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이나 궁궐에 가보면 처마 밑 단청은 모두 녹색의 기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런 궁궐의 단청을 볼 때마다 드는 의문이 있었습니다. 숭유배불 정책을 강력히 시행했던 조선이었는데 어떻게 궁궐과 사찰의 단청이 이렇게 차이가 없을까? 지금의 단청을 보면 사찰단청은 아무리 못해도 금단청이고 궁궐단청은 그보다 한 단계 낮다는 모로단청입니다. 물론 이에 대해서는 임진왜란 이후 호국불교의 절실함에서 시작된 불사 재건이 활발하게 진행되면서 사찰단청이 화려함을 더하여 극도로 화려한 금단청양식이 성립되어간데 반해, 전란으로 재원이 고갈되고 연이은 궁궐건축에 따른 부담으로 궁궐의 단청은 오히려 간소화의 방향으로 진행되었다는 설명이 있기는 합니다. 실제로 궁궐을 재건하면서 단청에 사용할 진채(원래 조선시대의 안료는 진채, 당채, 암채, 이채라 하여 광물질 무기염료를 사용하였는데 이것들은 대부분 중국에서 수입해오는 것들이었습니다)가 부족하여 공사가 중단된 예도 있었고 나중에는 궁궐단청에 진채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는 조치를 내리기도 하였습니다. 그렇다고는 하더라도 조선시대라면, 단청 등급의 문제 이전에 "감히 불교 건물의 장식이 임금 계시는 궁궐 건물 장식과 어떻게 똑 같을 수 있느냐?" 는 의식이 있었지 않았겠냐 하는 것입니다. 같은 색조에 유사한 문양을 사용하면서 사찰이 궁궐보다 더 화려하게 장식한다는 것이 숭유배불의 조선시대에 어떻게 가능한 일이었을지 의문이었습니다.
조선시대 궁궐단청은 선공감에서 맡아 수행하였는데 선공감에는 도채공이라는 단청화공이 있어 궁궐단청을 맡아 도색하였다고 합니다. 사찰은 사찰대로 별도의 화공집단이 있었고, 큰 절에는 자체적으로 최소 한 명의 단청공이 있어 단청뿐 아니라 사찰 안에서 필요한 불상이나 불화의 제작도 겸하였다고 합니다. 궁궐단청의 책임관청인 선공감에는 타직을 겸하는 종1품~종2품의 제조가 총 책임자이고 전속 관원도 정3품부터 줄줄이 있었습니다. 도채공이야 결정된 사항을 시행하는 중인이나 천민 출신의 기능공이었지만 어떻게 단청할지를 결정하는 사람은 유교국가인 조선의 관리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관리들이 궁궐단청이 사찰단청과 똑 같은 모양이 되도록 방치했을까? 궁궐이 사찰과 다르게 했든지 아니면 사찰에 지시를 내려 사찰단청이 궁궐단청과 유사한 형태가 되지 않도록 어떤 조치를 취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들이 줄을 이었습니다.
율곡 이이는 16살 때 어머니 신사임당의 죽음에 충격을 받아 3년 여묘살이를 마치고는 금강산에 있는 절에 들어가 1년을 보냅니다. 이 단순한 사건이 얼마나 큰 오점이었느냐 하면 율곡이 벼슬에 오른 뒤 스스로 상소를 올려 왕에게 이런 경력을 자진 신고할 정도였습니다. 조선을 대표하는 유학자 이율곡은 이 일로 그 후 무려 이삼백년 동안 기회가 있을 때마다 반대파들의 비난을 받았습니다.
18세기가 되면 내로라하는 분들의 명산유람 기록들이 등장합니다. 이분들이 등산복에 배낭 메고 산에 올랐을까요? 아니면 가죽신이나 짚신에 죽장 짚고 걸어 올라갔을까요? 이 분들 산에 올라갈 때는 그 산에 있는 절의 스님들이 가마에 태워서 모시고 올라갔습니다. 그런 가마타고 금강산까지 유람한 분들도 계십니다.
익히 아는 바처럼 조선시대에 승려들은 한양 사대문안 출입조차 금지되었고, 관아를 고쳐 짓거나 성을 쌓고 길을 닦는 것 같은 부역이 있을 때면 가장 먼저 동원되는 인력이 승려들이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그런 시대에 사찰의 단청이 궁궐의 단청과 유사하거나 더 장엄했다는 사실은 쉽게 납득이 안 가는 일입니다.
