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기슭에 가려 아직도 백탑은 보이지 않는다. 말을 채찍질하여 수십 보를 못 가서 겨우 산기슭을 벗어나자
눈앞이 아찔해지며 눈에 헛것이 보일만치 벌어진 광경이 어마어마했다. 나는 오늘에야 비로소 사람이란 본시
어디고 붙어 의지하는 데가 없이 다만 하늘을 이고 땅을 밟아 제 신대로 다니게 마련임을 알았다. 말을 멈추고
사방을 휘둘러보다가 나도 모르게 손을 들어 이마에 대고 말했다.
“한바탕 울만한 자리로구나!”
박지원이 드넓은 요동벌판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내뱉은 말이다.
好哭場 可以哭矣.
“곡하기 좋은 곳이다. 가히 울만하구나!”
생전 처음 접한 광경에 이런 특이하고도 기품있는 감탄사를 낼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평소에 쌓은
학식과 오랜 사고의 훈련이 없다면 불현듯 입에서 터져 나올 수 있는 감탄사가 아니다.
가당치도 않다는 동행의 반응에 박지원이 쏟아낸 ‘울음[哭]’에 대한 열변은 그가 평소에 비록 사소한 일에도
얼마나 많은 생각을 갖고 살았는지를 보여준다.
정진사가 “천지간에 이런 넓은 시야가 펼쳐지는데 별안간 새삼스럽게 울 생각을 하다니요?”
하기에 내가 말했다.
“그렇지 않소. 옛날부터 영웅은 잘 울고, 미인들은 눈물이 많았다지마는 불과 두어 줄기 소리 없는 눈물이
옷깃을 적실뿐이요. 아직까지 그 울음소리가 쇠나 돌에서 짜 나온 듯하고 하늘과 땅 사이에 가득 찰 만한
소리는 들어 보질 못했소. 사람들이 안다는 것이 다만 칠정(七情) 가운데 ‘슬픈 감정[哀]’만이 울음을 자아내는
줄만 알지, 칠정이 모두 울음을 자아내는 줄은 모르고 있소. 기쁨이 극에 다다르면 울게 되고, 노여움도 극에
다다르면 울게 되고, 즐거움도 극에 다다르면 울게 되며, 사랑도 극에 이르면 울게 되고, 미움도 극에 이르면
울게 되고, 또 극히 원하면 울 수 있으니, 맺힌 감정을 한번 활짝 푸는 데는 소리쳐 우는 것보다 더 빠른 방법이
없소.
울음은 천지간의 우레와 비견할 수 있을 것이오. 북받쳐 나오는 감정은 언제나 이치에 맞아 우러나오는 것이니
웃음만 하더라도 그러한 감정의 발로인 것이요. 사람들이 이러한 지극한 감정을 겪어 보지 못하고 보니,
공연히 까다롭게 칠정으로 나누어 ‘슬픈 감정’에다가 울음을 꼭 맞추어 둔 것뿐이오. 이러므로 사람이 죽어
초상이 나면 즉시 억지로라도 “아이고!”하고 부르짖게 되는 것이요. 정말로 칠정에 느낀바, 지극한 감정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는 참소리는 천지 사이에 참고 눌리고 쌓이고 맺혀서, 감히 펴낼 수가 없는 법이라오...
(후략)“1
박지원은 글 쓰는 사람에게는 네 가지 어려움이 있다고 하였다.
“첫째 근본이 되는 학문을 갖추기 어렵고, 둘째 공정하고 맑은 안목을 갖추는 게 어려우며, 셋째 자료를 총괄하는
역량을 갖추기가 어렵고, 넷째 분명하고 명쾌한 판단력을 갖추는 게 어렵다, 그래서 재주, 학문, 식견, 이 셋
가운데 하나라도 결여되면 제대로 된 저술을 할 수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흔히 박지원의 학문을 물질과 경제를 풍요롭게 하여 삶의 질을 높일 것을 주장하는 이용후생지학
(利用厚生之學) 학풍의 북학파(北學派)라고 단순하게 설명한다. 「과정록(過庭錄)」에는 아들이 본 아버지의
학문세계를 기록한 글이 있다.
아버지는 타고난 성품이 호방하고 고매했으며, 명예와 이익이 몸을 더럽힐까봐 극도로 경계하고 삼가셨다.
중년에 과거시험을 단념하자 사귀는 벗도 또한 많지 않아 오직 담헌(湛軒) 홍대용2, 석치(石癡) 정철조3,
강산 이서구가 수시로 서로 왕래하였으며,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이 늘 따라 어울리며 배웠다.
담헌공은 아버지보다 여섯 살 위였으며 학식이 정(精)하고 깊었다. 공(公) 또한 과거공부를 그만두었으며,
조용히 수양하며 지내셨다. 공은 아버지와 도의(道義)의 사귐을 맺어 우정이 돈독하였다. 하지만 두 분이
공경하는 말과 호칭을 사용함은 처음 사귈 때와 똑같았다. 아버지는 늘 우리나라 사대부들이 대부분
이용후생학(利用厚生學)4, 경세제국학(經世濟國學)5, 명물도수학(名物度數學)6 등의 학문을 소홀히
한다는 점, 그리하여 잘못된 지식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으며 그 학문이 몹시 거칠고 조잡한 점을 병통으로
여겨왔다. 담헌공의 평소 지론도 이와 같았다.
