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민심서

목민심서 140 – 공물을 바칠 때는 아전의 부정을 잘 살펴야 한다.

從心所欲 2022. 6. 20. 12:31

[일재(一齋) 김윤보(金允輔) <풍속도&nbsp;10폭 병풍> 中 5폭, 병풍 크기 201 x 564cm, 국립민속박물관]

 

●봉공(奉公) 제5조  공납(貢納) 1
재물은 백성에게서 나오는 것이며, 이를 수납하는 자는 수령이다. 아전의 부정을 잘 살피기만 하면 비록 수령이 관대하게 하더라도 폐해가 없지만, 아전의 부정을 살피지 못하면 비록 엄하게 하더라도 이익이 없다.
(財出於民 受而納之者 牧也 察吏奸則雖寬無害 不察吏奸 則雖急無益)
봉공(奉公) : 목민심서(牧民心書) 3편인 봉공(奉公)은 충성으로 임금을 섬기고 공경으로 윗사람을 섬기는 등, 공무를 수행하는 데 필요한 사항을 6조로 나누어 논하였다.봉공(奉公)의 제5조인 공납(貢納)국가의 수요품을 조달할 목적으로 각 지역에 토산물을 할당하여 현물로 거두어들이는 제도를 말한다.
공납(貢納) : 공물(貢物)을 바침. 지방의 토산물을 현물로 내는 세금제도.

 

이는 옛날의 최과(催科)라는 것이다양성(陽城)은 최과(催科)의 정사(政事)가 각박하지 않았으니 이는 백성을 다스리는 수령이 본받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곡식과 포목을 내어 나라에 바치는 것을 백성들은 그들의 본분으로 여기고 있으므로 까닭 없이 납세를 거절할 리는 없는 것이다. 매양 보면 우둔한 수령 중에 어루만지고 돌본다고 하는 자는 반드시 상납의 기한을 어기고, 국가를 위해 일한다고 하는 자는 반드시 뼈에 사무치도록 백성들을 박탈한다. 수령이 진실로 현명하다면 너그럽게 해 주되 기한을 어기지 않아 상하가 원망이 없을 것이니, 그 이치는 쉽게 깨칠 수 있을 것이다.

최과(催科) : 조세(租稅)를 독촉해 거두는 일.
양성(陽城) : 당나라 때의 관리.

 

정잠(政箴)에 말하였다.

최과(催科)하되 요란하지 않아야 하니 이것이 최과(催科)하면서도 어루만지는 것이며, 형벌하되 틀림이 없어야 하니 이것이 형벌하면서도 교화(敎化)하는 것이다. 봄에는 궁한 백성을 자식같이 구제하고, 가을에는 원수같이 부세(賦稅)를 징수해야 한다. 한 가지 이익이 생기게 하는 것은 한 가지 해독을 제거해 줌만 못하고, 한 가지 일을 내는 것은 한 가지 일을 감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위엄은 청렴한 데에서 생기고 정치는 부지런한 데에서 이루어진다. ‘백성 보기를 병든 사람처럼 하라[視民如傷]’는 말은 정명도(程明道)가 앉은 자리 옆에 써 두었고  ‘씀씀이를 절약하여 백성을 사랑하라[節用愛人]’는 말은 이문정(李文靖)이 평생토록 외었던 것이다.”

정잠(政箴) : 정치를 함에 있어서 경계해야 할 것을 적은 글을 말한다.
정명도(程明道) …… 두었고 : 시민여상(視民如傷)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맹자(孟子)에 나오는 구절로, 명도(明道) 정호(程顥)가 진성령(晉城令)으로 있을 때 이 글귀를 거실(居室)에 써 붙였다 한다.
씀씀이를 …… 사랑하라節用愛人 : 이 말은 논어에 있는 구절이다.
이문정(李文靖) : 주희(朱熹)의 스승이기도 한 송나라 때 사람 이동(李侗). 벼슬을 단념하고 학문에 정진하며 항시 상시우국(傷時憂國)하는 생각에 잠겨 있었다 한다. 자는 원중(愿中), 호는 연평(延平), 문정은 그의 시호이다.

 

양성(陽城)이 도주 자사(道州刺史)로 있을 적에 납세를 때 맞추지 못하여 감사가 독촉하게 되었다. 그는 고공(考功)의 등급을 올릴 적에 자신의 것을 스스로 기록하기를,

백성을 무육(撫育)하는 데 마음이 피로하고, 부세 독촉하는 정치는 졸렬하니撫字心勞 催科政拙, 고과(考課) 성적은 하하(下下)이다.”

하였다.

무육(撫育) :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잘 돌보아 사랑하여 기름.

관찰사가 판관(判官)을 보내어 부세를 독촉하였다. 판관이 주에 이르러 양성이 마중 나오지 않음을 괴상히 여겨, 아전들에게 그 까닭을 물었더니 아전은,

자사는 죄가 있다 하여 스스로 옥중에 갇혀 있습니다.”

하므로 판관이 놀라서 달려 들어가 뵙고는,

사또께서 무슨 죄가 있습니까?”

하였다.

양성은 관사 밖에서 자며 명을 기다리니 판관은 급히 떠나 버렸다.

 

번역문 출처 : 한국고전번역원(이정섭 역, 1986), 다산연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