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용신이 1910년 정읍 칠보면을 방문했을 때 만난 사람 중에는 춘우정(春雨亭) 김영상(金永相, 1836 ~ 1910)이라는 분도 있었다. 전라북도 정읍 북서쪽의 고부(古阜) 출생으로 태인(泰仁)에 거주하며 유학자로서 명망이 높았던 인물이다.
일제에 의해 강제로 체결된 한일병합조약이 1910년 8월 29일 순종의 조서로서 공포된 후, 일제는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일본 황실의 작위를 주고 은사금(恩賜金)이라는 명목으로 돈을 주기도 했다. 매국 행위에 동참한 대신과 왕족뿐만 아니라, 전국의 유력인사에게도 회유 차원에서 돈이 뿌려졌다.
태인(泰仁)에 있던 김영상에게도 이 은사금이 배당되었다. 김영상은 집에 은사금을 준다는 사령서(辭令書)가 오자 “유자(儒者)로서 원수의 돈을 받겠느냐.”며 자손에게 사령서를 돌려보내라고 했다. 은사금(恩賜金)은 임금이나 상전이 내려주는 돈이라는 뜻이다. 김영상 뿐 아니라 당시의 여러 조선인들은 일제가 주는 이 은사금의 수령을 거부했다.
은사금을 받으면 욕이 되고 받지 않으면 화가 될 것이라는 제자의 걱정에 김영상은 “그 욕을 받기 보다는 화를 받아 의(義)에 편안한 편이 낫다. 만약에 이를 받는다면 이는 소위 천세(千歲)토록 청사(靑史)를 더럽힌 것이 될 것이다.” 라고 하였다.
그러나 면과 군에서 돌려받지 않으려고 술수를 쓰는 바람에 사령서가 여전히 자손들의 손에 있는 것을 알게 된 김영상은 이렇게 한탄했다.
【“한 몸의 화만을 생각하여 만세의 수치를 무릅쓸 것이냐? 나는 이 세상에 살고 싶지 않은 지가 오래다. 가까운 일로 말하면 을미, 을사의 변과 금년 7월의 변은 우리나라 신민과는 함께 하늘을 일수 없는 원수이다. 그러나 초야의 백성으로 스스로 목매어 죽거나 개울에 빠져 죽지 못하였으나, 죽고자 하는 마음은 잠시도 잊지 않고 가슴에 품어 왔는데 아직껏 이것을 지연시키고 있는 것은 특별히 그 죽을 곳을 살피고 있었다. 이제 이 원수의 돈이 나를 핍박한다.”】
▶금년 7월의 변: 1910년 8월 29일은 음력 7월 25일이었다. |
그리고는 며칠 뒤 그는 각금서(却金書)를 썼다. 각금(却金)은 금을 물리친다는 뜻으로, 각금서는 수령거부서이다.
【주역(周易)의 소과구삼(小過九三)에 이르기를 강직한 군자가 겸손한 마음으로 낮은 사람을 상대해 주었다가 그것의 해를 받을지 모른다 하였으니 내가 지금 그 지경에 이르렀다. 나는 대한(大韓)의 신민인데 어찌 원수 나라의 돈을 받겠는가. 너희들도 터를 바꾸어 놓고 생각한다면 원수나라의 돈을 받지 않을 것은 말할 것도 없는 일이다. 을미(乙未) 8월 20일 국모를 해친 원수, 을사(乙巳) 10월 21일의 늑약지변(勒約之變), 금년 7월 25일의 합방지사(合邦之事)의 일을 너희들이 만약 당하였다면 과연 이 돈을 받았겠느냐? 그렇기 때문에 나는 죽음을 맹세하고 이 돈은 받을 수 없는 것이다.】
자손을 시켜 각금서와 함께 사령서를 군청(郡廳)에 반납하자 왜군이 자손을 구타하고 감금하였다가 풀어준 뒤, 사령서는 면장을 통하여 되돌려 보냈다. 다시 돌려주려고 해도 받지 않자 김영상은 격노하여 “나는 당당한 대한 신민의 이름으로 오랑캐 원수가 돈을 주는 문적(文籍)에 이름을 둘 수 없다.”며 사령서에 있는 자신의 이름 석자를 찢어내어 버렸다.
그리고 다섯 달 뒤인 1911년 4월 17일에 왜군 병참소(兵站所)에서 돈을 준다는 소식을 전하러 면장이 찾아오자 김영상은 자신이 사령서의 이름을 찢은 사실을 말하고, 받지 않겠다는 뜻을 다시 밝혔다.
그러자 오후에 지역의 왜군 병참소장이 김영상을 찾아와 받지 않는 이유를 물으며 합방이후에 어떤 생각을 가졌는지 글로 써 달라고 했다. 김영상은 16자를 써서 보였다.
