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선조들

연암 박지원 7 - 벗 홍대용

從心所欲 2019. 11. 9. 14:14

 

아들 박종채가 「과정록」에 기록한 글들을 보면 박지원의 사람 사귐이 마냥 털털하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아버지는 어릴 적부터 말과 의론이 엄정하셨다. 겉으로만 근엄하고 속마음은 그렇지 못한 자나 권력의

부침(浮沈)에 따라 아첨하는 자들을 보면 참지 못하셨으니, 이 때문에 평생 남의 노여움을 사고 비방을

받는 일이 아주 많았다. 외삼촌 지계공(이재성)이 쓴 제문(祭文)에 이르기를,

 

가장 참지 못한 일은

위선적인 무리와 상대하는 일

그래서 소인배와 썩은 선비들이

늘 원망하고 비방했었지.

 

라고 하였으니 , 가히 아버지의 진면목을 드러냈다 할 만하다.

 

'위선적인 무리’로 번역된 글의 원문은 ‘향원(鄕愿)’이다. 향원(鄕愿)은 시세에 영합하면서도 점잖고 성실한듯이 행동하여 순박한 마을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는 부류를 말한다. 공자는「논어」에 "향원은 도덕의 적이다(鄕原 德之賊也)" 라고 했다.

맹자 또한 향원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 “그들은 말이 또 얼마나 번드르르한가! 말은 행동을 돌아보지 않고 행동은 말을 돌아보지 않으면서도 입만 열면 옛 성인을 운운한다. 그 행동은 또 얼마나 그럴듯한가! 사람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지금 세상을 위해 좋은 것이 좋은 것 아니냐는 태도로 은밀히 세상에 영합하는 자가 바로 향원이다."

 

아버지는 사람을 대하여 담소할 적에 언제나 격의 없이 말씀하셨다. 그러나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자리 중에 있어 말 중간에 끼어들기라도 하면 그만 기분이 상해 비록 하루종일 그 사람과 마주하고 앉았더라도 한마디 말씀도 나누지 않으셨다. 아는 사람들은 대부분 아버지의 그러한 태도를 단점으로 여겼다. 악을 미워하는 아버지의 성품은 타고난 것이어서 부하뇌동하거나 아첨하거나 거짓을 꾸미는 태도를 억지로 용납하지 못하셨다. 그리하여 한번 누구를 위선적이거나 비루한 자로 인정하시면, 그 사람을 아무리 정답게 대하려고 해도 마음과 같이 따라주지 않았다. 한번은 이런 말씀을 하셨다. 
“이것은 내 기질에서 연유하는 행동이라 고쳐보려고 한 지 오래지만 긑내 고칠 수 없었다. 내가 일생 동안 험난한 일을 많이 겪은 것은 모두 이 때문이었다.”       「과정록」

 

아버지는 삼청동의 백련봉(白蓮峯) 아래에 세들어 사셨는데1 그 집은 바로 대장(大將) 이장오2

별장이었다. 당시 손님들이 날마다 많이 찾아왔다. 매양 눈 오는 아침이나 비 오는 저녁이면 말을 나란히

탄 채 술병을 들고 찾아와 좀처럼 빈자리가 없었다. 아버지는 처음엔 글을 짓고 벗을 사귀는 일이 즐거워서

그러는 줄로만 알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조성의 벼슬아치들이 서로 자기 당파로 아버지를 끌어들이려

한다는 것을 아시게 되었다. 아버지는 이를 몹시 불쾌하게 여기셨고, 이후 초연히 세상에서 벗어나려는

뜻을 품으셨다.          「과정록」


 

박지원은 중년에 이르러 교유하는 벗이 더욱 적어졌다고 한다. 그런 가운데서도 담헌 홍대용과는 각별한 우의를

나누었다. 박지원이 홍대용을 처음 만난 것은 25세 때인 1761년으로, 홍대용이 1731년생으로 박지원보다 나이가

6살 위였지만 두 사람은 서로 공경하며 평생을 지기로 지냈다. 박지원은 연암골에 있을 때 홍대용이 보낸 편지에

답장하면서 벗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이렇게 털어 놓았다.

 

이 아우의 평소 교유가 넓지 않은 것도 아니어서, 덕망과 지체를 헤아려 모두 벗으로 허여한 터이지요.

