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선조들

연암 박지원 1 - 조선의 대문호

從心所欲 2019. 10. 22. 19:06

 

정조는 치세 당시 문풍(文風)이 예스럽지 못하고 소설이나 패관잡기 등에서 사용되는 자유분방한 패사소품체

(稗史小品體)가 성행하는 것을 두고 그 원인이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1737 ~ 1805)과 그가 지은

≪열하일기(熱河日記)≫의 죄라고 지적하였다. 정조는 명말청초(明末淸初) 중국 문인들의 문집에서 사용되는

문체를 배격하고 순정(醇正)한 고문(古文)의 문풍을 회복하고자 하였다. 정조가 생각하는 좋은 문체란

전한(前漢)시대에 사마천이 쓴 『사기(史記)』나 후한(後漢)의 반고가 쓴 『한서(漢書)』같은 문체, 한대(漢代)

이전의 형식을 제창하여 산문 문체를 개혁한 당나라의 한유나 고문운동(古文運動)을 제창했던 당나라 유종원

같은 문체였다. 정조로서는 나라를 다스리는 입장에서 국가의 기강을 바로 세우려는 노력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글을 쓰는 창작자의 입장에서는 2,000년 가까운 옛 방식을 답습하고 모방해야한다는 것은 견딜 수 없는

고통일 수밖에 없다. 명나라와 청나라에서 새로운 문체가 탄생하여 유행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이미

그들조차도 고문(古文)이라는 전통적 한문문체에 진력이 나있음을 방증하는 결과였다.

 

[청황제의 여름 피서산장인 열하행궁. 중국여유국 사진]

 

[열하행궁]

 

박지원의 둘째 아들 박종채(朴宗采, 1780 ~ 1835)는 「과정록(過庭錄)」이란 책을 지어 아버지 박지원의

언행과 가르침을 기록했다. 이 책을 ‘나의 아버지 박지원’이라는 이름으로 번역하여 출간한 서울대

국문학과 박희병 교수는 책머리에서 ‘영국에 세익스피어가, 독일에 괴테가, 중국에 소동파가 있다면

우리나라에는 박지원이 있다’고 했다. 또한 박지원이 우리나라 중세기 최고의 대문호(大文豪)라고도 했다.

 

정조가 굳이 박지원을 지목하여 거론한 것도 따지고 보면 그의 글이 그만큼 세간의 관심을 얻은 때문이었다.

문풍을 바로 세우는데 모법이 되어야 할 홍문관, 예문관의 관리들이 박지원의 글을 들여다 읽는 상황이었으니

정조의 걱정도 그만큼 컸을 것이다. 1793년 1월, 정조는 직각(直閣)1 남공철을 통하여 박지원에게 보낸

편지에서 “속히 순수하고 바른 글을 한 부(部) 지어 올려 ≪열하일기≫로 인한 죄를 씻는다면 음직(蔭職)으로

문임(文任)벼슬을 준들 무엇이 아깝겠느냐?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무거운 벌을 내릴 것이다.”고 했다.

‘문임(文任)’은 홍문관(弘文館)과 예문관(藝文館)의 제학(提學)을 이르는 말로 임금의 교서(敎書) 또는

외교문서를 맡아 보는 종2품의 관직이다. 음직(蔭職)은 과거를 거치지 않고, 다만 부조(父祖)의 공으로 하는

벼슬로 대개 실무와는 관계없는 명목상의 벼슬, 그것도 8 ~9품의 하위직이 주어지는 것이 상례다. 그런데

박지원을 왕 자신의 대외문서를 맡아보는 임무, 그것도 당상관의 자리를 아깝지 않다고 하였으니 정조도

박지원의 글 실력은 크게 인정하고 있던 셈이다.

그래서 박지원의 주변 인물들 중에는 “임금님께서 ≪열하일기≫를 거론하신 것은 기실 노여워하여 하신

말씀이 아니라 장차 파격적인 은총을 내리시려는 것”이라며 박지원에게 속히 글을 지어 임금에게 바칠 것을

종용했다. 그러나 박지원은 이렇게 말했다.

 

“임금님의 이번 분부는 참으로 전무후무한 은총이오. 임금님께서 ≪열하일기≫의 문체가 잘못 되었다고 하여

죄를 주셨으니 신하된 도리로서 그 죄를 받는 것이 마땅하오. 견책을 받은 몸이 새로 글을 지어 올려 자신의

글이 바르다고 자처하면서 이전의 잘못을 덮으려 해서야 쓰겠소? 더구나 잘못을 반성하고 바른 글을 지어

바치면 음직으로 문임(文任) 벼슬을 주는 것도 아깝지 않다고 하신 것은 스스로 반성하는 길을 열어주신

것이거늘, 만일 이에 편승해 우쭐하여 글을 지어 바친다면 이는 바라서는 안 될 것을 바라는 것입니다.

