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선조들

조헌 2 - 칠백의총

從心所欲 2020. 8. 13. 18:55

병자호란 때의 대표적 척화파였던 김상헌(金尙憲, 1570 ~ 1652)이 쓴 조헌의 신도비명에는 조헌의 어린 시절과 성품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천성이 효순(孝順)하고 태도가 순진(純眞)하고 확고하였다. 집안이 본래 농사에 종사하였는데 또래 아이들을 따라 놀이를 즐기지 않았고 일체의 행동을 부친의 명에 따라 부지런히 일하였다. 평소에는 독서에 열중하여 눈에 신외(身外)의 일을 아랑곳하지 않았으므로, 동배(同輩)들이 깍듯이 섬기고 감히 함부로 나서는 자가 없었다. 겨우 강보(襁褓)를 면하게 되고부터 벌써 부모를 섬기는 예절을 알았으므로 부모가 명하시면 반드시 무릎을 꿇고 대답하였고 매사를 공경스럽게 받들었다. 어려서 모친을 여의고서 계모(繼母)에게 실애(失愛)하였으나 마침내 계모의 마음을 기쁘게 하였으며, 조금 자라게 되어서는 학문을 좋아하여 항상 격앙(激昻)하여 스스로 외우기를, “하늘이 남자를 태어나게 한 것이 어찌 우연이겠는가?”라고 하였으니, 그 자임(自任)이 중(重)한 것이 이와 같았다.

 

살림이 몹시 가난하여 한겨울의 대단한 추위에 옷과 신발이 모조리 해어져 맨발로 스승을 찾아다녔는데 바람과 눈보라를 피하지 않았으며, 집에 돌아오면 몸소 자기가 땔나무를 등에 져다가 부모를 위해 불을 지폈고 불빛에 비추어 글을 읽었다. 나날이 쓰는 언행(言行)과 남들과 강론(講論)하는 것이 위기 역행(爲己力行)의 일이 아닌 것이 없었고, ≪대학(大學)≫의 ‘남의 자식된 자는 효(孝)에 멈추어야 되고 남의 신하된 자는 공경에 멈추어야 된다.’는 대목에 이르면, 세 번씩 반복하여 완미(玩味)하지 않은 적이 없었으며, 요순(堯舜)과 탕무(湯武)가 아니면 말하지 않았고 공맹(孔孟)과 정주(程朱)가 아니면 배우지 않았다.】

▶위기역행(爲己力行) : 『논어』의 古之學者爲己라는 구절에 근거해 자기 자신의 본질을 밝히기 위한 학문을 위기지학(爲己之學)이라 하고, 역행(力行)은 부지런히 힘써서 노력하는 것을 의미.

▶완미(玩味) : 뜻을 깊이 생각하다.

 

글에서 말하는 어릴 적 스승은 김황(金滉)이다. 널리 알려진 인물은 아니지만 학행으로 이름이 높았다고 하며 임진왜란 때에는 의병을 일으키기도 했다. 조헌은 10살때 어머니를 여의고 계모 밑에서 자랐는데 계모는 조헌을 매우 엄하고 가혹하게 대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조헌은 계모를 지극한 정성으로 섬겼다고 한다. 외가에 갔다가 외조모가 계모를 험담하자 한동안 외가에 발길을 끊었는데, 나중에 외조모에게 비록 그 몸을 빌려 태어나지는 않았을망정 엄연한 자신의 어머니인데 자식 된 도리로 어머니의 잘못을 들추는 말을 민망해서 들을 수가 없었다고 밝혔다는 일화도 있다. 이러한 조헌의 효성에 감복하여 계모도 마침내 조헌을 자신이 낳은 자식보다 더 사랑하게 되었다고 한다. 1582년에 조헌이 보은현감으로 내려간 것도 계모를 편히 모시기 위하여 자원한 것이었는데 조헌은 보은현감으로 있으면서 그 치적이 충청좌도에서 으뜸으로 평가받기도 하였다.

 

조헌은 스스로 평생의 스승을 세 사람 꼽았는데, 성혼과 이이, 그리고 이지함이었다. 그러나 조헌이 직접 그들에게 학문을 배웠다는 의미보다는 조헌이 평소에 스승으로 여겨 흠모했다는 의미가 더 가까워 보인다. 실제로 조헌이 파주(坡州)의 교수(敎授)로 있을 때 우계(牛溪) 성혼(成渾)을 찾아가 배움을 청하였지만, 성혼은 자리를 사양하면서 사제(師弟)의 예로 대하지 않았다고 한다.