그러나 벗으로 허여한 자 중에는 명성을 추구하고 권세에 붙좇는 혐의가 없지 않았으니, 눈에 벗은 보이지

아니하고, 보이는 것은 다만 명성과 이익과 권세였을 따름이외다. 그런데 지금 나는 스스로 풀숲 사이로

도피해 있으니, 머리를 깎지 않은 비구승이고 아내를 둔 행자승이라 하겠습니다. 산 높고 물이 깊으니, 명성

따위를 어디에 쓰겠는지요? 옛사람의 이른바 “걸핏하면 곧 비방을 당하지만, 명성 또한 따라온다”는 것 또한

헛된 말에 지나지 않습니다. 겨우 한 치의 명성만 얻어도 벌써 한 자의 비방이 이르곤 합니다. 명성 좋아하는

자는 늙어 지면 저절로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될 것이외다.

젊은 시절에는 과연 나도 허황된 명성을 연모하여, 문장을 표절하고 화려하게 꾸며서 잠시 예찬을 받고는

했지요. 그렇게 해서 얻은 명성이 겨우 송곳 끝만 한데 쌓인 비방은 산더미 같았으니, 매양 한밤중에 스스로

반성하면 입에서 신물이 날 지경이었답니다. 명(明)과 실(實) 사이에서 스스로를 나무라기에도 겨를이 없거늘

더구나 감히 다시 명성을 가까이 하겠습니까. 그러니 명성을 구하기 위한 벗은 이미 나의 안중에서 떠나버린

지 오래입니다.

이른바 잇속과 권세라는 것도 일찍이 이 길에 발을 들여놓아 보았으나, 대개 사람들이 모두 남의 것을 가져다

제 것으로 만들 생각만 하지 제 것을 덜어내어 남에게 보태주는 일은 본 적이 없었습니다. 명성이란 본디

허무한 것이요 사람들이 값을 지불하는 것도 아니어서, 혹은 쉽게 서로 주어 버리는 수도 있지만, 실질적인

이익과 실질적인 권세에 이르면 어찌 선뜻 자기 것을 양보해서 남에게 주려 하겠습니까. 그 길로 바삐 달려가는

자들은 흔히 앞으로 엎어지고 뒤로 자빠지는 꼴을 보게 마련이니, 한갓 스스로 기름을 가까이 했다가 옷만

더럽히는 셈입니다. 이 역시 이해를 따지는 비열한 논의라 하겠지만, 사실은 분명히 이와 같습니다. 또한 진작

형에게 이런 경계를 받은 바 있어, 잇속과 권세의 두 길을 피한 지가 하마 10년은 될 것입니다.

내가 명성, 잇속, 권세를 좇는 이 세 가지 벗을 버리고 나서, 비로소 눈을 밝게 뜨고 이른바 참다운 벗을

찾아보니 대개 한 사람도 없습니다. 벗 사귀는 도리를 다하고자 할진댄, 벗을 사귀기란 확실히 어려운가 봅니다.

그러나 어찌 정말 과연 한 사람도 없기야 하겠습니까. 어떤 일을 당했을 때 잘 깨우쳐 준다면 비록 돼지 치는

종놈이라도 진실로 나의 어진 벗이요, 의로운 일을 보고 충고해 준다면 비록 나무하는 아이라도 역시 나의 좋은

벗인 것이니, 이를 들어 생각하면  과연 이 세상에서 벗이 부족한 것은 아니지요. 그러나 돼지 치는 벗은

경서(經書)를 논하는 자리에 함께 참여하기 어렵고, 나무하는 벗은 빈주(賓主)가 만나 읍양(揖讓)하는3

대열에 둘 수는 없는 것인즉, 고금을 더듬어 볼 때 어찌 마음이 답답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산속으로 들어온 이래 이런 생각마저 끊어 버렸지만, 매양 덕조(德操)4가 기장밥을 지으라고 재촉할

적에5 아름다운 정취가 유유하였고, 장저(長沮)와 걸닉(桀溺)이 짝지어 밭을 갈 적에6 참다운 즐거움이

애틋했던 것을 생각하며, 산에 오르고 물에 다다를 적마다 형의 모습을 어렴풋이나마 그리워하지 않은 적이

없었답니다.

