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선조들

조헌 1 - 조선의 상소왕

從心所欲 2020. 8. 12. 17:00

‘말을 함부로 한다’는 표현도 있고 ‘말을 가려서 한다’는 표현도 있다. 이것은 말을 듣는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예의에 관련된 문제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처세술이기도 하다. ‘말을 가려서 하는 것’은 상대방으로부터 비난을 받지 않으려는 수단이기도 한 것이다.

 

조선시대에 ‘말을 함부로 하여’ 평생 고난을 자초한 인물이 있다. 선조 때의 문신 조헌(趙憲, 1544 ~ 1592)이다. 그는 왕에게 올리는 상소를 통하여 조정의 대신들은 물론 왕의 잘못을 지적하기를 서슴지 않았는데 그의 상소는 늘 ‘말이 지나치다’는 비난을 받을 정도로 과격하였다. 그렇다고 요즘의 일부 정치인들처럼 어그로를 끌려고 아무 얘기나 던져놓고 보는 막말을 한 것은 아니다. 틀린 일과 옳은 일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달리 교묘히 꾸미지 않고 직설적(直說的)으로 쏟아놓은 것이다. 요즘 정치인들이 막말을 내뱉는 이유는 자신의 존재감을 부각시키려는 처세술의 일환이지만, 조헌은 자신이 생각하는 ‘의(義)’를 위하여 오히려 처세를 초개같이 여겼다. 하지만 그의 상소는 거의 채택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좌절하지 않고 계속 상소를 올리며 자신의 소신을 밝혔다.

 

조헌은 24살 때인 1567년에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1572년 교서관 정자(正字)로 있었는데, 선조가 고례(故例)를 들며 불사(佛寺)에 향(香)을 내려주라는 명을 내리자. 궁중의 향실(香室)에서 봉향(封香)하는 관행을 폐지할 것을 주장하는 <논향축소(論香祝疏)>를 올렸다. 그런데 거기에 쓰인 말들이 너무 극단적(極端的)이어서 선조의 분노를 샀고, 이로 인하여 그는 관직을 삭탈 당했다. 이는 시작에 불과했다.

 

2년 뒤인 1574년, 조헌은 성절사(聖節使)의 질정관(質正官)이 되어 명나라를 다녀온 직후에 명나라의 문물제도를 본받아 조선이 고쳐야 할 폐단 8가지를 기술한 <질정관회환후선상팔조소(質正官回還後先上八條疏)>를 올렸다.

▶성절사(聖節使) : 조선 시대에, 중국 황제나 황후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하여 보내던 사절.

▶질정관(質正官) : 중국에 파견되는 사신의 일원으로, 제도나 사물 등 특정사안에 관한 의문점을 중국에 가서 질문하여 알아오는 일을 맡은 임시관직이다. 조선 중기 이후에는 서장관이 질정관도 겸임하였다.

 

그러나 선조는 이에 대하여 “천백 리 풍속은 서로 다른 것인데, 만약 풍기(風氣)와 습속이 다른 것을 헤아리지 않고 억지로 본받아 행하려고 하면 끝내 소요만 일으킬 뿐, 일이 성사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면서 매우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원래 조헌은 이<팔조소>와 함께 보다 근본적인 폐단 16가지를 개선하기 위한 <의상십육조소(擬上十六條疏)>도 같이 준비하였지만 선조의 이런 반응에 그 상소는 올리지 않았다. 이 <십육조소>에는 중국의 풍습에 따라 왕릉을 간소하게 할 것, 제사 때에 물자를 아끼고 근검절약할 것, 왕이 경연 강의를 독실하게 수강할 것, 인재는 문벌을 논하지 말고 뽑으며 재가(再嫁)를 막지 말고 서얼(庶孼)을 등용할 것, 하급 관원의 부패를 방지하기 위하여 모든 관원은 물론 말단의 일을 맡은 사람들까지 급여를 지급할 것, 세금을 장부에 맞게 징수하고 진상을 줄여 민생 안정을 위해 노력할 것, 노비를 줄여 병사로 선발하고 20년 내에 백만의 정예병을 갖출 것, 군대의 부패를 없애고 군사훈련을 강화할 것, 군수물자를 충분히 준비할 것 등의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 상소문은 조헌이 상소로 초한 글을 모은 책인「동환봉사(東還封事)」에 남아있고 《수정선조실록》에도 간략히 실려 있다.

