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금강산을 유람하실 때 <총석정에서 해돋이를 보고(叢石亭觀日出)>라는 시를 한 수 지으셨다.
판서 홍상한(洪象漢)1이 아들 집에서 그 시를 보고 놀라면서 말하기를, “지금 세상에도 이런 필력이 있었던가?
이는 거저 읽을 수 없다.”라고 하면서, 중국 붓 크고 작은 것 2백 개를 문객(門客)으로 하여금 갖다 주게 하여
정중한 뜻을 표하였다. 「과정록」
<총석정에서 해돋이를 보고(叢石亭觀日出)>라는 시는 ≪연암집≫에 실려 있지만 ≪열하일기≫에도 실려
있다. 연행 길에 동행들이 청돈대(靑墩臺)에 해 뜨는 구경을 가자고 청해왔지만 박지원은 조용히 잠을 자기
위해 사양하였다고 적었다. 그리고는 예전 총석정에서 해돋이 구경을 하고 지은 시라며 이 시를 실었다.
박지원 자신도 꽤 잘 지은 시라 자부했음이 틀림없다. 하지만 7언 70구(句)로 된 이 한시(漢詩)는 한자에
익숙하지 않은 우리들이 읽고 공감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운(韻)도 모르고 대구(對句)의 뛰어남도 알 수
없을뿐더러 골라 쓴 한자의 묘미나 함축하는 뜻도 잘 모르는 데다 한시의 감흥도 모르기 때문이다. 한글로
번역된 시를 보아도 그 뜻을 이해하는 것조차 쉽지 않은, 이 시의 시작은 이렇다.
길손들 한밤중에 서로 주고받는 말이
먼 닭이 울었는가? 아직 울지 않을 텐데
먼저 우는 먼 닭은 그게 바로 어디인가
의중에만 있는 거라 파리 소리처럼 희미하네.
해돋이 구경 가는 무리가 새벽에 깨어 닭이 울었는지를 서로 묻고 있는 상황의 묘사로 보이는 이 구절은 잔뜩
기대했던 시의 시작이라고 보기에는 전혀 대단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이 구절은 단순한 상황 묘사가 아니다.
『시경(詩經)』에 ‘닭이 우는 것이 아니라 파리 소리다(匪鷄則鳴 蒼蠅之聲)‘라는 구절이 있는데 ’현비(賢妃)가
임금이 조회에 늦지 않게 깨우려고 조바심하다가 파리 소리를 닭 우는 소리로 잘못 들었다‘는 내용이다.
박지원의 시는 혹시라도 해돋이 구경을 놓칠까봐 조바심하는 심정을 시경 구절에 의지하여 새롭게 표현한
것이다. 시경 구절을 알고 읽는 것과 모르고 읽는 것의 감흥은 천지차이이겠지만 구절을 이해하기에 급급한
수준에서는 감흥을 느낄 겨를조차 없어 홍상한이 가졌던 감흥을 기대하는 것은 난망이다. 우리에게 어려운
이 시의 마지막 구절은 이렇다.
아직은 바퀴처럼 둥글잖고 독처럼 길쭉한데 물을 빠져나오는데 출렁 소리 들리는 듯
만물의 두루 바라봄이 어제와 그대로라
어느 누가 두 손으로 번쩍 들어 올렸을까
마지막에서 두 번째 구절의 원문은 萬物咸覩如昨日인데 『주역』 건괘(乾卦)의 효사에 대한 공자의 풀이에
‘성인이 나타나시니 만물이 바라본다(聖人作而萬物覩)’라고 한 말에 의지하여 해를 성인(聖人)에 비유한 것이라 한다.
트윈 폴리오의 ‘하얀 손수건’이라는 노래가 있다. 70년대에 꽤나 유행했던 노래다.
‘헤어지자 보내온 그녀의 편지 속에 곱게 접어 함께 부친 하얀 손수건.
