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원은 1771년에 이덕무, 백동수 등과 어울려 송도, 평양을 거쳐 묘향산 등 명승지를 두루 유람한 일이
있었는데 이때 연암골을 처음 만나게 된다. 박지원의 아들 박종채는 이때의 일을「과정록」에 이렇게 기록했다.
아버지께서 개성을 유람하시다가 연암골이라는 땅을 발견하셨다. 당시 백동수(白東脩, 1743 ~ 1816)1의 어린
청지기 김오복이 아버지를 모시고 따라갔었다. 연암골은 황해도 금천군에 속해 있었고 개성에서 30리 떨어진
두메산골이었다. 고려 때 목은(牧隱, 이색)과 익재(益齋, 이제현) 등의 여러 어진 이가 그곳에 살았지만 후에는
황폐해서 사는 이가 없었다.
처음에 아버지는 화장사(華藏寺)2에 오르셨는데 동쪽으로 아침 해를 바라보니 산봉우리가 하늘에 꽂힌
듯하였다. 별천지가 있겠다 싶어 백군과 함께 가보았다. 초목이 우거지고 길이 나 있지 않아 겨우 시냇물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니 기이한 땅이 나타났다. 언덕은 평평하고 산기슭은 수려했으며 바위는 희고 모래는
깨끗했다. 그리고 검푸른 절벽이 깎아지른 듯이 있는데 마치 그림병풍을 펼쳐놓은 것 같았다. 시냇물은 맑아
속이 비쳤고 너럭바위는 판판하였는데 그 한가운데에 평평하고 잡초 우거진 빈터가 널찍하여 집을 지어
살 만하였다. 마침내 이곳에 은거하기로 마음을 정하시고 연암(燕巖)이라 자호(自號)하셨다.
[화장사 대웅전]
[개성과 황해도 금천군]
연암골에 대한 설명은 박지원이 담헌(湛軒) 홍대용(洪大容, 1731 ~ 1783)의 편지에 대해 답을 한 ‘홍덕보에게
답함3 4(答洪德保書 第四)’이란 글에 더 자세히 나와 있다.
이 아우가 산골짜기로 들어와 살려고 마음먹은 지가 벌써 9년이나 되었습니다. 물가에서도 잠자고 바람도
피하지 않고 밥 지어 먹으며, 아무 것도 없이 두 주먹만 꽉 쥐었을 뿐이라, 마음은 지치고 재주는 서투르니
무엇을 이루어 놓았겠습니까? 겨우 돌밭 두어 이랑에 초가삼간을 마련했을 뿐입니다. 가파른 비탈과 비좁은
골짜기에는 초목만 무성하여 애초부터 오솔길도 없었지만, 골짜기 입구에 들어서고 나면 산기슭이 다
숨어버리고, 문득 형세가 바뀌어 언덕은 평평하고 기슭은 야트막하여 흙은 희고 모래는 곱고 깨끗합니다.
평평하고 특 트인 곳에다 남쪽을 향하여 집터의 형국을 완전히 갖추었는데, 그 집터가 지극히 작기는 하지만
서성대며 노닐고 안식할 공간이 그 가운데 모두 갖추어졌답니다. 집 앞 왼편으로는 깎아지른 듯한 푸른
벼랑이 병풍처럼 벌여 있고, 바위들은 깊숙이 텅 비어 저절로 동굴을 이루매 제비가 그 속에 등지를 쳤으니,
이것이 바로 연암(燕巖, 제비바위)입니다.
집 앞으로 100여 걸음 되는 곳에 평평한 대(臺)가 있는데, 대는 모두 바위들이 겹겹이 쌓여 우뚝 솟은 것으로
시내가 그 밑을 휘돌아 오니 이것을 조대(釣臺, 낚시터)라 한답니다. 시내를 거슬러 올라가면 울퉁불퉁한
하얀 바위들이 마치 먹줄을 대고 깎은 듯하여, 혹은 잔잔한 호수를 이루기도 하고 혹은 맑은 못을 이루기도
하는데 노는 물고기들이 제법 많습니다. 매양 석양이 비치면 물에 반사된 그림자가 바위 위까지 어른거려,
이를 엄화계(罨畵溪)4라 합니다. 산이 휘돌고 물이 겹겹이 감싸 사방으로 마을과 두절되어 있어, 큰길로 나가
7~8리를 가야만 비로소 개 짖는 소리와 닭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답니다.
지난가을부터 불러 모은 이웃도 현재 서너 가구에 지나지 않는데, 귀신같은 몰골로 무슨 소리인지 지절지절
대며 오로지 숯 굽는 일에만 종사하고 농사는 짓지 않으니, 깊은 계곡에 사는 오랑캐가 호랑이와 표범을
이웃삼고 족제비나 다람쥐를 벗 삼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 험하고 동떨어짐이 이와 같은데도
마음속으로 한번 이곳을 좋아하게 되자 어떤 곳과도 바꿀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미 집 뒤에다 형수님의
묘까지 썼으니 영영 옮기지 못할 땅이 되었습니다. (후략)
홍대용에게 보낸 편지의 말미에 언급된 형수님은 박지원보다 7살 위인 형 박희원(朴喜源)의 아내 이씨(李氏)다.