 

1574년 11월 중국에 다녀온 뒤, 조헌은 교서관 박사, 호조와 예조의 좌랑, 성균관 전적, 사헌부 감찰 등의 벼슬을 역임하고 1577년 겨울에 통진 현감(通津縣監)으로 나갔는데, 해묵은 폐단을 모조리 혁파함으로써 온 경내가 편안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내수사(內需司)의 노비(奴婢) 중에 법을 범하여 못된 짓을 마구 저지르는 자가 있어 형벌을 가하던 중 노비가 매를 맞아 죽는 일이 발생하여 조헌은 의금부에 붙잡혀 심문을 받고 부평(富平)에 유배되었다.

▶통진(通津) : 경기도 김포지역의 옛 지명

▶내수사(內需司) : 왕실의 쌀, 베, 잡화 및 노비 등 왕실 재정을 관리하던 관서

 

1581년에 다시 공조 좌랑(工曹佐郞)에 임명되었다가 전라 도사(全羅都事)로 나갔는데, 연산군 때의 공안(貢案) 중에 민폐(民弊)가 되는 것들을 혁파하도록 상소하였으나, 이때도 선조는 그 의견을 채용하지 않았다. 그 후로도 조헌은 또 다른 상소를 올렸지만 역시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율곡 이이가 죽은 후 당쟁이 더욱 격렬해지는 것을 보고 조헌은 경기도를 떠나 옥천(沃川)의 안읍현(安邑縣)으로 내려가 지내던 중, 조정이 학제(學制)를 수정(修定)하면서 각도(各道)의 제독(提督)을 창설하여 유생을 가르치고 양성하는 일을 전담하게 하였는데, 조헌도 이에 차임(差任)되어 공주(公州)에 부임하였다. 선비를 양성하는 규정을 엄격하게 세우고 자신이 몸소 솔선하자, 그 소문을 듣고 멀리서 조헌을 찾아오는 자들이 매우 많았다.

▶제독(提督) : 조선 시대 교육을 감독, 장려하기 위해서 선조 19년(1586)에 8도에 각 1인을 파견하여 각 도내의 향교를 감독하게 한 관직. 그러나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폐지되었다.

 

[조헌 표준영정, 칠백의총관리소]

 

이때 선조가 구언(求言)하는 교서를 내리자, 조헌은 이에 붕당의 시비와 학정의 폐단을 논한 장문의 상소문을 올렸다.

▶구언(求言) : 나라에 재앙이 있을 때나 국정에 필요할 경우, 정치의 잘잘못에 대하여 임금이 신하로부터 널리 비판의 말을 구하던 일.

 

[...신은 듣건대 도(道)는 우리 인간이 누구나 균등하게 받아 가진 것으로 성인이라고 더 풍성하지 않고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더 부족하지도 않아 교육을 시키면 류(類)가 없어져 누구나 요순(堯舜) 같이 될 수 있다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임금이 조기에 미리 교양할 줄 알아서 현인을 친애하고 선인과 교제하여 몸소 교육을 실천하면 아래 백성들은 명령하지 않아도 절로 따르게 되는 것인데, 당우(唐虞)·삼대(三代)의 다스림이 여러 제왕들보다 우뚝한 까닭은 바로 그러한 도를 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후대로 내려오면서부터 이 학문을 밝히지 못한 탓으로 윗사람은 평소의 교육을 알지 못하여 명철한 자가 우매하게 되고 아랫사람들은 속이는 데에 익숙하여져 참설(讒說)이 쉽게 행해지는 것입니다...]

▶류(類) : 성(聖)과 우(愚)의 구별

▶당우(唐虞) : 중국의 도당씨(陶唐氏)와 유우씨(有虞氏). 곧 요와 순의 시대를 함께 이르는 말로 중국의 가장 이상적 태평시기로 여기는 시대

 

이 상소문의 전문은 너무 길어서 《수정선조실록》에는 무려 4건의 기사로 나누어 이 상소문을 실었다. 그러나 애초의 《선조실록》에는 이렇게만 기록되어 있다.

 

【공주 교수(公州敎授) 조헌(趙憲)이 소를 올려 이이(李珥)·성혼(成渾)의 학술의 바름과 나라에 충성한 정성을 극력 진술하고, 시인(時人)이 나라를 그르치고 어진 이를 방해하는 것을 배척하였는데, 내용이 몹시 길었다. 상이 수십 일 동안 궁내에 머물려 두고 비답(批答)을 내리지 않자, 조헌이 다시 상소를 하여 머물기 어려우니 돌아갈 것을 청하고, 또 누구누구가 인척으로 결탁한 정상을 일일이 지척(指斥)하니, 답하였다.