바라서는 안 될 것을 바라는 것은 신하된 자의 큰 죄라오. 그래서 나는 새로 글을 지어 바치지는 않을 것이며,

예전에 지은 글 몇 편과 안의(安義)2에 와 지은 글 몇 편을 뽑아 서너 권의 책자로 만들어두었다가 임금님께서

또다시 글을 지어 올리라는 분부를 내리시면 그때에 가서나 분부를 받들어 신하의 도리를 다할까 하오.”

 

박지원의 이런 뜻은 6년 뒤에야 실현될 수 있었다. 1799년 정월, 정조는 농업을 권장하여 농서(農書)를 구한다는 

윤음(綸音)3을 내려, 관찰사와 수령들로 하여금 농사에 관한 글을 지어 바치게 하였다. 이에 박지원은 과거 황해도

금천군 연암골(燕巖峽)에 가족을 데리고 들어가 살던 때에 여러 농서를 읽으며 상자에 가득하도록 이 책 저 책에서

발췌해놓았던 글에다 자신의 견해를 덧붙이고, 중국에 갔을 때 견문한 것 가운데 우리나라에 시행할만한 것들을

추가하여 14권의 책을 엮었다. 그런 뒤 책 이름을 「과농소초(課農小抄)」라 짓고, 따로 지은 「한민명전의(限民名田議)」4를 부록으로 붙여 왕에게 올렸다.

후에 정조는 신하들과 말을 주고받는 자리에서 이 책을 두고 “요즘 경륜을 펼친 좋은 책을 얻어 소일하고 있다”고 하면서 “농서대전(農書大全)은 박지원으로 하여금 편찬케 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또한 규장각 신하들 앞에서도 박지원의 책에 대하여 여러 차례 칭찬하고는, 과거시험 합격여부만으로 인재를 등용하는 제도가 몹시 편협한 것을 지적하기도 하였다.

 

정조는 직접 박지원에게 글을 짓도록 분부를 내리기도 하였다.

1790년 금성도위(錦城都尉) 박명원(朴明源, 1725 ∼ 1790)이 죽자 “신도비(神道碑)는 내가 친히 쓸테니 그 조카

종악(宗岳)에게 명하여 행장을 짓게 하고 묘지명은 박지원으로 하여금 쓰게 하라”고 하였다.

박명원은 영조의 셋째 딸인 화평옹주(和平翁主)와 결혼하여 금성위로 봉해졌는데, 평소 몸가짐에 절도가 있고

검소하여 영조에게 큰 사랑을 받았던 인물이다. 1780년 청나라 건륭제의 70회 생일 축하사절단의 정사(正使)로

가면서 자제군관(子弟軍官) 자격으로 팔촌 동생인 박지원을 북경에 데리고 갔던 장본인이기도 하다.

1793년 남공필을 통하여 문체를 지적한 편지를 보낸 지 얼마 안 된 1월 25일에 이덕무(李德懋, 1741 ~ 1793)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자 정조는 내탕금(內帑金)5에서 5백냥을 하사하여 그의 유고(遺稿)를 간행하게 하면서 

그의 행장(行狀)은 특별히 박지원에게 명하여 지어 올리게 하였다.

 

박지원이 61세 때인 1797년 7월, 충청도 면천(沔川)의 군수로 임명되었는데, 먼저 대궐에 들어와 임금을

알현하고 그 뒤에 사은(謝恩)6하라는 특명을 받았다. 박지원이 어전에 나아가자 정조가 박지원에게 물었다.

“내가 지난번에 문체를 고치라고 했는데 과연 고쳤느냐?”

이때 정조의 묻는 말씀이 ‘정중하셨다’고 했는데, 이 질문은 박지원을 힐문하려는 것이 아니라 정조의 박지원에 대한

애정과 친근감의 표현으로 보여진다.

이에 박지원은 엎드려 아뢰었다.

“성스러운 분부에 황공하여 아뢰지 못하옵나이다.”

그러자 정조는 웃으면서 말했다.