그래서 매번 만나면 며칠을 함께 지내며, 위로 고금의 치란(治亂)과 흥망에 대한 일로부터 옛사람들이
벼슬에 나아가거나 물러날 때 보여준 절의(節義), 제도의 연혁(沿革), 농업과 공업의 이익 및 폐단, 재산을
증식하는 법, 환곡(還穀)을 방출하고 수납하는 법, 지리, 국방, 천문, 음악, 나아가 초목(草木), 조수(鳥獸),
문자학, 산학(算學)에 이르기까지 꿰뚫어 포함하지 아니함이 없었으니 모두가 외워 전할 만한 내용이었다.
정조의 명을 받아 집필하여 올린 <이방익의 일을 기술하다(書李邦翼事)>를 보면 그의 박식함에 새삼 다시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방익이 제주에서 떠내려가 도착한 곳은 대만에서 서쪽으로 약 50km 떨어져 있는
64개의 크고 작은 현무암 섬으로 이루어진 팽호제도(澎湖諸島, 펑후제도) 중 하나인 팽호도(澎湖島)이다.
박지원은 이 팽호에서 북경까지 이방익이 지나온 73개 지역을 특정하고 지명만으로는 어떤 곳인지 모를
정조를 위하여 곳곳에 고증을 덧붙였다. 또한 글 앞머리에 이방익의 아버지 역시 바다를 건너다 표류하여
일본의 장기도(長崎島, 나가사키)에 이른 일이 있었던 사실을 기록한 뒤 이어 제주도에 대해서도 고증하였다.
제주는 옛날의 탐라(耽羅)입니다. 「북사(北史)」에 이르기를 ”백제에서 남쪽으로 항해하면 탐모라(耽牟羅)라는
나라가 있는데 그 땅에는 노루와 사슴이 많으며 백제에 복속하였다“라 했고, 또 이르기를 ”고구려 사신 예실불
(芮悉弗)이 위(魏)나라 선무제(宣武帝)에게 말하기를 ‘황금은 부여에서 나고 옥은 섭라(涉羅)에서 산출되는데
지금 부여는 물길(勿吉)에게 쫓겨났고 섭라는 백제에게 합병이 됐으므로, 이 두 가지 물품은 그 때문에 올리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하였습니다. 「당서(唐書)」에 이르기를 ”용삭(龍朔)초에 담라(澹羅)가
있었는데 그 왕 유리도라(儒理都羅)가 사신을 보내 입조(入朝)했다. 나라는 신라 무주(武州) 남쪽 섬에 있는데
풍속이 박루(樸陋)하여 개가죽 옷을 입고 여름에는 혁옥(革屋)에서 살고 겨울에는 움집에서 생활한다.
처음에는 백제에 복속되었으나 후에 신라에 복속되었다“ 하였습니다.
살펴보건대, 이는 다 탐라를 가리킵니다. 우리나라 말에 도(島)를 ‘섬’이라 이르고 국(國)을 ‘나라’라
이르는데 탐(耽), 섭(涉), 담(澹) 세 음(音)은 모두 ‘섬’과 유사하니 대개 섬나라라는 뜻입니다.
옛 기록에 일컬은 바, “처음에 탐진(耽津)에 배를 정박하고 신라에 조회했기 때문에 ‘탐라’라 한다”고
한 것은 견강부회의 설입니다.
(중략)
또한, 제주는 옛날에 ‘탁라(乇羅)’라고도 불렀으며 한 문공(文公, 한유)은 ‘탐부라(耽浮羅)’라 불렀습니다.
이른바 ‘둔라(屯羅)’라는 것은 ‘탁라(乇羅)’의 와전입니다. 천수(天授)‘는 고려 태조의 연호이니 『고려사』에
“천수 20년에 탁라 도주(島主)가 내조(來朝)하여 왕이 작(爵)을 내렸다”는 것이 바로 그 실례입니다. 송나라
사람이 이를 당나라 측천무후(則天武后)의 연호로 본 것은 더욱 틀린 것으로서, 제주 사람이 중국에
표류되어 들어간 것은 예로부터 있어 온 일입니다. (후략)7
박지원은 이 <書李邦翼事>를 “팽호에서 대만까지는 수로(水路)로 2일이요, 대만에서 하문까지는 수로로
10일이며, 하문에서 복건성성(福建省城)까지는 1600리요, 복주(福州)에서 연경까지는 6800리요, 연경에서
우리 국경 의주까지는 2070리이며, 의주에서 서울까지는 1050리이고, 서울에서 강진까지는 900리입니다.
탐라에서 북으로 강진까지와 남으로 대만까지의 수로는 계산에 넣지 않는다 하더라도 도합 1만 2400리의
여정이 됩니다.”라고 끝을 맺었다.