"구언(求言)에 따라 진소(陳疏)한 정성은 참으로 가상하다."】(《선조실록》선조 19년(1586년) 10월 20일)

▶지척(指斥) : 웃어른의 언행을 지적하여 탓함

 

아마도 조헌의 상소 내용이 선조의 마음에 또 안 들었던 모양이다. 십 수일간 상소에 대한 답을 기다리는 조헌에게 상소 내용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이 상소를 올린 정성이 갸륵하다는 말만 내렸으니 조헌에게는 모욕으로 느낄만한 일이었다. 하지만 조헌의 상소에는 이이와 성혼을 비방하는 동인들의 개인적인 과오에 대하여 실명을 들어 지적한 내용이 들어있어 선조로서도 뭐라 답하기 어려운 측면도 있었을 듯싶다. 조헌의 상소는 동인들을 분노케 했고 이에 조헌에 대한 비난과 공격이 이어지면서 결국 1년 뒤 조헌은 파직되었다. 1587년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조선에 사신을 보내오자 일본과 절교(絶交)해야 한다고 충청감사 권징(權徵)에게 투소(投疏)했으나 그가 이를 조정에 올리지 않자, 조헌은 걸어서 한양에 올라가 이전에 올리지 않은 세 통의 상소를 모두 함께 올리면서 세 가지 일을 신하들에게 물어보신 뒤에 허락하도록 청하였다. 그 첫째는, 명(明)나라가 하나로 통일하였으니 일본(日本)의 참호(僭號)를 한시바삐 없애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었고, 그 둘째는 우리나라 사람으로서 저들의 앞잡이가 되어 우리를 못살게 구는 자들을 잡아오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었고, 그 셋째는 왜노들은 만족함을 모르는 자들이니 세폐(歲幣)의 수량을 줄여서 정해야 된다는 것이었다. 또한 이조판서 이산해(李山海)를 비롯한 동·서 각인들의 관계와 행실을 논하는 상소도 같이 올렸다. 이에 선조는 "지금 조헌의 소(疏)를 보니, 이는 인요(人妖)라. 하늘의 견책이 지극히 깊으니, 두렵고 놀라움을 금할 길 없다.“고 하며 상소문을 불살라 버렸다.

▶참호(僭號) : 제 분수(分數)에 넘치는 스스로의 칭호(稱號)

▶인요(人妖) : 정상에서 어긋난 짓을 하는 사람.

 

사실 상소를 불사르는 것은 왕이라고 함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언로를 열어두기 위하여 왕이라도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금기사항이었다. 그런데도 선조는 “이 소가 한번 내려가면 그 손상되는 바가 매우 클 것이므로 아예 내가 그 허물을 지고 이미 소각시켜 버렸으니, 사관(史官)은 나의 허물을 대서(大書)하여 후세를 경계하였으면 한다."고까지 하면서 조헌의 상소문을 태워버린 것이다. 이 정도면 자신의 소견의 옳고 그름을 떠나 조헌이 상소를 포기 할만도 한데 조헌은 그러지 않았다. 다음 해인 1589년 조헌은 자신의 상소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자신을 도끼로 죽여 달라는 의미에서 도끼를 지니고 대궐 앞에 엎드려 조정(朝政)의 득실(得失)과 현사(賢邪)를 구별하는 일 등에 대하여 상소를 올렸다. 이 상소가 ‘극언(極言)의 상소’였다고 하는데 ‘극언(極言)’은 사전에 ‘있는 말을 다하여 의견(意見)을 올림’, ‘극단적(極端的)으로 말함’이라고 나와 있다. 이 상소에 대하여 《선조실록》에는 아래와 같은 기사가 실려 있는데 당시 조헌에 대한 조정의 평가가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가 있다.

 

【양사(兩司)가 조헌의 일에 대해 논계(論啓)하니, 양사에 답하였다.

"삼사(三司)에서는 조헌을 이미 귀괴(鬼怪)로 간주하고 있다. 대저 귀괴가 대낮에도 모양을 나타내어 대들보에서 휘파람을 부는 등 거리낌 없이 행동하여 집안사람을 욕하고 꾸짖게까지 한다 하더라도, 어찌 서로 따지며 화를 낼 필요가 있겠는가. 만약 팔을 걷어붙이고 떠들어 여러 날 시끄럽게 군다면 보는 사람들의 비웃음을 받을 것이니, 임금된 자는 듣고도 못들은 체하면 그만이다. 대저 조헌은 하나의 필부(匹夫)이다. 즉시 찬출(竄黜)을 명하여 모든 사람의 분개하는 마음을 위로해 주는 일이 어렵지는 않다. 그러나 소(疏)로 인하여 찬극(竄殛)을 가한다면 사람들의 의심은 물론, 후일의 폐단을 야기시킬 것이니 이점을 헤아려야 한다."】(《선조실록》선조 22년(1589년) 5월 2일)

▶귀괴(鬼怪) : 요괴. 도깨비. 간악한 자. 어리석은 자.