16세에 시집와서 어린 시동생 박지원을 잘 돌보아주었을 뿐 아니라 어려운 집안 살림을 맡아 많은 고생을 했다.
박지원은 형과 형수를 부모처럼 섬겼다고 한다. 「과정록」에는 “형수 이공인(李恭人)5은 하도 가난을 많이
겪은지라 몸이 대단히 수척했으며 때로 우울함을 풀지 못하였다. 아버지는 한결같이 온화한 얼굴과 좋은
말로써 그 마음을 위로해드렸다. 매양 무엇을 얻으면 그것이 비록 아주 하찮은 것일지라도 당신 방으로
가져가지 않고 반드시 형수께 공손히 바쳤다.”고 박지원이 형수를 극진히 대하던 모습을 그렸다.
그런 형수가 몇 해 동안의 병고 끝에 1778년 55세의 나이로 졸하자 박지원이 그 묘지명(墓誌銘)을 지었는데,
박지원이 연암에서 꿈꾸던 삶에 대한 이야기로 생전 병중의 형수를 위로했던 일을 기록했다.
일찍이 공인을 마주하여 말하기를.
“우리 형님이 이제 늙었으니 당연히 이 아우와 함께 은거해야 합니다. 담장에는 빙 둘러 뽕나무 천 그루를 심고,
집 뒤에는 밤나무 천 그루를 심고, 문 앞에는 배나무 천 그루를 접붙이고, 시내의 위와 아래로는 복숭아나무와
살구나무 천 그루를 심고, 세 이랑 되는 연못에는 한 말의 치어(穉魚)를 뿌리고, 바위 비탈에는 벌통 백 개를
놓고, 울타리 사이에는 세 마리의 소를 매어 놓고서, 아내는 길쌈하고 형수님은 다만 여종을 시켜 들기름을
짜게 재촉해서, 밤에 이 시동생이 옛사람의 글을 읽도록 도와주십시오.” 했다.
공인은 이때 비록 병이 심했으나, 자기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머리를 손으로 떠받치고 한 번 웃으며 말하기를,
“이는 바로 나의 오랜 뜻이었소!” 하였다.
그래서 같이 오기를 밤낮으로 간절히 바랐던 터인데, 심어 놓은 곡식이 익기도 전에 공인은 이미 일어나지
못하게 되었다. 마침내 관(棺)에 담겨 돌아와서 그해 9월 10일에 집의 북쪽 동산 해좌(亥坐)의 묘역에
장사하였으니, 공인의 생전의 뜻을 이뤄 드리고자 해서였다.6
박지원은 35세이던 1771년부터 연암골에 은거할 생각을 갖고 있었지만 실제로 연암골로 처음 들어간 것은
그로부터 8년 뒤인 1778년으로 바로 형수 공인이씨가 돌아간 해였다. 그러나 자의로 은거하기 위하여 들어간
것이 아니라 일종의 도피였다. 박지원이 연암골로 들어가게 된 사연을 「과정록」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무술년(1778)에 세상을 피해 가족을 이끌고 연암골로 들어가셨다. 유공(兪公)7은 아버지와 우정이 아주
깊었다. 그리하여 난처한 일이 있을 때마다 아버지를 찾아와 의논하곤 했다. 공(公)은 아버지의 의론이
준엄하고 과격해 권세가의 비위를 거스르는 내용이 많다고 깊이 주의를 주셨다. 하루는 공이 조정에서 돌아와
수심에 잠겼다가 밤에 아버지를 찾아왔다. 공은 아버지의 손을 잡고 탄식하며 이렇게 말했다.
“자네는 어쩌자고 홍국영(洪國榮)의 비위를 그토록 거슬렸는가? 자네에게 몹시 독을 품고 있으니 어떤 화가
미칠지 알 수 없네. 그가 자네를 해치려고 틈을 엿본 지 오래라네. 다만 자네가 조정 벼슬아치가 아니기 때문에
짐짓 늦추어온 것뿐이지. 이제 복수의 대상이 거의 다 제거됐으니 다음 차례는 자넬 걸세. 자네 이야기만
나오면 그 눈초리가 몹시 험악해지니 필시 화를 면치 못할 것 같네. 이 일을 어쩌면 좋겠나? 될 수 있는 한 빨리
서울을 떠나게나.”
아버지는 평소 의론이 곧고 바르며 명성이 너무 높았던 게 화를 부른 원인이라고 스스로 생각하셨다.
마침내 아버지는 자취를 감추어 은둔하고자 하셨다. 그리하여 가족을 거느리고 연암골로 들어가 두어 칸의
초가집을 지어 사셨다.