고향을 떠나올 때 언덕에 홀로 서서 눈물로 흔들어 주던 하얀 손수건....’
지금의 젊은이들은 이 노래의 감성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을까? 혹 이해는 할 수 있을지 몰라도 70년대에
이 노래를 즐겨 듣던 사람들의 감성을 공유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우리가 박지원의 시에 크게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것 역시 한시에 대한 이해의 부족과 함께 그 시대 감성에 대한 공감능력도 떨어지기 때문이리라.
옛사람들의 글이 그 당대에야 어찌 난해하고 모호했겠는가? 『서경(書經)』의 「요전(堯典)」과 「대우모(大禹謨)」, 『시경(詩經)』의 국풍(國風)과 아송(雅頌), 『주역(周易)』의 괘사와 효사, 『춘추(春秋)』의 여러 전(傳)들은 모두 당시의 금문(今文)이어서 그때 사람들은 다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후대로 올수록 그 뜻을 점점 알기 어렵게 되어 전(傳)·전(箋)·주(註)·소(疏)2 따위가 생겨나게 되었다.
요새 사람들은 이런 줄은 모르고 무조건 옛사람의 글을 본뜨고 흉내 내어 어렵고 난잡한 때깔을 부리면서도 스스로는 ‘간명하고 예스럽다’고 여기고 있으니 참 가소로운 일이다. 만약 남들이 자기 글을 읽고자 할 경우 그때마다 자기가 일일이 주석을 달아주어야 할 지경이라면 이런 글을 대체 얻다 쓰겠는가?“
「과정록」에 있는 박지원의 말이다. 하지만 위의 ‘叢石亭觀日出’ 은 박지원이 29세 때에 지은 시로
홍대용에게 쓴 편지에 고백한대로 ‘젊은 시절에는 과연 나도 허황된 명성을 연모하여, 문장을 표절하고
화려하게 꾸며서 잠시 예찬을 받고는 했지요’ 하던 때의 시일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인지 이 시 보다는
박지원이 ≪열하일기≫에 이 시를 올리기 전, 앞에 적은 글에 더 큰 감흥이 느껴진다.
........대체로 해가 돋을 때에 하늘에 구름기가 한 점도 없으면 해 뜨는 구경에는 좋을 성 싶지마는 이럴 때가
해돋이 구경으로서는 제일 몰풍정하다. 그저 둥그렇고 붉은 구리쇠쟁반 한 개가 바다에서 떠오른들 무엇이
가관스러울 것인가?
해는 원래 임금의 상이라고 한다. 요 임금을 해에 비겨 찬양하기를, “멀리 바라다보면 구름이요, 가까이 나아가
보면 해로다.”라고 하였다.
그러고 보니 해가 채 돋기 전에는 반드시 하고많은 구름이 해의 변두리로 모여들어 마치 해돋이 앞장을 서는
것 같기도 하고, 마치 해돋이 뒤를 따라서는 것 같기도 하고, 마치 수천수만의 수레와 말을 탄 군사가 옹위를 해
모시는 듯, 오색 깃발이 휘날리고 용틀임, 뱀 굽이를 쳐 한바탕 뒤흔든 위에야 비로소 장관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구름이 너무 많이 끼면 도리어 캄캄하도록 해를 가려 아무것도 볼 수가 없게 된다.대체로 날이 샐 녘에 밤에 몰렸던 음기가 태양의 직사를 한꺼번에 받고 나면 바윗돌 구멍에서는 구름을 뿜고
내와 못에서는 안개를 토하여 이것들이 서로 얽히고설켜 해가 방금 돋을까 말까 할 무렵은 원망을 하는 듯, 수심을 하는 듯, 흙더미 속에 잠긴 듯, 빛을 잃는 법이다.
