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선조들

한말 보수주의자 최익현(崔益鉉)

從心所欲 2021. 1. 21. 08:49

선조 때의 조헌만큼이나 격렬하고 열정적인 인물이 조선말에도 있었다.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 1833 ~ 1907)이다.

 

1855년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진출한 최익현은 종9품인 승문원 부정자(副正字)를 시작으로, 성균관 전적(典籍), 사헌부 지평(持平), 사간원 정언(正言), 이조정랑, 예조좌랑을 거쳤다. 그리고 어머니의 삼년상을 마친 1868년에 정4품인 사헌부 장령(掌令)에 임명되었다.

다시 조정으로 돌아온 최익현은 즉시 자신의 임무에 따라 <시폐사조소(時弊四條疏)>를 올렸다. 그는 이 상소를 통하여 경복궁 중건 등의 토목 역사를 중지하고, 공사 자금을 위해 세금 걷는 것을 그치며, 상평통보 대신 발행되었던 당백전(當百錢)을 혁파하고, 사대문세(四大門稅)를 금지하는 네 가지를 주장하였다. 당시는 흥선대원군이 나이어린 고종을 대리하여 섭정하던 시기라 그의 지적은 흥선대원군에 대한 공격이나 다름없었다. 상소의 내용이 방자하다는 이유로 최익현은 즉각 탄핵되었고, 최익현은 바로 사직하였다.

그리고 5년 뒤인 1873년, 낙향해 있던 최익현은 고종으로부터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임명되자 바로 <동부승지를 사직하는 상소(辭同副承旨疏)>를 올리면서 이렇게 간했다.

 

【...........최근의 일들을 보면 정사에서는 옛날 법을 변경하고 인재를 취하는 데에는 나약한 사람만을 채용하고 있습니다. 대신(大臣)과 육경(六卿)들은 아뢰는 의견이 없고 대간(臺諫)과 시종(侍從)들은 일을 벌이기 좋아한다는 비난을 회피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조정에서는 속된 논의가 마구 떠돌고 정당한 논의는 사라지고 있으며 아첨하는 사람들이 뜻을 펴고 정직한 선비들은 숨어버렸습니다

그칠 새 없이 받아내는 각종 세금 때문에 백성들은 도탄에 빠지고 있으며 떳떳한 의리와 윤리는 파괴되고 선비의 기풍은 없어지고 있습니다. 나라를 위해 일하는 사람은 괴벽스럽다고 하고 개인을 섬기는 사람은 처신을 잘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염치없는 사람은 버젓이 때를 얻고 지조 있는 사람은 맥없이 죽음에 다다르게 됩니다...】

 

이 상소문을 본 고종은 “가슴속에서 우러나온 것이고 또 나에게 경계를 주는 말이 되니 매우 가상하다”며 다시 최익현을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제수하였다. 그러자 최익현은 또 <호조참판을 사직하는 상소(辭戶曹參判兼陳所懷疏)>를 올려 “높은 벼슬을 사양하고 낮은 벼슬에 처하며 부(富)를 사양하고 가난에 처하는 것은 사양하고 받고 하는 데서 지켜야 할 큰 지조입니다. 신이 전날에 승지의 벼슬을 사양하였는데, 오늘날 순차를 뛰어넘어서 발탁된 벼슬에 도리어 태연스럽게 나가 앉아 있다면 참으로 이른바 만 냥은 사양하고 10만 냥을 차지하는 격이니, 장차 맹자(孟子)의 죄인이 되는 데서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라는 이유와 함께 5가지 이유를 들어 호조참판을 사직하며, 아울러 “화양동의 만동묘(萬東廟)를 복구하여 무너진 군신의 윤리를 다시 세우고, 혁파한 서원을 다시 지어 끊어진 사제(師弟) 간의 의리를 되살릴 것‘을 간하였다.

 

만동묘(萬東廟)는 송시열의 유명(遺命)에 따라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운 명(明)나라 신종(神宗)과 의종(毅宗)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 세운 사당으로 대원군에 의하여 1865년 철폐되었고, 전국의 600여개 서원도 1871년 국가 재정 손실과 군역, 당쟁의 폐단을 이유로 47개만 남기고 폐쇄되었었다.