“내가 최근에 좋은 글감 하나를 얻었다. 너를 시켜 좋은 글 한 편을 짓게 하려 한 지 오래다,”

그리고는 제주 사람 이방익(李邦翼)이 바다에 표류한 일의 전말을 박지원에게 자세히 들려주었다. 이방익은

1784년, 무과에 급제한 무신으로 그가 충장장(忠壯將)7으로 있을 때인 1796년 9월 제주에서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다가 풍랑을 만나 표류한 끝에 중국의 복건성(福建省)의 한 섬에 다다라 대만으로 갔다가 중국

내륙지방인 절강(浙江), 북경(北京), 요동벌판을 거쳐 이듬해 윤6월, 정조가 박지원을 만나기 얼마 전에

한양으로 돌아와 임금을 뵌 일이 있었다.8 

정조는 박지원에게 “잘 들었느냐?”고 물은 뒤 “내가 이방익과 나눈 말을 기록한 초고가 그 날 입시(入侍)했던

승지한테 있을 것이다. 그걸 면천에 내려보내도록 하겠으니 너는 한가한 때 좋은 글을 지어 바치도록 해라”고

분부했다. 이에 박지원은 이방익이 정조에게 아뢴 말을 기록한 초고를 참조하여 조목조목 고증을 더하여

<이방익의 일을 기술하다(書李邦翼事)>라는 글을 지어 정조에게 바쳤다.

 

이서구(李書九, 1754 ~ 1825)가 좌승지로 있을 때, 박지원에게 편지를 보내 “양호(楊鎬)와 형개(邢玠)9

제사지내라는 임금님의 분부가 계셨습니다. 임금님께서는 저더러 제문(祭文)을 지어 올리라 하셨지만,

공무 때문에 도무지 겨를이 없으니 50운(韻)의 제문 두 편을 대신 좀 써주셨으면 합니다.”라는 부탁을 해왔다.

말이 몹시 간절하고 다급해보여 박지원은 이서구의 부탁대로 제문을 지어 보냈다. 뒤에 이서구는 “당시

임금님께서 은밀히 분부를 내려 박아무개에게 글을 지어 올리게 하셨습니다.”라고 이 일이 정조의 분부에

의하여 이루어진 일이었음을 밝혔다.

 

[淸 화가 姚文瀚, 張廷彦 외 <만국래조도(萬國來朝圖)> 1761년, 322×210cm, 북경고궁박물원]

 

[<만국래조도>부분확대, 위에 조선 사절단이 보인다. 1761년으로 박지원이 갔을 때는 아니다]

 

≪열하일기≫에 대해서는 박지원을 싫어하는 부류들이 세간에 여러 가지 근거 없는 비난을 퍼뜨렸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악의적인 것은 책 속에 청나라의 연호가 등장한다고 ‘오랑캐의 연호를 사용한 글(虜號之稿)’이라는 비난이었다. 당시의 사대부들은 명(明)이 망한지 150년이 가까운 그 때에도 존명양이(存明攘夷)사상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연호를 쓸 때는 이미 없어진 나라인 명의 연호를 계속 사용하고 있었다. 세간에 ≪열하일기≫에 대한 말이 오가자 박지원은 탄식하며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중년 이후 세상일에 대하여 마음이 재처럼 되어 점차 골계(滑稽)10를 일삼으며 이름을 숨기고자 하는 뜻이 있었으니, 말세의 풍습이 걷잡을 수 없어 더불어 말을 할 만한 자가 없었다. 그래서 매양 사람을 대하면 
우언(寓言)과 우스갯소리로 둘러대고 임기응변을 했지만, 마음은 항상 우울하여 즐겁지가 못했다. 
그러나 중국에 다녀온 이후 그 견문한 사실 가운데 자못 기록할만한 것이 있어서 연암골에 왕래할 때 늘 붓과 
벼루를 가지고 다니면 행장(行裝) 속에 든 초고를 꺼내 생각나는 대로 적어나갔다. 늙어 한가해지면 심심풀이 삼아 읽을까 해서였다. 그리하여 쓴 글을 수습해 몇 권의 책으로 만들었는데, 애초 후세에 전하려고 시작한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 누가 알았겠느냐? 책을 절반도 집필하기 전에 벌써 남들이 그걸 돌려가며 베껴 책이 널리 
유포될 줄을. 이미 회수할 수도 없게 된 거지. 처음에는 심히 놀라고 후회하여 가슴을 치며 한탄했지만, 
나중에는 어쩔 도리 없어 그냥 내버려둘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책을 구경한 적도 없으면서 남들을 따라 
이 책을 헐뜯고 비방하는 자들이야 난들 어떡하겠느냐?”