생각하건대 형은 벗 사이의 교제에 열렬한 성품을 지고 있는 줄 잘 알지만, 심지어 구봉(九峯) 등 여러

사람들이 하늘가와 땅 끝처럼 멀리 떨어진 곳에서 여러 사람을 거쳐 힘들게도 편지를 부쳐 오는 것은

‘천고의 기이한 일’이라 이를 수 있을 것입니다7. 그러나 이 생전, 이 세상에서는 다시 만날 수 없으니,

곧 꿈속과 다를 바 없어 실로 진정한 정취는 드물 것입니다. 혹시 우리나라 안에서 한 번 만나 보아 서로

거리낌 없이 회포를 털어놓을 수 있다면 천리를 멀다 아니 하고 찾아가고 말겠는데, 형도 이런 벗을 아직

만나 본 적이 없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영영 이런 생각을 가슴속에서 끊어 버렸는지요? 지난날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눌 때에도 이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었으므로, 지금 마침 한 가닥의 울적한 마음이

들어 우선 여쭙는 바입니다.      『연암집』홍덕보에게 답함 2(答洪德保書 第二)

 

[연행도(燕行圖)중 제13폭 〈유리창(琉璃廠)〉,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 소장]

 

[엄성이 그린 홍대용 초상화의 모사본, 원본은 소실되었고 엄성의 친구였던 주문조와 19세기에 청나라 나이지(羅以智)가 모사했다는 초상화가 전한다]

 

때로 “죽으면 무덤에 와서 울어줄 친구가 한 명은 있느냐?”는 느닷없는 질문을 주고받는 경우가 있는데 젊었을 때는 많다고 확신했던 그 수가 나이 들면서 점점 줄어들더니 언제인가부터는 있는지 없는지 확신조차 안 든다.

아마 박지원도 그런 생각을 했나보다. 영의정을 지낸 김수항(金壽恒)의 손자이면서 김창협(金昌協), 김창흡(金昌翕)의 조카이기도 했던 김용겸(金用謙, 1702 ~ 1789)이라는 인물이 있다. 우승지, 동지돈녕부사 등을 역임한 학자이자 문신으로 박지원보다 35살이나 나이가 많았지만 박지원, 홍대용과 자주 격의 없이 어울렸던 모양이다.

 

선배인 효효재(嘐嘐齋) 김용겸은 연세가 많고 덕이 높았다. 또한 대범하고 예스러워 예법으로 자신을 지켰다.

그러나 아버지와 담헌을 만나기만 하면 풍류가 넘치고 이야기가 진진했다. 늘 자신의 중부(仲父)인 농암

(農巖, 김창협)과 숙부인 삼연(三淵, 김창흡)의 언론과 풍채를 거론하며 아버지와 담헌을 격려했다.

효효재는 운치 있는 일이 있으면 즉시 아버지를 불러 함께 즐겼다. 자리 오른쪽에는 옛 경쇠 하나가 놓여

있었다. 그는 언제나 중국어로 관저(關雎)나 녹명(鹿鳴)과 같은 『시경(詩經)』의 시들을 읊었는데, 경쇠8

쳐서 가락을 맞추어 아버지에게 들려주었다.         「과정록」

 

[양금을 연주하는 국립국악원의 김천흥 악사, 한겨례음악대사전 사진]

 

아버지는 음률을 잘 분별하셨고 담헌공은 악률(樂律)에 대단히 밝으셨다. 하루는 아버지께서 담헌공의 방에

계시다가 들보 위에 양금(洋琴)9 여러 개가 있는 것을 보셨다. 중국에 간 사신이 귀국하면서 해마다 가지고 온

것인데, 당시 사람들 중에는 그것을 연주할 줄 아는 자가 아무도 없었다. 아버지는 시중드는 사람에게 그것을

풀어 내려 보라고 하셨다. 담헌이 웃으며, “곡조를 모르는데 뭘 하시려오?”하자, 아버지는 작은 나뭇조각으로

쳐보면서, “거문고를 가져와보세요. 줄을 따라 대조해가며 쳐보아 음이 어울리는지 확인해봅시다.”라고 하셨다.

몇 차례 해보자 가락이 과연 들어맞아 어긋나지 않았다. 이로부터 양금이 비로소 세상에 성행하게 되었다.

당시 거문고를 잘 연주하던 음악가로 김억(金檍)10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 호가 풍무자(風舞子)였는데,

효효재가 붙여준 것이었다. 새로 조율한 양금을 즐기기 위해 이 사람과 함께 담헌의 집에 모였다. 고요한 밤에

음악이 연주되었다. 마침 효효재가 달빛을 받으며 우연히 왔다가 생황과 양금이 번갈아 연주되는 걸 들으셨다.