또 해주(海州)로 율곡 이이를 찾아가서 ‘구의(摳衣)의 예절’을 행하였다는 기록이 있기는 하지만 이것만으로 이이가 조헌을 제자로 맞았는지는 분명치 않다. ‘구의(摳衣)의 예절’이란 옷자락을 밟지 않게 옷의 앞섶을 두 손으로 들어 올린다는 뜻인데, 예전에 제자가 스승에게 나아가 가르침을 청할 때 스승에 대한 공경의 표시로 취하는 행동이었다. 전하는 이이의 조헌에 대한 평가도 그리 특별하지 않다. 이이는 “여식(汝式)이 매양 요(堯)ㆍ순(舜)의 정치를 당장에 회복할 수 있다고 여기나 요란함을 면치 못하니, 그는 단련되고 통달하기를 기다려야 크게 쓸 수 있다.”고 했다. 여식(汝式)은 조헌의 자이다.

조헌이 토정(土亭) 이지함(李之菡, 1517~1578)과 함께 유람을 했다는 야사가 있고 이지함이 죽은 뒤 조헌이 찾아가 곡(哭)을 하였다는 기록은 있지만 사제 관계에 대한 특별한 기록은 없다. 다만 성혼의 편지를 가져온 가노(家奴)를 반가운 친구같이 대하면서, 음식을 차려 겸상을 했다거나 천민 출신의 학자인 서기(徐起, 1523 ∼ 1591)와 신분을 가리지 않고 교유했던 일화들은 하층민들과 격의 없이 지낸 이지함의 성향을 조헌이 이어받은 것으로 보인다.

 

조헌은 살아생전에 선조에게는 미운 털이 박혔고 동인들로부터는 늘 비방의 대상이 되었으며 또한 직설적인 성격 때문에 조헌을 ‘원수처럼 미워하는 자들이 담장처럼 둘러서기도 하였다’고 할 정도로 주변으로부터 경원시되던 인물이었다. 심지어는 친구들까지도 대부분 문에서 거절하고 만나주지 않았다고 한다. 조헌에 대하여 긍정적인 평가가 나온 것은 죽고 난 이후다. 광해군(光海君) 때 조헌의 유문(遺文) 및 행록(行錄)을 수집하여 엮은 책인 「항의신편(抗義新編)」의 서(序)에 학자 이정구(李廷龜, 1564~1635)는 조헌을 이렇게 기록하였다.

 

【중봉(重峯) 조공(趙公)이 생존하였을 때에 세상에서 공을 안다고 하는 사람들은 공이 의기가 북받친 고지식한 위인에 지나지 않을 뿐이라고 말하였고, 공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광인(狂人)이라고 손가락질을 하기도 했다. 생각건대 공은 평소에 남이 알아주기를 구하지 않았고, 사람들이 비록 자기를 미치광이라 하여도 마음에 불안해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에게서 의(義)에 부당한 사실을 보면 그를 도외시하였기 때문에 공을 아는 사람은 진정 적었고 원수같이 미워하는 사람은 더욱 많았다. 국가가 평안하고 조정의 실정이 심하지 않았는데도 공은 홀로 궐문 앞에서 항언(抗言)하여 국가의 위기와 존망의 화근이 조석지간(朝夕之間)에 있다고 하였다.】

 

1591년 왜국 사신이 와서 ‘명나라를 치려고 하는데 조선에서 길을 인도해 달라.’고 하자 조정에서는 이 일을 명나라에 알릴지 말지를 놓고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선조수정실록》 선조 24년(1591년) 윤3월 15일에는 【전 교수(敎授) 조헌이 소장(疏章)을 올렸으나 답이 없었다. 조헌이 일본의 서계(書契)가 패역스럽고 왜사(倭使)도 함께 나왔다는 말을 듣고서 옥천(沃川)에서 백의(白衣)로 걸어와서 예궐(詣闕)하여 소장을 올렸는데 그 내용에, "신은 생각건대, 선비는 자신의 말의 쓰여지지 않으면 말하지 않는 것이 당연하지만 강상(綱常)이 땅에 떨어질 지경이면 혹 분연히 일어설 수도 있다고 생각됩니다.“】로 시작되는 기사가 실려 있다.

 

이때에도 조헌의 상소는 길고 장황하기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조정의 일본에 대한 대비가 잘못 되었음을 여러 고사를 동원하여 일일이 지적하고 그 대책을 제시하면서 이렇게 간언하였다.