혹시 궁궐 단청이 어느 시기에 사찰 단청 형식으로 변절된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대한제국 멸망과 함께 궁궐의 단청을 담당하던 관리는 사라졌고 도채공들은 졸지에 일거리를 잃었습니다. 그 후로 우리 궁궐은 일제의 의도적인 훼손과 훼파의 수난을 겪습니다. 반면 대한제국 멸망 후에도 사찰은 건재했고 그 사찰들의 단청작업은 사찰 주관 하에 계속되면서 사찰단청의 명맥을 고스란히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찾아보면 우리나라 사찰단청의 계보를 이어온 스님들의 명단은 조선시대부터 최근까지 몇 십 명씩 주르르 나옵니다. 사찰단청의 특징에 대해서는 시대별로 구분까지 해놓을 정도로 자세합니다. 혹시 이런 과정에서 일제 강점기에는 의도적으로, 해방 후에는 문화재 보존에 대한 무지, 무관심과 업무상 편의에 의해 사찰단청 양식을 궁궐에도 적용하게 된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도 듭니다. 하지만 단청관련 책이나 글 모두가 궁궐단청은 형식상 목차만 있고 내용은 모두 뜬구름 잡는 이야기고 잘해야 현재의 단청에 대해 논하는 수준일 뿐 그 어디에도 궁궐단청의 세세한 내력에 대해 속 시원히 풀어주는 곳은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 몇 년 전 우연히 아래의 사진과 그에 딸린 기사를 보게 되었습니다.
충격이었습니다.
"90대 사진작가 김석배옹의 덕수궁 광명문 단청문양 복원을 요청하는 민원이 수년째 계속되고 있다.
지난 1947년 동양 최초 칼라 사진을 찍기 시작한 후 1956년경 덕수궁 광명문의 단청의 화려함을 보고
촬영해 두었는데 그 후 2008년 광명문 단청이 바뀌어있는 것을 보고 문화재청을 비롯 청와대, 감사원
등에 이 같은 사실을 알리고 증거 사진까지 보여 공개 했는데도 인정하려 들지 않는 행정기관에 변명만
돌아올 뿐 문화재의 단청을 망실하고 있다는 민원이다. 또 이런 저런 이유만을 들며 웅장하고 화려했던
단청이 아니라는 등, 그 시대 칼라 사진기가 없었다는 등, 단청 위원회에서 알아서 할 거리는 등의 적절치
못한 이유만을 내세우는 문화재청의 태도에 망연자실(茫然自失) 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문화재청은
지난해 1년여 동안 "망실문화재를 찾아주면 보상"하겠다는 팝업광고를 홈페이지에 게재했었다. 그러나
막상 궁능문화재 관련자들은 사실 여부를 확인도 하지 않은 채 변명과 무시로 일관하고 있는 한심한 작태를
보이고 있어 철저한 수사와 관리가 요구된다."1
궁금하던 의문에 대한 실마리를 찾은 기쁨보다 문화재청의 태도가 더 충격적이었습니다. 아직도 멀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광명문은 덕수궁의 고종황제 침전인 함녕전의 정문이었으나 일제강점기 때인 1938년 일제가 궁궐 안쪽 구석으로 옮겨 놓았습니다. 최근까지 국보인 물시계(자격루)와 신기전, 보물인 흥천사명 동종의 전시장 구실을 해왔는데 지난 6월 문화재청이 ‘광명문 제자리 찾기’ 기공식을 열고 복원 공사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제자리를 찾는 것만큼 제 모습을 찾는 것도 중요한데 과연 단청 문제는 어떻게 처리할지 궁금하지만 안 봐도 비디오가 될 것입니다.
