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선조들

정조 16 - 친민(親民)·치국(治國)

從心所欲 2020. 7. 9. 18:20

【나라의 안위는 민심에 달려 있다. 백성이 편안하면 윗사람을 가까이 하고 수고로우면 윗사람을 원망하는 법이다. 방백(方伯)이나 수령(守令)된 자들이 '백성을 어지럽히지 않는다(不擾民)'는 세 글자를 염두에 둔다면 기근에 흉년이 든 해라도 그 마음이 결코 흩어질 리가 없으니, 이와 같으면 태평의 기반이 되지 않는 날이 없을 것이다.】

 

 

【나라를 다스리는 일은 백성을 사랑하는 데서 벗어나지 않는데 한번 당론(黨論)이 갈린 뒤로 조정에서는 오직 언의(言議)의 가부(可否)만을 일로 간주하고 백성의 근심과 나라의 계책은 우선 한쪽에 놓아두고 있으니, 이 어찌 나라를 위해 깊이 생각하는 도리겠는가. 사대부가 조정에 서서 임금을 섬기면서 백성과 만물을 사랑하는 데 뜻을 두었다면 이와 같아서는 안 될 것이다.】

▶언의(言議) : 사람들 사이에서 전(傳)하여 들리는 말

 

 

【백성이 아니면 임금이 누구와 나라를 다스리겠는가. 그래서 임금은 백성을 하늘로 삼는다고 하는 것이다. 백성은 먹을 것이 아니면 살아나갈 수가 없다. 그래서 백성은 먹을 것을 하늘로 삼는다고 한다. 진실로 나의 하늘을 두려워하고 백성의 하늘을 중히 여긴다면 백록(百祿)을 떠맡고 하늘에 천명(天命)이 영원하기를 비는 것이 이에 기초할 것이다.】

▶백록(百祿) : 온갖 복록(福祿)

 

 

【어떤 이들은 근래 장리(長吏)의 탐욕스러운 풍조가 몇 해 전에 비하여 조금 덜하다고 하는데, 내 생각으로는 비록 몇 해 전처럼 멋대로 행하고 거리낌 없이 하였던 것처럼은 못 한다 해도 비루하고 인색하여 각박하게 수탈해서 백성들에게 절실한 폐단이 되는 것은 몇 해 전에 비하여 도리어 더 심해졌다. 이 때문에 수령을 차임하여 보낼 때마다 내 마음이 근심스러워 지나쳐버릴 수가 없다.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지역에 있어 한 곳이라도 적임자를 얻지 못한다면 아, 저 구덩이에 나뒹구는 백성들을 내가 구덩이에 밀어 넣은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장리(長吏) : 지방의 수령(守令)과 조세의 징수와 역역(役役)을 담당했던 각 고을의 향리(鄕吏)인 호장(戶長)과 아전(衙前).

 

 

【오늘날 방백과 수령들이 번번이 백성의 습속이 미워할 만하여 다스리기 어렵다고 한다. 백성의 습속이 참으로 미워할 만하다. 그러나 고을의 우두머리가 된 자가 능히 청렴하게 스스로를 지키고 백성들을 아끼고 보살피면서 부리는 것인가? 이와 같이 하였는데도 백성들이 능멸하여 범한다면 죽여도 애석할 것이 없다.

그러나 혹 침탈하여 어지럽히고 끊임없이 징수한다면 윗사람이 이미 먼저 잘못한 것이니, 저 아래에 있는 자들이 어찌 아무 말 않고 잠잠하게 있으려 하겠는가. 능멸하여 업신여기는 습속은 통렬히 다스리지 않으면 안 되지만 고을 우두머리들이 스스로 초래한 바이니, 어찌 무식한 백성들에게 책임 지우겠는가.】

 

 

【북관(北關)에 기근이 들자 어사(御史)를 보내어 위로해 타이르고 진휼하여 구제하게 하였다. 어사가 떠날 때 임금이 이렇게 하교하였다.

"북로(北路) 수만 명 백성의 목숨이 그대의 몸에 지워져 있다. 반드시 성실히 하고 반드시 공경히 하여 지극한 뜻을 저버리지 말라.