 

【신이 삼가 오늘날의 사세를 헤아려 보건대, 국가의 안위와 성패가 매우 긴박한 상태에 있으니 참으로 불안한 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속히 왜사(倭使)의 목을 베고 중국에 주문(奏聞)한 다음 그의 사지를 유구(琉球) 등 제국(諸國)에 나누어 보내어 온 천하로 하여금 다 함께 분노하게 하여 이 왜적을 대비하도록 하는 한 가지 일만이 전의 잘못을 보완하고 때늦은 데서 오는 흉함을 면할 수 있음은 물론 만에 하나 이미 쇠망한 끝에 다시 흥복시킬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삼가 성주(聖主)께서는 속히 잘 생각하시어 사람이 못났더라도 말만은 버리지 말고 종사(宗社)의 대계(大計)를 위하여 지체하지 말았으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유구(琉球) : 일본 규슈, 오키나와 현, 난세이[南西]제도의 남반부를 가리킴

▶성주(聖主) : 성왕. 성군(聖君). 글에서는 선조를 지칭.

 

조헌은 길고 긴 상소의 끝을 이렇게 맺었다.

 

【신은 지금 외방에서 살고 있으므로 관리로서 해야 할 걱정은 없습니다만, 사면으로 적의 공격을 받을 적에는 강혁(江革)처럼 노모를 업고 난을 피하려 하나 피할 곳이 없을까 매우 두렵습니다. 변(變)을 듣고 나서 십일 동안을 밤에도 잠을 이루지 못하면서 일이 있기 전에 미리 대비하라는 경계를 가지고 완전무결한 계책에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구들이 꺼지고 기둥이 불타는 화(禍)가 닥쳤을 때 다행히 천신(賤臣)이 멀리 버리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해 주시면 더없는 다행이겠습니다.

 

신은 가난한 서생(書生)으로서 서울에 온 지 여러 날이 되어 낭탁(囊槖)이 이미 비었으므로 동방삭(東方朔)의 굶주림을 견디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로부터 영원히 하직할까 합니다. 성명(聖明)을 우러러 보건대 황공하고 격절(激切)함을 견딜 수가 없습니다.】

▶강혁(江革) : 후한(後漢) 때의 효행이 뛰어났던 인물로, 난을 만나자 자기 어머니를 업고 산 속으로 피란했다가 적을 만나자 너무도 애처롭게 간청하였으므로 적도 해치지 않고 갔다고 한다.

▶낭탁(囊槖) : 주머니와 전대(纏帶)

 

그리고 이 상소에 별도의 7가지 문서를 첨부하였는데 그 내용은

1. 반드시 현소(玄蘇)·평의지(平義智)의 목을 자르고 천하에 선포하여 천하 사람들과 함께 소리를 같이하여 격문을 보내되 허점을 노려 (왜국의) 수도(首都)를 공격한다고 하면, 이러한 말이 사방에서 동쪽으로 보고되어 수길(秀吉)도 감히 바다를 건너와서 우리나라를 엿볼 계책을 세우지 못할 것이라는 계책을 담은 글.

2. 변란에 대해 중국에 알리는 표문(表文)의 초안,

3. 유구 국왕에게 전하는 국서(國書)의 초안,

4. 일본국 유민(遺民)의 부로(父老)들에 보내어 효유하는 편지의 초안,

5. 대마도의 부로들에게 보내어 효유하는 글의 초안,

6. 적사(賊使)를 참하는 데 대한 죄목(罪目)의 초안,

7. 영남 호남의 비왜책(備倭策)에 대한 초안

이었다.

▶현소(玄蘇), 평의지(平義智) : 왜의 사신으로 온 대마도인들.

 

상소가 대궐에 들어간 지 사흘이 지나도 아무 회보(回報)가 없자, 조헌은 주춧돌에 자신의 머리를 짓찧어 피가 얼굴을 덮을 정도로 흘렀다고 한다. 조헌이 이렇게 스스로 괴로워하는 것을 보고 어떤 자가 이를 비웃자 조헌은 “내년에 산속으로 달아나 숨게 되면 반드시 내 말이 생각날 것이다.”라고 하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비답이 내려지지 않자 조헌은 또 밀봉한 상소를 올렸지만 승정원에서 받아주지 않았다. 그리하여 조헌은 통곡하며 옥천으로 돌아갔다.