[최근의 광명문]
[원래의 광명문 모습, 「대한제국고종황제국장화첩」 사진]
임진왜란 때 한성에 두 번째로 입성한 가토오(加騰淸正) 휘하의 부대에 종군했던 제구카(석시탁釋是琢)이라는
승려가 있었습니다. 그가 임진왜란 중 종군하면서 기록한『조선일기』에는 왜군이 한성에 입성 직후 경복궁을
직접 보고 적은 내용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글을 인정하면 그동안 유성룡의 <서애집>과 <선조수정실록>의
백성이 경복궁을 불태웠다는 기록을 부정하는 것이 되니까 이 글이 허구라고 거품을 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보지도 않은 것을 본 듯이 상세히 묘사했을 것이라고는 상상하기 어렵고, 그럴 이유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북산 아래 남향하여 자궁(紫宮: 경복궁)이 있는데 돌을 깎아서 사방벽을 둘렀다. 다섯 발자국마다 누가 있고
열 발자국마다 각(閣)이 있으며 행랑을 둘렀는데 처마가 높다. 전각의 이름은 알 수 없다. 붉은 섬돌로 도랑을
냈는데 그 도랑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른다. 정면에는 돌다리가 있는데 연꽃무늬를 새긴 돌난간으로 꾸며져
있다. 교각 좌우에는 돌사자 네 마리가 다리를 지키고 있다. 그 한가운데에는 돌을 다듬어 담을 쌓았는데
높이가 여덟 자이고 귀퉁이마다 방향을 맞추어 네 마리씩 열여섯 마리의 돌사자가 놓여 있다.
그 위에 자신, 청량 두 전당이 있다. 돌로 된 기둥 아래위에 용을 조각하였다. 지붕에는 유리기와를 덮고 잇단
기와 줄마다 푸른 용 같다. 서까래는 매단 나무인데 서까래마다 1대씩 풍경이 달렸다. 채색한 들보와 붉은
발에는 금과 은을 돌렸고 구슬이 주렁주렁 달렸다. 천장 사방 벽에는 오색팔채로 기린, 봉황, 공작, 난, 학, 용, 호
랑이 등이 그려져 있는데 계단 한가운데에는 봉황을 새긴 돌이 그 좌우에는 단학을 새긴 돌이 깔려 있다. 여기가
용의 세계인지 신선이 사는 선계인지 보통 사람의 눈으로는 분간할 수 없을 정도이다.”
[동궐도(東闕圖)2, 견본채색, 국보 제249-2호]
왜군 선봉장이었던 고니시유키나가(小西行長) 휘하의 장수 오오제키(大關)도 <조선정벌기(朝鮮征伐記)>
라는 전기를 남겼는데 한성 입성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5월 3일 술시(오후 8시) 조선의 도읍 동대문 안으로 진입, 거기서 황성(皇城)의 모습을 바라보니, 옥루금전
(玉樓金展) 늘어선 기와집, 널따란 성벽들의 조형미는 극치에 달하고 수천만 軒과 늘어선 대문들, 보귀로운
모습은 이루 말로 다할 길 없다. 그런데도 막아 싸우는 병사들은 보이지 않고 대문은 굳게 닫혀 있어 온통 적막하였다.“
이어 오오제키는 그가 처음 본 경복궁의 모습과 이를 본 왜군 장수들의 태도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습니다.
“내리(內裏)로 들어가 보니 궁전은 텅 비었고, 사대문은 제멋대로 열려 있었다. 그제야 전각을 자세히 살펴보니
궁궐은 구름 위에 솟아 있고 누대는 찬란한 빛을 발하여 그 아름다운 모습은 진궁(秦宮)의 장려함을 방불케
하였다.... 건물마다 문이 열려 있고 궁문을 지키는 자 없으니, 어디를 보아도 처량하기 그지없다. 그토록 용맹한
고니시도 천자(天子-암금)의 옥좌(玉座)에 절을 하고 신성하고 고아한 분위기에 휩싸여 두 눈에 눈물이 괴니
소오스시마, 아리마, 오무라도 따라서 눈물을 흘리었다.”
오오제키의 <조선정벌기(朝鮮征伐記)> 역시 소설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는데, 이게 소설이라면 침공군인
왜군의 선봉장과 그 휘하 장수들의 용맹을 더 과장할 일이지 조선왕의 보좌 앞에 절하고 우는 모습을 묘사했을
리는 만무하다는 생각입니다. 이에 대한 논란은 이 글의 주제가 아니므로 뒤로 하고, 왜군들이 그렇게 감탄했던
우리 옛 궁궐의 모습이 과연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궁궐의 모습인가? 그게 의문입니다.
[경복궁, 한국학중앙연구회 사진]
부족한 우리 궁궐 단청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져 하루 빨리 제대로 된 우리 문화의 복원이 이루어지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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