예전에 우리 선왕께서는 진휼을 감독할 사람을 보낼 때마다 측은해하는 말씀을 하며 눈물을 줄줄 흘리셔서 듣고 있던 신하 가운데 감격하여 울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내가 우러러 목도하였던 바로서 지금까지도 감히 잊지 못한다. 나는 백성을 위하는 정성이 이미 위로 하늘의 마음을 감격시키기에 부족하여 이러한 거듭된 기근을 불러왔다. 또 말로 하교하는 데 익숙지 않아 연석에 임하여 그대에게 명하지만 그대의 마음을 감동시킬 수가 없다. 하물며 북쪽 백성의 마음을 감격시켜 그들로 하여금 믿고 두려워하지 않아 각기 안도하게 하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나의 고심(苦心)은 말로 다 할 수 없으니, 그대는 공경히 하라."】

 

 

【임금이 춘당대(春塘臺)에서 관예(觀刈)를 시행하였다. 내시로 하여금 벼를 뜰에서 말리게 하였는데, 밭 사이에 떨어진 이삭과 낟알을 하나하나 줍도록 명하였다. "여름날 밭 갈며 도롱이 입는 고통을 멀리서 생각할 때 어찌 낟알 하나라도 땅에 버려지게 해서야 되겠는가."】

▶관예(觀刈) : 국왕이 적전(籍田, 왕이 농경의 시범을 보이기 위해 의례용으로 설정한 토지)에서 곡식을 베는 광경을 친히 관람하는 의식. 친경(親耕)과 더불어 나라의 큰 제사에 쓰이는 곡식을 소중히 여기고 백성의 근본을 권면하는 뜻에서 고대로부터 실시했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경직도병> 中 한 폭, 견본채색, 135.5 x 49.4cm,  경직도(耕織圖)는 농사짓는 일과 누에치고 비단 짜는 일을 그린 풍속화로 왕으로 하여금 백성들의 생활을 이해시켜 스스로 근검절약하게 하고 바른 정치를 하도록 힘쓰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제작된 그림이다.]

 

[위 <경직도> 중 부분]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집을 짓는 것과 비슷하다. 집을 짓는 사람은 먼저 터를 정하고 다음으로 재목을 살피고 그다음에 짓는다. 법을 세우는 것은 터이고 인재를 선택하는 것은 재목이고 정령(政令)은 짓는 것이다. 의문(儀文)과 절목(節目)은 곧 규모의 대소에 달려 있으니, 비유하자면 벽을 바르고 단청을 칠하는 것은 사치스럽게 하느냐 검소하게 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과 같다.】

▶의문(儀文) : 의식(儀式)을 치르는데 필요한 예절, 법도. 또는 그것을 기록한 문서

 

【소민(小民)이 입는 피해 중 탐욕과 부정에 의한 것이 가장 심하다. 왕위에 오른 후 탐욕을 징계하는 정사에 있어 조금도 너그러이 용서하지 않았는데도 부정한 아전과 수령이 갈수록 더욱 심해진다. 이는 한 세상의 풍습이 나라의 법을 안중에 두지 않고 사사로움에 구애되어 보고받는 대로 조사하여 벌주지 않은 소치로 인한 것이다. 염찰(廉察)의 방도는 어사에게 달려 있는데, 근래 어사들이 염찰을 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도리어 웃음거리가 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자주 보내지 못하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청렴하고 밝은 어진 관리를 많이 얻어 주군(州郡)마다 내보낼 수 있겠는가.

▶염찰(廉察) : 몰래 남의 사정을 살피는 것. 염탐(廉探)

 

 

【탐욕스러운 풍조를 바로잡고자 한다면 반드시 먼저 청렴한 사람을 발탁하여 등용해야 한다. 경연 신하는 "요즘 세상에서는 쉽게 얻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그것은 한 세상을 무함하는 말일 뿐이다. 그 가운데 나아가면 그러한 사람이 있을 것이다. 가령 없어졌다면 마땅히 그 아들이나 손자를 등용하여 권장해야 한다.】

 

 

【임금 노릇 하는 도리에 대해 여러 성인(聖人)이 이미 말한 것이 지극하다. 첫째는 하늘을 공경하고, 둘째는 조상을 본받고, 셋째는 백성을 사랑하고, 넷째는 어진 이를 높이는 이 네 가지 일이 곧 임금으로서의 훌륭한 절조이다.

