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6년 최익현(崔益鉉)이 전북 정읍의 무성서원(武城書院)에서 의병을 일으킬 때 그 옆에서 함께 하였던 인물이 돈헌(遯軒) 임병찬(林炳瓚)이다. 임병찬(林炳瓚, 1851 ~ 1916)은 을사늑약의 소식을 듣고 정읍에서 거사를 준비하던 중, 최익현이 경기도 포천에서 호남으로 내려 왔다는 소식을 듣고는 최익현을 만나러 갔다. 그리고 임병찬은 최익현과 사제(師弟)의 의(義)를 맺었다.
거병할 때 임병천과 함께 최익현의 막하에 있었던 최제학(崔濟學)은 그가 남긴 유고 『습재실기(習齋實記)』에 당시의 일을 이렇게 기록하였다.
【선생님께서 종산으로 나가시어 병찬에게 묻기를 “경영코자 하는 일이 어찌 되느냐”고 하니, 병찬이 대답해 올리기를 “재정이 텅 빈데다 농사일마저 바쁘고, 군사모집 마저도 뜻대로 아니되오니 가을을 기다려 거사함이 어떨까 하옵니다” 했다. 선생님께 이 말을 들으시고 긴 한숨에 뜨거운 눈물을 가득히 머금으신 채로 말씀하시기를 “그대의 말이 옳기는 하지만 이 늙은 몸이 집으로 돌아가 한가롭게 쉴 생각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셨다. 병찬이 울면서 아뢰기를 “선생님의 뜻이 정히 그러하시면 성패를 따지지 않고 동지를 불러 모아 죽기로 거사해 천하에 대의를 떨치는 것이 어떻겠나이까”라고 하였다. 선생님께서는 다시 말씀하시기를 “장하도다. 그대의 말이여. 이렇게 있을 일이 아니라 곧바로 일을 일으킴이 옳겠다”고 하셨다.】
이 거사는 고종의 해산 명령도 있었지만, 동족끼리 싸울 수 없다는 최익현의 결단에 의하여 자진 해산하고 임병찬은 최익현과 함께 왜군 사령부로 붙잡혀가 그 해 7월에 대마도(對馬島) 엄원군(嚴原郡) 위수영(衛守營)에 감금되었다. 11월 최익현이 단식(斷食) 끝에 순절(殉節)하고, 임병찬은 이듬해인 1907년 1월에 유배가 해제되어 귀국하였다.
1910년 일제의 강압에 의하여 국권이 완전히 상실된 후인 1912년 음력 9월, 향리에 있던 임병찬은 광무황제(光武皇帝) 고종으로부터 전라남북도 순무대장(巡撫大將)으로 임명한다는 밀칙(密勅)을 받았다. 전라남북도 순무대장은 고종이 임병찬으로 하여금 독립운동단체를 조직하도록 하기 위한 직책이었다.
이에 임병찬은 호남지방의 의병과 유생을 규합하여 전라남북도에 조직을 만들어 나갔다. 그러면서도 임병찬은 막중한 임무를 감당하기에는 자신이 너무나 부족하다며 수차에 걸쳐 이 책임을 면하기를 고종에게 상소하였다. 하지만 고종은 1913년 임병찬을 다시 전라남북도 순무총장 겸 사령장관에 임명하면서 그를 독려하였다.
임병찬은1914년에 나름대로 구상했던 의병(義兵)전략과 일제하에서의 독립운동방략을 분석하고 앞으로의 독립의군부 활동방법을 제시한 <관견(管見)>을 작성하여 상소한 뒤 본거지를 한성으로 옮겼다. 그리고 조직을 전국적으로 확대하는 한편, 조직의 명칭을 대한독립의군부(大韓獨立義軍府)로 고쳤다. 총사령에 추대된 임병찬은 조직을 개편하고, 한성, 강화, 수원, 개성, 광주에 오영(五營)을 설치하였다. 아울러 각 도·군 단위의 조직을 완성하고 그 대표도 선정하였다.
1914년 5월 국권반환요구서를 전국의 조직을 통해 일제히 발송하고 360여개 처에서 일제히 국권반환과 일본군 철병을 요구하는 시위를 계획하던 중, 단원 김창식(金昌植)이 붙잡힘으로써 조직이 발각되고 말았다.
대한독립의군부에 대한 수사가 시작되자 임병찬은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에게 직접 면담을 요구하는 한편, 일본 내각총리대신 오쿠마 시게노부[大隈重信]에게 ‘국권반환요구서(國權返還要求書)’를 보냈다. 또한 조선주차헌병사령관 겸 조선총독부경무총장인 다치바나 코이치로[立花小一郞]에게는 국권침탈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국권반환 및 왜군의 철병을 요구하며, 한국의 독립만이 동양평화를 유지하는 유일한 방법임을 역설하였다. 이어 6월 1일에는 다시 조선총독과 일본 내각총리대신에게 서신을 보내 일제의 한국침략을 강력히 규탄하였다.
6월 3일 임병찬은 일경에게 체포되고 대한독립의군부 간부들은 투옥되었다. 임병찬은 자결을 시도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거문도에 유배(流配)되었다. 그리고 1916년 음력 5월 23일 유배지에서 66세로 생을 마감하였다.
비록 크게 이룬 것은 없었어도 임병찬은 60이 넘은 나이에 국가의 부름에 응하여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다 생을 마쳤다. 그가 국가의 녹을 먹은 것은 1896년에 거문도에 진(鎭)을 설치하는 감독관으로 근무했던 것과 1898년부터 1년 남짓 낙안군수(樂安郡守)에 있었던 것뿐이었다. 어려서부터 집안이 궁핍하였지만 1888년 호남에 대흉년이 들자 사비로 구휼에 나서기도 하였다.
하는 일 없이 국가의 녹을 먹고 온갖 특혜와 특권을 누리면서도 나라와 민족의 미래보다는 개인의 이익과 영달에 혈안이 된 주둥아리 애국자들은 놓아두고, 이런 독립투사의 후손을 모욕하는 인간 말종들이 있다. 비록 애국자나 독립투사는 못 될지언정 부모 욕 먹이는 호로새끼 소리 안 듣는 것이 그나마 자그마한 효도라도 하는 것이다.
낳아준 부모님은 무슨 죄냐?!
참고 및 인용 : 독립운동가(국가보훈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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