 

그런 세간의 말들이 부담스러워서인지 박지원은 ≪열하일기≫에 열하에서 북경에 돌아온 이후의 행적에 대해 집필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의 아들 박종채는 ≪열하일기≫가 실상은 미완의 책이라고 했다.

 

박지원의 처남이면서 평생의 지기(知己)이자 문우(文友)였던 이재성(李在誠, 1751 ~ 1809)은 박지원에게

이런 내용의 편지를 보낸 일이 있다. 

 

“공의 글은 필력이 높고 굳세지만 자구(字句)에 있어서 그리 고문(古文)을 본뜬 것은 아니외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서 어찌 공의 글을 명청(明淸)의 소품(小品)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들이 그런 오해를
하는 건 공의 글 가운데 고문의 법도에 맞는 글은 미처 얻어보지 못한 채 일세(一世)에 유행한 ≪열하일기≫만을 
아는 때문이지요. 공이 자중자애하지 않고 거리낌없이 해학과 풍자를 일삼아 진중하지 않은 점은 있다 할지라도 어찌 심약하고 유약하기 짝이 없는 최근 문사들의 글과 같겠습니까? 그러니 공의 글을 배운 까닭에 오늘날의
문풍이 이렇게 되어버렸다고 말한다면 이는 정말 억울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제 생각으로는 우스갯소리만
찾아내어 없애버린다면 ≪열하일기≫의 책이 바로 순수하고 바른 글일 거외다.”

 

하지만 박지원이 ≪열하일기≫에 우스갯소리를 집어넣은 이유가 있었다. ‘중국의 풍속이 다름에 따라 보고

듣는 게 낯설었으므로 인정물태(仁情物態)를 곡진히11 묘사하려다 보니 부득불 우스갯소리를 집어넣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참고 및 인용 : 나의 아버지 박지원(박희병 옮김, 1998, 돌베개),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1. 규장각에 속한 정3품에서 종6품까지의 벼슬을 가리키는 말로, 남공철은 당시 종6품이었다. [본문으로]
  2. 오늘날의 경상남도 함양 지역의 옛 지명으로 당시 박지원은 안의현(安義縣)의 현감(縣監, 종6품)으로 있었다. [본문으로]
  3. 왕이 신하나 백성에게 내리는 말 [본문으로]
  4. 토지 소유의 상한선을 정하고, 상한선 이상의 토지매점을 금하는 내용의 토지 개혁안을 다룬 글 [본문으로]
  5. 임금의 개인 재산을 관리하는 내탕(內帑)의 돈 [본문으로]
  6. 사은숙배(謝恩肅拜)의 줄임말로, 관료에 처음 임명된 자가 궁중에서 임금에게 국궁사배(鞠躬四拜)하여 왕의 은혜에 감사함을 표시하는 것을 말함. 동반(東班) 9품과 서반(西班) 4품 이상의 관직에 임명된 자는 그 다음날 대전(大典), 왕비전(王妃殿). 세자궁(世子宮)에 가서 사은숙배(謝恩肅拜)하였고, 승진하거나 겸직(兼職) 발령을 받은 경우와 출장이나 휴가를 가거나 돌아왔을 때에는 임금에게만 사은숙배하였다. (한국고전용어사전) [본문으로]
  7. 조선시대에 군공(軍功)을 세운 사람, 국가에 많은 곡식을 바친 사람, 전사(戰死)한 사람들의 자손으로 편성하였던 군대인 충장위(忠壯衛)의 장(將). 1614년(광해군 6)에 창덕궁 입직(入直) 군사 수가 부족해 충장위 군사로써 각 문(門)의 파수에 충당하도록 하였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충장위는 임진왜란 이후에 설치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본문으로]
  8. 이방익이 이때의 일을 국문으로 적은 장편 기행가사(紀行歌辭)인 ‘표해가(漂海歌)’가 있다 [본문으로]
  9. 두 사람은 임진왜란 때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조선을 도운 명나라 병부상서와 장수로 1598년(선조 31)에 도성 안에 선무사(宣武祠)라는 사당을 지어 이들을 제향하기 시작했다. [본문으로]
  10. 보통 '우스꽝스러움'으로 번역되는데 웃음을 자아내는 문학의 모든 요소에 폭넓게 적용되는 개념으로, 골계는 그 하위범주로 기지, 풍자, 반어, 해학 등을 포괄한다.(문학비평용어사전) [본문으로]
  11. 곡진히(曲盡-) : 매우 자세하고 간곡하게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