 

당시 조선은 1866년 프랑스에 의한 병인양요와 1871년 미국에 의한 신미양요를 겪은 상태였다. 서구 열강이 조선의 개국을 압박하고 있던 때에 최익현의 사직상소에서 주장한 것들은 지금의 시각에서는 현실과 너무 동떨어져 보인다. 하지만 성리학 속에 500년을 살아온 당시 조선 사대부들의 사고는 여전히 성리학에 머물러 있었다.

 

두 번에 걸친 최익현의 사직상소는 대원군의 지지 세력으로부터 거센 반발을 받게 되었고, 최익현은 1년 반 동안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풀려났다. 1875년 9월에 왜국 군함 운양호(雲揚號)가 강화도에 불법 침투하여 함포공격을 하고 방화, 살육을 한 뒤 돌아가 이를 빌미로 개항을 요구한다는 소식을 들은 최익현은, 유배에서 풀려난 지 1년도 안 된 1876년 1월에 다시 상소를 올렸다. ‘도끼를 지니고 대궐문에 엎드려 화의(和議)를 배척하는 상소(持斧伏闕斥和議疏)>’였다. 지부(持斧)는 ‘상소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죽여달라’는 의미다. 임진왜란 한 해전에 조헌도 그리 했었다. 그가 왜국과의 화친을 반대하는 이유는 이랬다.

 

【화친이 상대편의 구걸에서 나오고 우리에게 힘이 있어 능히 그들을 제압할 수 있어야 그 화친은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겁나서 화친을 요구한다면 지금 당장은 좀 숨을 돌릴 수 있겠지만, 이후 그들의 끝없는 욕심을 무엇으로 채워주겠습니까? 이것이 나라를 망하게 하는 첫째 이유입니다.

그들의 물건은 모두 지나치게 사치한 것과 괴상한 노리갯감들이지만, 우리의 물건은 백성들의 목숨이 걸린 것들이므로 통상한 지 몇 년 되지 않아서 더는 지탱할 수 없게 될 것이며, 나라도 망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나라를 망하게 하는 두 번째 이유입니다.

그들이 비록 왜인(倭人)이라고 핑계대지만 실제로는 서양 도적들이니, 화친이 일단 이루어지면 사학(邪學)이 전파되어 온 나라에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나라를 망하게 하는 세 번째 이유입니다.

그들이 뭍에 올라와 왕래하고 집을 짓고 살게 된다면 재물과 부녀들을 제 마음대로 취할 것이니, 이것이 나라를 망하게 하는 네 번째 이유입니다.

이런 설을 주장하는 자들은 병자년 남한산성(南漢山城)의 일을 끌어들여 말하기를, ‘병자년에 화친을 한 뒤로 두 나라가 서로 좋게 지내게 되어 오늘까지 관계가 반석 같은데, 지금은 왜 그렇게 할 수 없단 말인가?’라고 합니다. 저들은 재물과 여자만 알고 사람의 도리라고는 전혀 모르는데, 그들과 화친한다는 것은 어떻게 하자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이것이 나라를 망하게 하는 다섯째 이유입니다.】 [《고종실록》고종 13년(1876년) 1월 23일 기사]

 

이 일에 대하여 고종은 “아직 결말이 나지 않은 나라와 관련되는 문제에 대하여 경솔하게 상소를 올리고, 도끼를 가지고 와서 임금이 행차하는 길옆에 엎드린 일이 참으로 놀랍다”며 의금부로 하여금 최익현을 체포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최익현은 다시 흑산도로 유배되었다가 3년 뒤인 1879년에 풀려났다.

 

그 후 조선은 1882년의 임오군란, 1884년의 갑신정변, 1894년의 청일전쟁을 겪었다. 그동안 최익현은 초야에 묻혀 입을 닫고 있었다. 그 기간 최익현은 내적으로 위정척사(衛正斥邪)의 사상을 더욱 공고히 하였다. 위정(衛正)은 바른 것을 지키는 것이고 척사(斥邪)는 옳지 못한 것을 물리친다는 것이다. 즉, 위정은 성리학과 성리학적 질서를 수호하는 것이고, 척사는 성리학 이외의 모든 종교와 사상을 배척하자는 것이다.

 

그러던 차에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되는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뒤이어 개혁파 김홍집(金弘集) 내각이 성년 남자의 상투를 자르도록 하는 단발령(斷髮令)을 발표하자, 최익현은 다음 해 2월에 64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다시 격정적인 상소를 올렸다.