하늘의 뜻을 힘써 밝히고 받들어 칭찬하는 것은 드러나지 않는 훌륭한 덕이 위로 알려지게 되는 아름다움이고, 선대의 업을 잘 이어받는 것은 옛 전장(典章)을 따라서 하는 기쁨이고, 백성들을 잘 어루만져 기르는 것은 용도를 절제하고 삼가 검소하게 한 효과이고, 뛰어난 인재를 등용하여 높이는 것은 사해(四海)가 모두 귀속되게 하는 공이다.

말하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행하기가 어려운 것이니, 주자(朱子)가 이른바 진부한 말 속에 자연히 오묘한 이치가 들어 있다고 한 것은 참으로 먼저 터득한 말이라 하겠다.】

▶전장(典章) : 나라의 제도(制度)와 문물(文物)

 

 

【재용(財用)은 본래 한계가 있으니 절용(節用) 두 글자가 곧 재물을 쓰는 첫 번째 의리이다. 그런데 옛사람이 말한 절용이라는 것이 어찌 쓰는 바가 전혀 없는 것이겠는가. 마땅히 써야 할 부분에 쓰고, 쓸데없는 비용이나 긴요하지 않은 데 쓸 것을 절제하는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본래 재물을 생산할 지혜가 부족하고 또 절용의 의리도 알지 못한다. 절용한다는 것이 마땅한지 아닌지 따지지 않고 오직 쓰지 않는 것만을 위주로 하니, 이는 행할 수 없는 일이다. 부득이 써야 할 때가 미치면 또 긴급한지 한만한지 앞뒤를 살피지 않고 오직 전례(前例)를 따라 행할 뿐이다. 그러나 전례가 반드시 모두 옳은 것은 아니어서 끝내는 실효가 없다. 우리나라의 인재는 본래 실용에 적합한 사람이 없는데, 재물에 이르러서는 더욱이 그러하다.】

 

 

【나는 비 오고 햇볕 나는 것에 대해 잠시라도 마음을 놓을 수 없으니, 2월부터 가을이 끝날 때까지 하루라도 우려하지 않은 적이 없다. 오직 겨울 및 초봄의 아직 얼음이 녹지 않았을 때에만 비로소 스스로 마음을 조금 놓는다. 내가 추운 계절을 좋아하는 것은 천성적으로 추위를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만이 아니라 마음속이 조금 한가해지기 때문이다.】

 

 

[19세기에 활동한 천민출신 화가 우진호 作 <경직도병> 중 한 폭, 평양조선미술박물관]

 

【둔전(屯田)은 훌륭한 제도이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이름만 있고 실상이 없었다. 재상 유성룡(柳成龍)이 도감(都監)을 설치하여 군병 1만 명을 설치하고 그 반을 나누어 둔전을 경영하여 곡식을 비축해서 군량으로 삼으려고 하였지만 실행에 옮기지는 못하였다.

내가 경기(京畿) 안의 두세 산군(山郡)에 장용영(壯勇營)의 향군(鄕軍) 2초(哨)를 두고 둔전을 설치하여 봄과 여름에는 농사를 짓도록 하고 가을과 겨울에는 활 쏘며 사냥하도록 하였다. 땅에서 나는 곡식을 비축하여 그 군사들의 늠료(廩料)를 주고 나머지를 취하여 장비를 갖추는 데 쓰도록 해서 병사와 농사가 서로 의지하게 했다. 이는 장횡거(張橫渠)가 뜻을 두었던 일구(一區)의 정전제(井田制)와 그 뜻을 같이하는 것이다.】

