란을 피우며 사납게 구니 그들이 지나는 곳마다 전쟁을 겪은 것 같았다. 이세화가 차인들의 죄를 따져서 장형(杖刑)을 가하고 장계(狀啓)를 올려 극력 논하였다. 그러나 왕이 이세화를 엄히 꾸중하니 감히 그 사실을 아뢸 수 없었다조정에서는 그것 때문에 떨고 있었는데남구만(南九萬)이 그를 구원하여 무사할 수 있었다.

이세화(李世華) : 1630~1701. 호는 쌍백당(雙栢堂)ㆍ칠정(七井)이고, 시호는 충숙(忠肅), 본관은 부평(富平)이다. 효종 때 정언(正言)ㆍ장령(掌令)을 거쳐 황해도ㆍ평안도ㆍ경상도ㆍ전라도의 관찰사 등을 지냈고, 숙종 때 호조ㆍ공조ㆍ형조ㆍ병조ㆍ이조의 판서 등을 지냈으며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다.
절수장(折受章) : 결세(結稅)를 떼어 받는다는 내용이 적힌 문서.
차인(差人) : 여기서는 내수사(內需司)에서 파견된 사람.
남구만(南九萬) : 1629~1711. 호는 약천(藥泉)ㆍ미재(美齋), 시호는 문충(文忠), 본관은 의령(宜寧). 효종, 현종, 숙종 때의 문신.

 

상국(相國허적(許積)이 전라 감사로 있을 적에 후궁(後宮) 조씨(趙氏) 집에서 보낸 종이 감영(監營)에 와서 어떤 일을 부탁하였으나 그는 사리에 부당함을 책망하고 시행하지 않았다. 그 종이,

순사(巡使)께서 제 말씀대로 하지 않으시고도 다른 자리로 영전해가실 수 있겠습니까?”

하므로, 그가 나졸들에게 명령하여 도리어 곤장으로 다스려서 죽여 버렸다.

후궁이 이 소식을 듣고 집안사람들을 단속하여 말하기를,

주상께서 만일 보낸 종이 내 세력을 믿다가 죽었다는 소문을 들으시면 반드시 나를 문책하실 것이다.”

하고, 끝내 그 일을 입 밖에 내지 못하였다. - 정재륜(鄭載崙)공사문견(公私聞見)에 나온다. -

▶허적(許積) : 1610~1680. 호는 묵재(默齋)ㆍ휴옹(休翁), 본관은 양천(陽川)이다. 인조 때 의주 부윤(義州府尹)ㆍ경상도 관찰사 등을, 효종 때 호조ㆍ형조ㆍ병조의 판서 등을 지내고 현종 때 우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이르렀으며, 숙종 때 오도 도체찰사(五道都體察使) 등을 지냈다.

 

번역문 출처 : 한국고전번역원(이정섭 역, 1986), 다산연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