 

【......지금은 만국(萬國)이 서로 화친하고 온 세상이 하나로 된 만큼 응당 환난을 같이 돌보아 주고 원수를 같이 미워하면서 믿음과 의리로 서로 대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저 왜적들은 이웃 나라의 정의(精誼)를 생각하지 않고 먼저는 박영효(朴泳孝)와 서광범(徐光範)이, 뒤에는 조희연과 유길준이 모두 음모를 돕고 반역을 공모함으로써 여러 해 동안 변고를 꾸밀 때 그 소굴이 되었습니다.

 

신은 듣건대 각국이 화친을 맺는 데에는 이른바 공법(公法)이라는 것이 있으며 또 약조(約條)라는 것도 있는데, 신이 모르기는 합니다만 그 약조와 법에 과연 이웃 나라의 역적을 도와 남의 나라 임금을 위협하고 남의 나라 국모(國母)를 시해한다는 조문이 있단 말입니까? 보나마나 그럴 리가 없을 것입니다. 과연 없다면 그 이른바 공정한 법과 약조를 응당 어디에 써야 하겠습니까?

 

법을 세우고 약조를 정하였다면 응당 왜놈들의 죄를 따지고 각 국에 공문(公文)을 띄워 군사를 일으켜 가지고 죄를 따짐으로써 함께 분해하고 미워하는 것이 대의(大義)일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못하여 우리는 이미 왜적이 두려워서 감히 입을 열지 못하고 각 국에서도 역시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지금 여러 군(郡)에서 의병들이 일어나서 왜적을 치지 않고서는 원수를 갚을 수 없다고 하는데 그 명색이 이미 정당한데다가 그 말도 타당합니다.】[《고종실록》고종 33년(1896년) 2월 25일 기사]

 

그러나 이미 조선의 형세는 이런 상소문으로 해결할 수 없을 만큼 기울어져 있었다. 고종은 이후 최익현에게 여러 벼슬을 내리면서 출사를 종용했지만 최익현은 그때마다 사양하는 상소만 올리고 나아가지 않았다.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최익현은 11월 29일에 ‘<오적(五賊)을 토벌하기를 청하는 상소(請討五賊疏)>’를 올려, 을사늑약의 무효를 선언하고 늑약 체결을 찬성한 외부대신(外部大臣) 박제순, 내부대신(內部大臣) 이지용, 군부대신(軍部大臣) 이근택, 학부대신(學部大臣) 이완용, 농상공부대신(農商工部大臣) 권중현의 ’을사오적(乙巳五賊)‘ 처단을 주장했다.

 

상소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판단한 최익현은 1906년 3월 15일 가묘(家廟)에 하직을 고하고 집을 나섰다. 그때 최익현의 나이가 74세였다. 최익현은 전 낙안군수(樂安郡守)였던 임병찬(林炳瓚, 1851 ~ 1916)을 만나 전라북도 정읍 지역인 태인(泰仁)의 무성서원(武城書院)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그리고 6월 4일, 2백여 명의 의병들을 향해 이렇게 물었다.

 

“지금 왜적들이 국권을 농락하고 역신들은 죄악을 빚어내 오백 년 종묘사직과 삼천리강토가 이미 멸망지경에 이르렀다. 나라를 위해 사생(死生)을 초월하면 성공 못할 염려는 없다. 나와 함께 사생을 같이 하겠는가?!”

 

이날 최익현 일행이 정읍에 무혈 입성하여 무기를 거둔 뒤 흥덕을 거쳐 순창에 이르렀을 때에는 의병의 수가 5백여 명을 넘게 되었다. 최익현의 의병들은 곡성을 거쳐 남원까지 밀고 들어가려 했으나, 남원의 방비가 워낙 견고했기 때문에 다시 순창으로 회군할 수밖에 없었다. 그 사이 의병은 8백여 명으로 불어났다.

 

6월 11일, 최익현에게 고종 황제의 칙지(勅旨)가 전해졌다. 내용은 의병을 해산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최익현은 “이미 소장(疏狀)을 올려 의병을 일으키게 된 연유를 말씀 드렸다”며, 다시 남원 진입을 꾀했다. 그러나 남원을 지키고 있는 부대가 왜군이 아닌 조선의 진위대(鎭衛隊)임이 확인되자 최익현은 이를 괴로워했다.