▶둔전(屯田) : 변경이나 군사요지에 설치해 군량에 충당한 토지

▶산군(山郡) : 산골에 있는 고을

▶늠료(廩料) : 벼슬아치들에게 주던 봉급

▶장횡거(張橫渠) : 중국 북송시대의 유교 철학자

▶정전제(井田制 : 중국 하(夏), 은(殷), 주(周) 시대에 토지의 한 구역을 ‘정(井)’자로 9등분하여 8호의 농가가 각각 한 구역씩 경작하고, 가운데 있는 한 구역은 8호가 공동으로 경작하여 그 수확물을 국가에 조세로 바치는 토지제도

 

 

【근래 화전(火田)의 폐단이 날로 더욱 심해지고 있다. 산허리 이상에서 금법(禁法)을 범하는 것은 우선 논하지 않더라도 산꼭대기를 잘라 경작하는 것은 곳곳마다 모두 그렇다. 보기에 매우 좋지 않으니 법적으로 금해야 마땅하다.

다만 지금 태어나는 사람은 점차 많아지고 땅은 한도가 있으니 산전(山田)을 개간하지 않는다면 어찌 살아갈 수 있겠는가. 또 산골의 수령이 손을 대어 힘입는 것이 단지 이 한 가지 일인데, 지금 화전을 아주 금한다면 필시 각박하게 침탈하는 방법을 써서 그 잃은 바를 대신할 것이다. 이 같이 하는 즈음에 백성들이 어떻게 고통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이 때문에 비록 소나무와 인삼 두 가지 일에 관계된 정사가 우려할 만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뜻을 내어 금지하지 못하는 것이다.】

 

 

【닥나무, 대나무, 뽕나무, 옻나무는 이용후생(利用厚生)의 밑천인데 우리나라는 평소 이들이 풍부하게 생산된다. 다만 뜻있는 선비로서 백성과 나라에 마음을 두는 이가 없으니, 벌목이 매일같이 행해져도 재배하는 사람에 대해서 들을 수가 없어 점차 처음만 못해지고 있다. 살림을 꾸려나가는 개인 가정에서도 10년 계획으로는 나무를 심는 것 만한 것이 없다고 하는데, 더구나 나라의 만 년을 내다보는 계획에 있어서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천지가 위대한 까닭은 다름이 아니라 포용하지 않는 것이 없고 싣지 않는 것이 없기 때문이니, '무소불포무소부재(無所不包無所不載)' 이 여덟 글자는 임금의 상(象)에서도 똑같이 적용된다. 만일 털끝만큼이라도 치우침이 있다면 그것은 곧 하늘을 본받고 땅을 본받는 도리에 부족할 것이다.】

 

 

【당시에 하기 어려운 일을 해나가는 것이 어려운 것이다. 옛날에 어려웠던 일이 오늘날 반드시 어렵지는 않으며, 오늘날의 어려운 일이 옛날에 반드시 어려웠던 것은 아니다. 숙묘조(肅廟朝)에는 인재의 등용과 버림을 어려운 일로 여겼고, 선조(先朝)에는 탕평(蕩平)을 어려운 일로 여겼다. 오늘날에는 오늘날의 어려운 일을 구하여 잘 해 나가야 어려운 일을 하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의리가 바로 선 뒤에야 조정이 존중받고, 조정이 존중받은 뒤에야 사방이 복종하고, 사방이 복종한 뒤에야 통치의 도가 행해지는 법이다. 돌아보건대, 오늘날 조정의 사람들은 한결같은 뜻이 없고 일은 정해진 규례가 없다. 단지 파도를 따라 떠다니듯 지위가 높으나 낮으나 모두 분주히 어지러울 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의리가 바로 서고 조정이 존중받은 적은 아직 없었다. 나는 생각이 이에 미칠 때마다 동이 트도록 잠을 이루지 못한다.】

 

[전 김홍도, <경직도 8곡병> 中 한 폭, 견본담채, 105.0 x 47.0 cm, 한양대학교 박물관]

 

 

 

참고 및 인용 : 정조이산어록(2008, 손인순, 고전연구회 사암),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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