 

그러고도 조헌은 옥천(沃川)으로 돌아가 아들을 시켜 평안 감사 권징(權徵)과 연안 부사(延安府使) 신각(申恪)에게 글을 보내어 참호를 깊이 파고 성을 완전히 수리하여 전수(戰守)에 대한 준비를 하도록 권하였는데, 권징은 그 글을 보고 크게 웃으면서 말하기를 ‘황해도·평안도에 어찌 왜적이 올 리가 있겠는가. 돌아가 그대 부친에게 부디 다시는 이런 말을 하지 말라고 하라.’고 하였다. 반면 신각은 그 말을 옳게 여겨 장비를 대대적으로 수리하고 성내(城內)에 봇물을 끌어들여 큰 못을 만들었다. 이로 인하여 뒤에 왜란이 일어났을 때 성을 지켜 온전할 수가 있었으므로 고을 사람들이 신각의 공로를 추모하여 비석을 세워 그 공을 기렸다고 한다.

 

다음 해인 1592년 2월에 부인(夫人) 신씨(辛氏)가 죽자 서둘러 장례를 치르고, 3월에는 김포(金浦)에 가서 선영(先塋)에 성묘(省墓)하였는데, 장차 난리가 일어날 것이라고 고(告)하고 영결(永訣)하였다고 전한다.

4월에 변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자 조헌은 즉시 청주(淸州)에 가서 의병(義兵)을 일으키려고 하였는데, 당시 백성들이 군대와 무기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하여 어찌할 줄을 몰라 그저 놀라고 허둥대는 것을 보고는 이를 수습하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다시 옥천으로 돌아와 문인(門人) 등과 함께 향병(鄕兵) 수백 명을 모집하여 보은(報恩)으로 통하는 길을 막아 끊고서 왜적을 물리쳤다.

 

그러나 이 와중에도 나라보다 자신의 공을 탐하는 자가 있었다. 당시의 충청도순찰사 윤선각(尹先覺)은 병사(兵士)와 백성들이 의병에 많이 응모하면 관군(官軍)에게 불리하다고 생각하여 갖가지 방법으로 방해를 하였다. 윤선각은 각 고을에 문서를 보내어 의병들의 부모와 처자식을 감옥에 가두는 한편, 관군을 데리고 조헌의 휘하에 들어간 수령(守令)들을 잡아다가 문책하였다. 결국 이 때문에 모여들었던 의병들이 흩어져 버렸다.

 

하는 수 없이 조헌은 충청북도로 가, 의병을 모집하여 천여 명을 얻었다. 당시에 왜적은 청주(淸州)를 점거하고 있었고 관군은 패배하여 달아나고, 유독 승장(僧將) 영규(靈圭)대사가 이끄는 군대만이 왜적과 서로 대치하고 있었다. 영규대사는 휴정(休靜)의 제자로 공주 갑사에서 승병을 일으켰다. 조헌은 급히 청주로 향하여 영규대사와 합세하였고 방어사 이옥(李沃)도 군대 5백 명을 이끌고 도착하였다. 이에 8월 1일 청주성 공격에 나섰는데, 조헌의 의병은 활, 칼, 창을 들었고, 영규대사 휘하의 승병들은 선장(禪丈), 낫, 그리고 도끼 등으로 무장하였는데, 왜적은 조총(鳥銃)으로 맞섰으나 의병들이 모두 죽기를 각오하고 싸운 덕에 왜적이 크게 기세가 꺾이면서 성 안으로 퇴주(退走)하였다. 조헌이 전군을 독려하여 성곽을 오르려 할 즈음에 갑자기 소낙비가 서북쪽에서 쏟아지면서 천지가 깜깜해지므로 군졸들은 더 싸울 수 없게 되었다. 이에 조헌은 “옛사람이 성패(成敗)는 하늘에 달려있다고 하더니, 그 말이 맞구나.”라고 탄식하고서 징을 울려 조금 퇴각하였다. 조헌은 이날 밤에 왜적이 북문(北門)으로 빠져 나갈 것을 염려하여 방어사 이옥(李沃)에게 북문 밖에 복병(伏兵)을 배치하도록 요청하였지만 이옥이 병사를 매복시키지 않아 왜적은 어둠을 이용하여 북문으로 도망치고 말았다. 이로부터 충청북도의 여러 왜적들은 조헌을 두려워하였으며, 그 당시 왜적의 진중(陣中)으로부터 온 자가 전(傳)하기를, “왜적들이 서로 ‘의장(義將)이 작전(作戰)하는 것이 순찰사나 방어사에 비길 바가 아니어서 그 예봉(銳鋒)을 당해낼 수 없다’고 말한다.”고 하였다.