(《열하일기》 1780년 7월 20일)
박지원의 고문(古文)과 금문(今文)에 대한 견해는 일관되고 요지부동이다. 정조의 질책에 반성하는 듯한
모습을 보인 것은 어디까지나 왕조 국가의 절대 권력자인 왕에 대한 예의로 몸을 낮춘 것이었을 뿐,
박지원의 본심은 아니었던 것 같다.
요즘 사람들은 당송 8대가(唐宋八大家)3의 문장을 배운다 하면서 그 정신과 이치는 터득하지 못하고,
거칠게 그 겉모습만을 배울 뿐이다. 그리하여 무릇 한 편의 글을 지을 때마다 문세(文勢)가 오르락내리락하게
하고, 이 구절 저 구절을 조응(照應)시키며 말을 여닫거나 마무리를 짓는 데 하나하나 힘을 쏟고 분명하게
본뜨고들 있으나, 설사 솜씨 있는 사람이 지은 글이라 할지라도 그리 좋아할 만한 게 못된다. 하물며 글 솜씨가
없는 사람은 그저 주제만을 언급하여 대충 얼버무리고 마니 더더욱 말할 나위도 없다. 옛사람들은 흉금이 넓고
학문이 깊어 글을 지을 때 분명하고 유창하며 법도 있고 아담하기만을 구하였을 뿐 작위적으로 안배(按排)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자연스럽게 문장이 이루어졌다. 후세의 비평가들은 단락을 나누고 구절을 분석하여 문장의
입체적 구성을 드러내 보여주고자 하는데, 이는 글을 쓴 옛 작가가 어느 대목에 정신을 쏟았는지를 제시하여
처음 글을 배우는 사람들을 인도하고 깨우쳐주므로 나쁠 것은 없다 하겠다. 그러나 옛사람이 붓을 잡아 글을
지을 때 그 마음속에 글 한 편에 대한 안배가 미리 갖추어져 있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옳지 않다.
고문(古文)을 배우려는 자는 자연스러움을 구해야 마땅하며, 자기 자신의 언어로부터 문장의 입체적 구성이
생겨나도록 해야지, 옛사람의 언어를 표절하여 주어진 틀에 메워 넣으려 해서는 안 된다. 바로 여기서 글이
난해한가 쉬운가 하는 차이가 생겨나며, 진짜인가 가짜인가가 결정된다. 고정된 하나의 틀로 천만 편의 똑같은
글을 찍어내는 게 바로 오늘날의 과문(科文)이다.
「과정록」
박지원은 좋은 글쓰기의 핵심은 스타일이 아니라, 말하고자 하는 바의 명확한 표현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언어로 표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박지원은 자신의 글 짓는 재주에 대하여는 겸손을 보이면서도 당시의
글에 대한 불만을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문장을 짓는 데 잘하는 것은 없고 사실을 기술하고 대상을 묘사하는 솜씨가 요새 사람들보다 조금 나을
뿐이다. 요새 사람들이 지은 비지(碑誌)4는 대개 판에 박은 듯하여 한 편의 글을 여러 사람에게 써먹을 수
있다. 그러니 대체 돌아가신 분의 정신과 모습을 어디서 떠올릴 수 있겠느냐?
그래서 삼연(三淵)공5께서는 ‘우리나라 사람들 문집은 상갓집 곡비(哭婢)의 울음소리와 같다‘6고 하신
것이다. 옛사람은, ’얼굴이 둥글면 모난 데를 그리고 얼굴이 기다라면 짧은 부분을 그린다‘7라고 했거늘,
사마천의 열전과 한유(韓愈)의 비문(碑文)이 읽을 만한 건 이 때문이다8. 지금 사람들은 이 뜻을 모르고
종이 가득히 진부한 말과 죽은 구절만 채워 넣고 있다. 그러면서 한다는 말이, ’이렇게 해야만 법도에 맞고
충실한 글이 된다’라고 한다. 나는 모르겠다. 이게 무슨 글 쓰는 법인지! 「과정록」
글에 대한 박지원의 이런 생각은 그가 지은 시에서도 볼 수 있다.