공은 마음이 즐거워 책상 위의 구리 쟁반을 두드리며 가락을 맞추어 『시경』의 ‘벌목(伐木)’장(章)을

읊으셨는데 흥취가 도도했다. 잠시 후 공이 일어나 나가더니 한참 있어도 돌아오시지 않았다. 나가서

찾아봤지만 공은 보이지 않았다.

담헌이 아버지에게 말했다.

“우리가 감히 법도를 잃어 어르신을 가시게 한 모양이구려.”

두 분은 함께 달빛을 받으며 공의 댁을 향해 걸었다. 수표교(水標橋)11에 이르렀을 때다. 바야흐로 큰 눈이

막 그쳐 달이 더욱 밝았다. 공은 무릎에 거문고 하나를 비낀 채 갓도 쓰지 않고 다리 위에 앉아 달을

바라보고 계신 게 아닌가. 그래서 다들 몹시 기뻐하며 술상과 악기를 그곳으로 옮겨와 공을 모시고

놀다가 흥이 다한 뒤에야 헤어졌다.

아버지는 언젠가 이 일을 말씀하시며.

“효효재께서 돌아가신 뒤 다시는 이런 운치 있는 일이 없었다.”고 하셨다.         「과정록」


 

 

참고 및 인용 : 연암집(박지원 지음, 신호열, 김명호 옮김, 2007, 돌베개),

나의 아버지 박지원(박종채 지음, 박희병 옮김, 1998, 돌베개),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1. 31세 때인 1767년의 일로 그 다음 해에는 백탑이 있는 대사동(大寺洞)으로 이사했다. 대사동은 지금의 공평동, 인사동 일원이다. [본문으로]
  2. 이장오(李章吾)는 영조 때에 금위대장과 훈련대장을 지냈던 무신이다. [본문으로]
  3. 주인과 빈객이 읍을 하며 자리에 먼저 오르기를 사양하여 존경과 겸양을 나타내는 것 [본문으로]
  4. 후한(後漢)말의 사마휘(司馬徽, 173 ~ 208) [본문으로]
  5. 사마휘는 후베이(湖北)성 양양(襄陽) 일대에 은거하던 은사(隱士)인 방덕공(龐德公)보다 열 살 아래였다. 사마휘가 어느 날 방덕공의 집을 찾았는데 방덕공이 출타하고 없자, 그 부인에게 기장밥을 지으라고 재촉하여 방덕공의 처자들이 분주히 상을 차려준 고사(古事)를 말하는 것으로 서로 격의 없는 사귐을 비유 [본문으로]
  6. 논어에 “장저와 걸닉이 김을 매며 밭 갈고 있을 때 공자가 지나가다가 자로를 시켜 나루터를 물어보게 하였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인물들로, 춘추시대 말기 초나라의 은자(隱者)들을 일컫는다. [본문으로]
  7. 구봉(九峯)은 홍대용이 1765년 연경에 갔을 때 유리창(琉璃廠)에서 만나 결의형제를 맺은 청나라 선비 엄성(嚴誠)의 형이다. 연암집에 실려 있는 ‘홍덕보 묘지명’에는 이들의 교류에 대해 더 상세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2년 뒤인 1767년, 홍대용은 엄성이 죽었다는 부고를 받고 애사(哀詞)를 지어 향(香)을 예물로 함께 보냈는데, 그것이 엄성의 집에 전달된 날이 바로 엄성의 대상(大祥)날 이어서, 제사에 모인 이들이 ‘지극한 정성으로 혼령을 감동시킨 결과’라며 경탄하였다. 엄성의 아들이 아버지의 유집을 홍대용에게 보냈는데 돌고 돌아 9년 만에 홍대용이 받게 되었다. 거기에는 엄성이 손수 그린 홍대용의 초상화와 함께 엄성이 죽기 전에 홍대용이 선물한 조선 먹을 꺼내 향내를 맡고 가슴에 얹은 채 죽어, 그 먹을 관에다 함께 넣었다는 소식도 전해졌다. [본문으로]
  8. 옥이나 돌, 또는 놋쇠로 만든 타악기 [본문으로]
  9. 서양에서 전해온 현악기라는 뜻으로, 18세기에 유럽에서 청나라를 통해 들어와 ‘구라철사금(歐邏鐵絲琴)’이라고도 하였으며 주로 민간의 정악연주에 사용되었다 [본문으로]
  10. 한겨례음악대사전에 영조 때의 양금명인으로 소개되고 있다 [본문으로]
  11. 조선시대 지금의 청계천 2가에 있었던 석교(石橋)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