당시는 정조가 즉위한 지 만 2년이 안 된 때로 홍국영이 도승지 겸 궁궐 숙위소(宿衛所)의 대장이자 훈련대장,
금위대장 등을 겸임하고 있던 때였다. 홍국영을 거치지 않으면 국정의 주요 사안도 정조에게 보고되기조차
힘들 정도로 당대 최고의 실권자였다. 정조는 즉위 직후 ‘국영과 갈라서는 자는 역적’이라고 말할 정도로 그에
대한 두터운 신임을 나타냈었다.
그런 홍국영(洪國榮, 1748 ~ 1781)이 일개 야인에 불과한 박지원을 왜 못마땅하게 여겼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우선은 홍국영이 판서 홍낙성(洪樂性)을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원수로 지목했는데, 홍낙성이
평소 박지원을 아끼고 사랑했기 때문이라는 설이다. 이에 백동수도 박지원을 찾아와 “홍낙성이 사도세자의
원수로 지목됐으니 홍낙성이 위태로운 참이면 어르신을 그냥 놔두겠습니까?”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후
홍낙성이 정조 치세 때에 별다른 문제없이 좌의정이 되고, 사은사로 청나라에 다녀오고, 영의정에까지 오른
것을 보면 홍국영이 홍낙성을 사도세자의 원수로 지목했다는 말이 사실인지 의심된다.
두 번째로는 박지원이 정조의 즉위를 반대했던 노론 벽파(僻派)에 속했기 때문이라는 설이다. 그러나 후에
노론 벽파의 실력자이자 젊었을 때 친구였던 심환지(沈煥之)와 정일환(鄭日煥) 등이 찾아와 박지원을 자파로
끌어 들이려 했지만 그때마다 번번이 말귀를 못 알아듣는 척을 하며 그들을 헛걸음 시킨 것을 보면 개연성이
낮아 보인다. 박지원의 집안이 할아버지 박필균 때부터 '신임의리(辛壬義理)'를 중히 여긴 노론이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이후 벽파의 의론에 동조했다는 정황은 나타나지 않는다. 또한 홍국영이 세도를 잡고 있을 때는 아직
시파니 벽파니 하는 호칭 조차도 없었을 때이다.
세 번째로는 홍국영이 정조에게 소생이 없다는 이유로 자신의 누이동생을 정조의 후궁으로 들여보냈는데
박지원이 이를 부당하다고 상소하여 홍국영의 미움을 받았다는 설이다. 그러나 이 또한 확인되지 않은 설로
세상일, 특히 정치에 관여하지 않으려했던 박지원의 삶을 보면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개인적 생각이지만 혹 홍국영이 박지원의 문명(文名)에 대해 개인적 질투심을 가졌던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이다. 홍국영은 1772년(영조 48) 25세 때 과거에 급제한 뒤 예문관원(사관)이 되고 동궁을 보좌하는
춘방(春坊)사서(司書)를 지냈다. 홍국영은 자신이 글을 잘한다고 자부했던 인물로, 실제로도 글에 재치가 있고
예리하면서도 자연스럽다는 평가를 받았었다. 평소에도 자부심이 높았던 홍국영이 일국 최고의 실권자 자리에
오르고 보니 과거에 급제하지도 못한 박지원이 글로 세상의 명성을 얻은 것이 눈꼴사나울 수도 있었을 것이다.
박지원 스스로 ‘명성이 너무 높았던 게 화를 부른 원인’이라고 말한 것도 바로 그런 사정을 에둘러 말한 것이
아닌가 하는 짐작이다.
참고 및 인용 : 연암집(박지원 지음, 신호열, 김명호 옮김, 2007, 돌베개), 나의 아버지 박지원(박종채 지음,
박희병 옮김, 1998, 돌베개),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 조선 후기의 무관으로 1790년 이덕무, 박제가와 함께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를 편찬하는데 참여하여, 직접 기예를 시험해 보이면서 편찬 작업을 감독하는 역할을 맡았다. 박지원,·이덕무, 박제가 등과 깊이 교유하여 학문에도 높은 성취를 이루었고, 서예에도 능해 전서(篆書), 예서(隸書)를 특히 잘 썼다고 전해진다. 할아버지가 서자 출신이라 서얼신분이었다. 그 또한 나중에 가족을 거느리고 강원도 인제의 기린협(麒麟峽) 산골짜기로 이주했다. [본문으로]
- 북한 개성시 용흥리 보봉산(寶鳳山)에 있는 고려전기 이전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는 사찰 [본문으로]
- 덕보(德保)는 홍대용의 자(字) [본문으로]
- 염화(罨畵)는 채색화(彩色畵)라는 뜻 [본문으로]
- 공인(恭人)은 5품 관직자의 부인에게 주어지는 호칭 [본문으로]
- 연암집, ‘형수 공인 이씨 묘지명(伯嫂恭人李氏墓誌銘)’ [본문으로]
- 유언호(兪彦鎬, 1730 ~ 1796) : 1761년(영조 37)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다음 해 한림회권(翰林會圈)에 선발된 이후 주로 사간원 및 홍문관의 직책에 있다가 이조참의, 평안감사, 우의정, 좌의정 등을 역임하였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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