박지원의 형인 박희원(朴喜源)은 1787년 58세로 별세하여 9년 전에 먼저 연암골의 집 뒤에 묻혔던 형수와
합장되었다. 박지원은 형의 무덤을 찾았다가 슬픔을 이기지 못해 스스로 애도하기 위해 이런 시(詩)를 지었다.
我兄顔髮曾誰似 우리 형님 얼굴 수염 누구를 닮았나?
每憶先君看我兄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나면 우리 형님 봤었지
今日思兄何處見 이제 형님 생각나면 누굴 봐야하나?
自將巾袂映溪行 두건 쓰고 옷 입고 냇물에 비친 나를 보네.
(『연암집』 <연암에서 선형(先兄)을 생각하다>)
이덕무는 이 시를 읽고 눈물을 흘리며 “정을 표현한 말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게 해야 비로소
진실 되고 절실한 것이라 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덕무가 박지원의 시를 읽고 눈물 흘린 것이 두 번이었는데
그 처음은 박지원이 누님의 상여를 실은 배를 떠나보내며 읊은 시이다. 이 시는 ‘맏누님 증 정부인 박씨
묘지명9(伯姊贈貞夫人朴氏墓誌銘)’에 들어있다.
유인(孺人)10의 휘(諱)는 아무요 반남 박씨이다. 그 아우 지원(趾源) 중미(仲美)가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유인은 16세에 덕수(德水) 이택모 백규(李宅模伯揆)에게 출가하여 1녀 2남을 두었으며 신묘년(1771) 9월
초하룻날에 돌아갔다. 향년은 43세이다. 남편의 선산이 아곡(鵶谷)11에 있었으므로 장차 그곳 경좌(庚坐)12의
묘역에 장사하게 되었다.
백규13가 어진 아내를 잃고 난 뒤 가난하여 살아갈 방도가 없게 되자, 그 어린것들과 여종 하나와 크고 작은
솥과 상자 등속을 끌고서 배를 타고 가 협곡으로 들어갈 양으로 상여와 함께 출발하였다.
중미(仲美)14는 새벽에 두포(斗浦)15의 배 안에서 송별하고, 통곡한 뒤 돌아왔다.
아, 슬프다! 누님이 갓 시집가서 새벽에 단장하던 일이 어제런 듯하다. 나는 그때 막 여덟 살이었는데 버릇없이
드러누워 말이 땅에 몸을 비비듯 뒹굴면서 신랑의 말투를 흉내내어 더듬거리며 정중하게 말을 했더니, 누님이
그만 수줍어서 빗을 떨어뜨려 내 이마를 건드렸다. 나는 성이 나서 울며 먹을 분가루에 섞고 거울에 침을 뱉어
댔다. 누님은 옥압(玉鴨)과 금봉(金蜂)16을 꺼내 주며 울음을 그치도록 달랬었는데, 그때로부터 지금
스물여덟 해가 되었구나!
강가에 말을 멈추어 세우고 멀리 바라보니 붉은 명정(銘旌)17이 휘날리고 돛그림자가 너울거리다가 기슭을
돌아가고 나무에 가리게 되자 다시는 보이지 않는데, 강가의 먼 산들은 검푸르러 누님의 쪽 찐 머리 같고, 강물
빛은 거울 같고, 새벽달은 고운 눈썹 같았다.
눈물을 흘리며 누님이 빗을 떨어뜨렸던 일을 생각하니, 유독 어렸을 적 일은 역력할뿐더러 또한 즐거움도
많았고 세월도 더디더니, 중년에 들어서는 노상 우환에 시달리고 가난을 걱정하다가 꿈속처럼 훌쩍
지나갔으니 남매가 되어 지냈던 날들은 또 어찌 그리도 빨리 지나갔던가!