【合邦以後 欲死無地 今得死所 誓死而已
합방이후에 오직 죽고 싶을 뿐이었는데 이제 죽을 곳을 얻었으니 죽음을 맹세할 뿐이다.】
5월 2일 왜군이 김영상을 체포해 가려고 왔으나 김영상의 거센 반발에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냥 돌아갔다. 그리고 5월 6일에 다시 찾아와 군산 감옥으로 데려간다는 통지를 했다. 김영상은 “나는 너희 주인이 아비를 죽인 죄 다스리는 것을 보고서 죽을 것이다.”라고 하며 따라 나섰다. 김영상이 길을 나서자 자손과 문인 수십 명이 뒤를 따랐다. 미리 길 아래서 기다리고 있던 김영상의 측실(側室)인 유씨라는 여인은 김영상에게 이렇게 말했다.
“만사를 잊어버리고 평안히 세상을 떠나시오”
이러한 내용은 김영상이 은사금 사령서를 받은 날부터 순국하여 장례를 치를 때까지의 일을 날자 순으로 기록한 「각금일기(却金日記)」에 기록된 사실들이다. 「각금일기(却金日記)」는 이 일들을 직접 겪고 목도한 자손이나 제자 문인들에 의하여 기록된 것으로 보인다. 그 일기의 1911년 5월 8일자 기록 중 일부다.
【비가 내리고 또 번개를 쳤다. 김제를 출발하는데 왜 헌병 제등(齊滕)과 보조병 이완필(李完必)이 교대되었다. 만경의 사진(沙津)에 도착하였다. 강가에서 무이도가(武夷櫂歌) 3편을 외고 있었다. 여러 날 동안 밥을 먹지 않고 지냈는데도 그 음성이 하늘까지 통하여 평화스런 소리로 들림을 보였다. 얼마 뒤 나룻배에 올라 중류에서 뱃전을 잡고 제자들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아름답도다. 경치여!” 하였다.
마침내 태연히 몸을 물에 던지니 왜 헌병 제등이 순간 물속으로 뛰어 들어가 선생을 구출해냈다. 의관은 모두 물에 젖어서 뱃머리에 누이고 단단히 지키었다.
선생이 정신을 집중하여 크게 꾸짖으며 말하기를 “나는 굴원대부(屈原大夫)를 만나보려 가는데 너희들이 어찌 내 가는 길을 막느냐” 하였다. 힘을 다하여 몸을 배에서 물속으로 던지려 했으나 저들의 잡음이 단단하여 드디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때 김영상은 다음과 같은 ‘절명사(絶命詞)’ 를 자신의 허리띠[衣帶]에 미리 써두었었다.
【昔屈子之精忠 옛날 굴원의 한결같은 충성은
指汨羅而爲期 멱라수에 몸을 던져 일기(一期)로 삼았는데
今春雨余陽九 지금 나 춘우는 재난의 운을 당하였으니
從沙津而逝斯 사진(沙津)으로 좇아가노라.
酌椒酒之三桮 술 3배를 따라
慰魚腹之忠魂 물고기 뱃속의 충혼을 위로하고
踵東海之高蹈 노중련(魯仲連)의 높은 발자취 따라
永陟江於干磐 영원히 물가를 오르내리리라.】
▶노중련(魯仲連) : 전국시대 제(齊)나라의 은사(隱士)로, 무도(無道)한 진(秦)나라가 천하를 차지한다면 “나는 동해로 걸어 들어가 죽겠다.[連有踏東海而死耳]”는 맹세로 절의(節義)를 나타냈다. |
김영상은 결국 물에 몸을 던져 죽으려던 뜻을 이루지 못한 채 그날 군산감옥에 수감되었다. 그리고 다음 날인 5월 9일 김영상의 조카가 감옥으로 찾아가 면회를 신청하였는데, 김영상은 이미 오전에 순절한 상태였다. 왜군이 찾아온 5월 2일부터 곡기를 끊기 시작한 8일 만의 일이었다.
김영상의 영구(靈柩)가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지나는 마을마다 술과 음식을 준비하여 김영상에 대한 예를 올렸다. 고을의 인사들도 운구행렬을 찾아 나왔다.
‘임피(臨陂) 옥흥리(玉興里)의 최경준(崔京俊) 모자(母子)가 듣고서, “선생이 순의(殉義)의 하신 일은 한편으로는 기쁘고 한편으로는 슬프도다. 진실로 의사로다, 진실로 의사로다.” 하고 곧 한 쌍의 촛불을 키고 전(奠)을 올렸다’는 글도 있다.
「각금일기(却金日記)」에는 김영상의 상여가 칠보면으로 돌아오는 광경을 이렇게 적었다.
【고현(古縣)의 경계에 이르니 문인과 빈객(賓客)과 친척으로 배행하는 사람이 수 천백이었다. 부인과 어린아이들 지나가는 나그네들까지도 서로 슬퍼한 사람의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고현(古縣) : 일제에 의해 칠보면으로 바뀌기 이전의 김영상이 살던 고을 이름. |
참고 및 인용 : 각금일기(춘우정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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