아버지는 책 읽는 속도가 매우 느려서 하루에 한 권 이상 읽지 못하셨다. 아버지는 늘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기억력이 썩 좋지 못하다. 그래서 책을 읽다가 덮으면 곧바로 잊어버려 머릿속이 멍한 게 한 글자도
남아 있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어떤 일을 처리해야 하거나 글제목을 정해 놓고 이리저리 글을 구상할 때면
처음에는 읽은 내용이 하나씩 떠오르다가 종국에는 줄줄이 쏟아져 나온다. 그래서 옛사람의 지나간 행적이나
선배들의 격언가운데 눈앞의 정경에 어울리는 것들을 죄다 활용하여 이루 다함이 없었다.”
지계공(芝溪公)8은 언젠가 이런 말씀을 하셨다.
“연암은 책을 매우 더디게 보아서 내가 서너 장 읽을 때 겨우 한 장밖에 못 읽었다. 또 암기 능력도 나보다 조금
못한 것 같았다. 그렇지만 읽은 글에 대해 이리저리 논하거나 그 장점과 단점을 말할 때에는 엄격한 관리가
옥사(獄事)를 처결할 때처럼 조금도 빈틈이 없었다. 그제야 나는 공이 책을 느리게 보는 것이 철저하게 읽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다.”9
아버지는 젊을 때부터 벗들과 모여 글 짓고 술 마시며 질탕하게 노는 일이 꽤 있었다. 사람들은 이를 두고
아버지가 번화함을 좋아하며 몸단속하기를 싫어한다고 평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아버지는 기실 그 타고난
성품이 물욕이 없으셔서, 한가롭게 지내며 고요히 앉아 이치를 궁구하고 관찰하기를 퍽 좋아하셨다.
연암골에 계실 때의 일이다. 아버지는 하루 종일 대청에서 내려오시지 않는 날도 있었고, 간혹 사물을
응시하며 한참 동안 묵묵히 말이 없으시기도 하였다. 당시 아버지는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지극히 미미한 사물들, 이를테면 풀, 꽃, 새, 벌레와 같은 것도 모두 지극한 경지를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이들에게서 하늘의 묘한 이치를 엿볼 수 있는 것이다.”
아버지는 매양 시냇가의 바위에 앉으시기도 하고, 나직이 읊조리며 천천히 산보하시다가 갑자기 멍하니
모든 것을 잊은 것 같은 모습을 하시기도 했다. 때때로 묘한 생각이 떠오르면 반드시 붓을 들어 적어두셔서
잔글씨의 종잇조각이 상자에 가득 찼다. 아버지는 그것을 시냇가에 있던 집에 간직해두며 말씀하시기를,
“훗날 다시 고치고 다듬어 조리를 세운 다음 책으로 만들어야지.”라고 하셨다.
훗날 아버지는 벼슬에서 물러나10 연암골에 다시 들어가 당시의 글들을 꺼내보셨는데 이미 눈이 너무
어두워져서 잔글씨를 알아보실 수 없었다. 아버지는 슬퍼 탄식하시며 말씀하셨다.
“안타깝구나! 벼슬살이 10여 년에 좋은 책 하나를 잃어버리고 말았구나.”
이윽고 또 이렇게 말씀하셨다.
“세상에 도움도 되지 않고 사람 마음만 어지럽힐 테지.”
마침내 시냇물에 세초(洗草)11해버리게 하셨다.
슬프다! 우리들이 그때 곁에 모시고 있지 못한 탓에 그 글들을 챙기지 못했다.12
참고 및 인용 : 나의 아버지 박지원(박종채 지음, 박희병 옮김, 1998, 돌베개), 열하일기(박지원 지음 리상호 옮김,
2004, 보리출판사), (연암집(박지원 지음, 신호열, 김명호 옮김, 2007, 돌베개),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 열하일기 ‘도강록(渡江錄) 初八日甲申 晴 중에서 [본문으로]
- 홍대용(洪大容, 1731 ~ 1783) [본문으로]
- 정철조(鄭喆祚, 1730 ~ 1781), 1774년 증광시를 거쳐 통덕랑(通德郞)과 사간원정언, 사헌부지평을 지냈고 역법(曆法)과 서학(西學)에 뛰어났으며 기중기와 도르래, 맷돌, 수차(水車) 같은 기계는 물론이고 천문기구들을 직접 설계해 제작하기도 했다. [본문으로]
- 활의 도구를 잘 이용하여 백성의 삶을 풍족하게 하는 데 주안을 두는 학문 [본문으로]
- 세상을 경륜하고 나라와 백성을 다스리는 방안을 연구하는 학문, 오늘날의 정치학, 경제학, 사회학 등 [본문으로]
- 수학, 물리학, 생물학, 천문학 등을 포함하는 학문 [본문으로]
- 연암집(박지원 지음, 신호열, 김명호 옮김, 2007, 돌베개) [본문으로]
- 박지원의 처남인 이재성. 지계(芝溪)는 이재성의 호 [본문으로]
- 과정록(過庭錄) [본문으로]
- 순조1년인 1801년 양양부사를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본문으로]
- 종이를 물에 헹구어 먹으로 쓴 글씨를 없애는 일 [본문으로]
- 과정록(過庭錄)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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