▶찬출(竄黜) : 벼슬에서 내쫓고 멀리 귀양 보냄

▶찬극(竄殛) : 죄인을 귀양 보내거나 죽이거나 함

 

조헌은 선조로부터 인요(人妖)에 이어 귀괴(鬼怪)라는 소리까지 듣는 처지가 되었다. 그래도 선조는 조헌을 벌주지 않으려 했으나 양사의 논계에 따라 결국 조헌은 길주(吉州) 영동역(嶺東驛)에 정배(定配)되었다. 그의 신도비명(神道碑銘)에는 이때의 일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신도비(神道碑) : 죽은 사람의 평생사적을 기록하여 무덤 앞에 세운 비(碑). 조선시대 이후, 관직으로 정2품 이상의 뚜렷한 공업과 학문이 뛰어나 후세의 사표(師表)가 될 때에는 신도비를 세웠다.

 

【선생이 옥천으로부터 걸어서 재를 넘으며 2천여 리(里) 길을 가면서 온갖 곤욕을 극도로 겪었으니, 비록 채서산(蔡西山)이 (귀양갈 때) 다리에 피가 줄줄 흐른 일도 또한 이보다 더하지 않았다. 그러나 선생의 사기(辭氣)는 조금도 꺾인 적이 없었고, 영북(嶺北)지방에 돌림병이 한창 치성(熾盛)하여 그곳을 지나다가 죽는 자들이 열이면 대여섯이나 되었으며 선생의 아우와 두 하인도 모두 죽었다. 선생은 비록 극도로 슬프고 가슴이 아팠으나 또한 걱정하거나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으며, 사방의 이웃에 시체가 쌓인 가운데에 단정하게 앉아 있었다. 간혹 몸소 병자(病者)의 집에 찾아가서 약을 주어 살려내기도 하였는데 끝까지 병에 걸리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선생의 정기(正氣)는 여귀(厲鬼)도 감염시키지 못하였다.”고 말하였다.】

▶채서산(蔡西山) : 송(宋)나라 때의 유학자 채원정(蔡元定). 서산(西山)은 호.

▶영북(嶺北) : 마천령(摩天嶺) 북쪽 지방. 곧 함경남북도 지방.

 

[조헌 신도비 옛 모습, 인조 27년인 1649년 건립,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사진]

 

[조헌신도비, 옥천향수신문 사진]

 

그 해 10월 정여립의 역모가 발각되자 호남 유생 양산숙(梁山璹)이 상소하여 조헌의 원통함을 송변(訟辨)하면서 그가 정여립이 반드시 반역할 것을 예언한 선견(先見)의 충언(忠言)이 있었음을 아뢰었다. 그러자 선조는 "당초 찬배(竄配)한 것은 나의 본의가 아니니, 석방하도록 하라."는 전교를 내려 유배에서 풀려났다. 그런데 조헌은 귀양에서 돌아오는 길에도 또 상소를 올렸다.

 

【조헌이 방면되어 돌아오는 도중에 소를 올렸고, 호남의 유생 양산도(梁山璹), 김광운(金光運) 등도 소를 올렸는데, 대개 당시의 재신(宰臣)들을 지척(指斥)한 것들이었다. 전교하기를,

"인심의 패역(悖逆)함이 이 지경에 이르렀다. 그들의 소장(疏章)을 내가 아직 다 보지 못하였지마는, 어찌 이를 따질 나위가 있겠는가. 다만 조신(朝臣)들이야 마음이 어찌 편안할 수 있겠는가. 그들 몇 사람이 소를 올려 조신들을 다 지척하고 우상(右相) 정철 이하 몇 사람만을 찬양하면서 스스로 ‘직언(直言)’이라 하여 도리어 그 정상을 환히 드러냈으니, 웃을 일이다. 조헌은 하나의 간귀(奸鬼)이다. 아직도 두려워할 줄 모르고 조정을 경멸하여 더욱 거리낌 없이 날뛰니, 그 사람은 앞으로 다시 마천령(磨天嶺)을 넘게 될 것이다." 하였다.】(《선조실록》 선조 22년 12월 15일)

 

인요(人妖), 귀괴(鬼怪)에 이어 간귀(奸鬼)가 되었다. 선조도 조헌의 줄기찬 상소에 아주 넌더리가 났을 것이다.

 

 

 

 

 

참고 및 인용 : 국역 국조인물고(1999.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인물한국사(2013, 신병주, 장선환),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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