 

이후 조헌은 8월 15일에 유성(儒城)에서 영규대사가 이끄는 승군과 다시 합세하여 700의 의병을 이끌고 금산으로 진격하였다. 금산에는 영동(永同)을 거쳐 장차 호남의 곡창(穀倉) 지대를 점거할 목적으로 6월부터 왜적이 주둔하고 있었으나 이들과 싸운 관군이 연패하면서 누구도 이들을 치려고 나서지 않는 상태였다. 조헌의 군대는 8월 17일 저녁, 왜적이 점거하고 있는 금산성 동쪽 10리밖 경양산까지 진출하게 되었다. 이때 조헌이 이끄는 의병 내부에서는 “약세한 군으로 수가 많고 정예(精銳)인 왜적과 대결하는 것은 승산이 없으니 당분간 군대를 정비하고 정세를 관망해 가면서 나라의 명령을 기다리자”는 주장이 있었다. 그러자 조헌은 눈물을 흘리며 “군부(君父)가 지금 어디에 계시는데, 감히 이둔(利鈍)을 말하는가? 임금이 욕을 당하면 신하는 죽어야 되니, 나는 한번 죽는 것만을 알 뿐이다.”고 하였다. 영규대사도 처음에는 ‘필패의 싸움에 참전할 필요가 없다’고 반대하였으나 조헌의 충의에 감동되어 마침내 전투를 하기로 마음을 바꿨다.

 

8월 18일 새벽, 왜적은 아군의 수가 얼마 되지 않고 후군이 없는 것을 탐지하고는, 사방으로 포위하고 3대로 나누어 번갈아가면서 공격을 해 왔다. 이 때 왜적은 조총 등으로 무장하고 있었으나 의병들은 활과 칼, 창과 농기구로 적과 맞섰다. 세 번 공격해 온 적을 세 번 다 무찔렀지만, 해가 질 무렵에 이르러서는 의병의 화살이 바닥났다. 마침내 왜적은 마지막 총공격을 감행하여 의병의 장막(帳幕)에까지 침입하게 되었다.

사태가 위급하자 조헌의 아들 조완기가 아버지를 구하고자 화려한 옷을 차려입고 적진에 돌입하였다. 그러자 왜적은 그를 의병의 대장으로 알고, 집중공격을 가해 마침내 난도질 당하고 말았다. 수하들이 조헌을 탈출하게 하려고 뛰쳐나가기를 극력 청하였으나, 조헌은 웃으며 말안장을 풀면서 말하기를, “여기가 내가 순절(殉節)할 곳이다. 장부(丈夫)는 한번 죽을 따름이니, 난리에 임하여 구차하게 죽음을 면해서는 안 된다.”고 하고서 북채를 당겨 북을 두드렸다. 그리고 심지어 빈주먹으로 서로 치고 때리면서도 오히려 자리를 떠나지 않고 싸웠던 7백 명은 한 사람도 달아나 살아남은 자가 없이 전원 순절하였다.

 

싸움이 끝난 후 왜적은 그들의 시체를 3일 동안이나 걸려 운반하여 불태워 버리고는 영남지방으로 퇴각하였다. 왜적이 떠난 뒤인 22일, 조헌의 제자 박정량(朴廷亮), 전승업(全承業) 등이 의병과 승병의 시체를 거두어 하나의 무덤을 만들고 칠백의총(七百義塚)이라 하여 오늘에 까지 이르게 되었다.

청주성을 탈환한 공으로, 조헌에게는 종4품의 봉상시첨정(奉常侍僉正)의 벼슬을, 영규대사에게는 당상관(當上官)의 벼슬과 단의(段衣)를 내리라는 선조의 교서가 8월 15일 있었지만, 그 교서가 전달되기도 전에 두 사람은 8월 18일 금산성 싸움에서 순절하였다.

 

[충청남도 금산군 금성면 의총리 소재 칠백의총, 문화재청 칠백의총관리소 사진]

 

[칠백의총, 문화재청 칠백의총관리소 사진]

 

[칠백의사가 왜군으로부터 청주성을 되찾고 금산 전투에서 순절한 내용을 담은 사적비인 '중봉조헌선생일군순의비(重峯趙憲先生一軍殉義碑)'. 1603년에 세워졌는데 일제가 강점기 때 폭파해버려 2009년에 복원하였다.]

 

 

 

참고 및 인용 : 조선왕조실록, 국역 국조인물고(1999. 세종대왕기념사업회), 문화재청 칠백의총관리소 홈페이지, 인물한국사(2013, 신병주, 장선환),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