고심 끝에 최익현은 임병찬에게 “동포끼리 서로 박해를 하는 것은 원치 않으니 즉시 의병을 해산시키라”고 명령했다. 의병들은 쉽사리 흩어지지 않았지만 결국 해산되었고, 그 가운데 12명은 끝까지 최익현 곁에 남아있었다.

 

6월 14일, 최익현과 의병 일행은 서울로 압송되고, 이후 대한제국이 아닌 일제에 의한 재판을 받았다. 그리고 7월 8일 대마도(對馬島)로 유배되었다. 최익현은 거기서 단식으로 저항하다 11월 17일에 순국했다.

 

서구문명이 밀려들어오는 상황에서도 성리학을 정(正)으로만 고집한 최익현의 생각이 옳은가 하는 문제는 논외다. 그의 생각이 시대에 뒤떨어진 보수적인 것이라 해도 그는 자신의 가치관에 따라 끝까지 행동을 같이했다. 74세의 고령에 의병을 일으키고도 같은 동포끼리 싸우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자신의 뜻을 꺾었다. 나아가고 물러날 때를 아는 것이 조선의 사대부들이 그토록 중하게 여긴 의리(義理)이고, 최익현은 이를 지켰다. 그의 사고는 보수적이었지만 그 생각을 말로만 떠든 것이 아니라 목숨을 버려 실천했다.

 

‘내가 비록 늙어 혼몽하지만, 충효의 화상을 그리는 것이 진실로 소원’이라며 우국지사 초상을 많이 그렸던 채용신은 이런 최익현의 초상을 여러 차례 그렸다. 아래 초상은 을사년인 1905년에 채용신이 정산군수(定山郡守)로 있을 때 그린 것이다. 1905년이면 최익현이 우리 나이로 쳐도 73세인데, 그림에는 74세상으로 적혀있다.

 

[<채용신필 최익현초상(蔡龍臣筆崔益鉉肖像)>, 1905년, 51.5 x 41.5㎝, 보물 제1510호. 국립중앙박물관]

 

최익현의 영구(靈柩)는 1907년 1월 6일, 부산 초량에 도착한 뒤 충남 예산군 광시면 관음리에 안장되었다. 최익현은 한때 충청남도 청양군 목면 송암리의 장구(長久)마을에 살았었다. 그래서 청양군내 유림들이 발의하여 1913년, 송암리에 공덕사(恭德祠)라는 이름으로 최익현의 충절을 기리는 사당을 건립하였다. 광복 후에는 모덕사(慕德祠)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 모덕사본으로 불리는 최익현의 초상이 있는데 현재 최익현의 표준영정으로 지정되어 있다. 이전에 그렸던 최익현의 73세 때 모습을 채용신이 1909년에 다시 이모(移摹)한 것이다.

 

[채용신 <조선국 면암 최선생 73세 초상(有明朝鮮國勉菴崔先生七十三歲像)>, 모덕사본, 1909년, 전체 144.5 × 63.8cm, 그림 111 × 53.8cm, 백제문화체험박물관]

 

백제문화체험박물관에는 <청양 최익현압송도(靑陽 崔益鉉押送圖)>라는 족자 그림이 있다. 최익현과 그 일행이 한성의 숭례문을 지나 서울역을 거쳐 기차로 부산에 도착하여 대마도로 향하는 과정을 한 장의 비단에 절반씩 나눠 그렸다.

 

[<청양 최익현압송도(靑陽 崔益鉉押送圖)>, 전체 120.5 × 63.3cm, 그림 91 × 53.8cm, 백제문화체험박물관]

 

왼쪽에는 왜인이 끄는 인력거를 탄 최익현과 그 뒤를 따르는 아들들과 임병찬을 비롯한 10명의 인물 이름이 적혀있다. 오른쪽은 부산 초량역에 도착한 뒤 부산항에서 일본 상선에 타기 위하여 거룻배 오르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대마도로 유배가던 때의 최익현]

 

일본 통감부(統監府)는 1908년에 후손들이 최익현의 시문집인 『면암집(勉菴集)』을 편집한다는 소식을 탐지하자, 헌병 1개 소대를 동원하여 간행소를 습격하여 시문집을 샅샅이 조사해 일제를 성토한 내용이 있는 부분과 이에 해당되는 목각판까지 강제로 압수해가기도 했다.

 

최익현선생에게는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참고 및 인용 : 독립운동가(국가보훈처), 인물한국사(김범,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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