去者丁寧留後期 떠나는 이 정녕 다시 온다는 기약을 남기고 가도
猶令送子淚沾衣 보내는 이 눈물로 옷깃을 적시거늘
扁舟從此何時返 저 조각배 한번 가면 언제 돌아올까?
送子徒然岸上歸 보내는 이 헛되이 언덕 위에서 돌아가네.
(『연암집』 <맏누님 증(贈) 정부인 박씨 묘지명>)
참고 및 인용 : 열하일기(리상호 옮김, 2004, 보리출판사), 국어국문학자료사전(한국사전연구사)
나의 아버지 박지원(박종채 지음, 박희병 옮김, 1998, 돌베개), 연암집(신호열, 김명호 옮김, 2007, 돌베개),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고전용어사전(2001. 세종대왕기념사업회)
- 1701 ~ 1769, 대사간, 도승지, 대사헌과 형조, 예조, 병조의 판서를 지내고 판돈녕부사를 거쳐 판의금부사가 되어 세손(정조)의 사부를 겸하였다. 전라감사로 있을 때, 아들 홍낙명(洪樂命)이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하여 파직을 당하기도 하였다 [본문으로]
- 모두 경전에 대한 후세의 주석과 해설을 가리키는 말이다. 전(傳)은 경문(經文) 전체의 해설, 전(箋)과 주(註)는 경전에 대한 주석, 소(疏)는 이전의 주를 해설하거나 새로운 해석. [본문으로]
- 중국 당나라의 한유(韓愈), 유종원(柳宗元), 송나라의 구양수(歐陽修),소순(蘇洵), 소식(蘇軾), 소철(蘇轍), 증공(曾鞏), 왕안석(王安石) 등 8명의 산문작가 [본문으로]
- 묘비문과 묘지(墓誌)를 합하여 일컫는 말 [본문으로]
- 김창흡 [본문으로]
- 곡비는 옛날 양반집의 장례 때에는 상주를 대신하여 곡(哭)을 하던 계집종으로, 그 우는 소리가 판에 박은 듯 의례적적이고 진실성이 없음을 가리킴 [본문으로]
- 모원방사(貌圓方寫) 모장단사(貌長短寫). 청나라 화가 대창(戴蒼)의 말이라 한다 [본문으로]
- 사마천과 한유는 인물의 널리 알려진 행적을 지루하게 언급하는 대신, 잘 알려져 있지 않거나 사소하게 보이는 일화(逸話)를 통하여 인물의 개성과 본질을 드러내는 방식을 즐겨 썼다. [본문으로]
- 묘지명 : 죽은 이의 성씨와 벼슬, 고향 등을 기록하는 것을 ‘지(誌)’라 하고, 죽은 이를 칭송하는 글을 적은 것을 ‘명(銘)’이라 한다. 정방형의 두 돌에 나뉘어 새긴 뒤, 포개어 무덤 속에 넣는데 일반적으로 '지'는 전기체(傳記體) 형식이고 '명'은 시로 쓴다. [본문으로]
- 생전(生前)에 벼슬하지 못한 선비의 아내를 사후에 신주(神主)나 명정(銘旌)에 쓰던 존칭. [본문으로]
- 우리말로는 ‘까마귀골’. 지금의 경기도 양평군에 있었던 지명 [본문으로]
- 묏자리나 집터가 서남쪽을 등진 방향이나 자리 [본문으로]
- 이택모의 자(字) [본문으로]
- 박지원의 자(字) [본문으로]
- 지금의 동호대교 북단에 있던 ‘두뭇개’라는 나루터 [본문으로]
- 옥압은 오리 모양으로 새긴 옥비녀, 금봉은 금으로 벌 모양을 만들어 비녀 머리를 장식한 것. [본문으로]
- 죽은 사람의 관직과 성씨 따위를 적은 기. 일정한 크기의 긴 천에 보통 붉은 바탕에 흰 글씨로 쓰며, 장사 지낼 때 상여 앞에서 들고 간 뒤에 널 위에 펴서 묻는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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