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선조들

허균 2 - 자부심

從心所欲 2021. 6. 13. 08:23

【우리 선대부의 문장과 학문과 절행(節行)은 사림(士林)에서 추중(推重)되었다. 큰 형이 경전을 전해 받았고, 문장도 간략하면서 무게가 있었다. 작은 형은 학문이 넓고 문장이 매우 고고(高孤)해서 근래에는 견줄 사람이 드물다. 누님의 시는 더욱 맑으면서 씩씩하고. 높으면서 아름다워 개원(開元)ㆍ대력(大曆)시대 사람들보다 뛰어났다는 명망이 중국에까지 전파되어서 천신사부(薦紳士夫)가 모두 칭찬한다. 재종형(再從兄) 체씨(䙗氏)는 고문(古文)을 공부해서 시격(詩格)이 매우 높고 굳세며 부(賦)는 더욱 뛰어나서 국조 이래로 그 짝이 드물다. 나도 문(文)의 명성을 떨어뜨리지 않아서 문예(文藝)를 담론하는 사람 중에 이름이 참여되고, 중국 사람에게도 제법 칭찬을 받는다.

 

그리고 4부자(四父子)가 함께 제고(製誥)를 맡았다. 선대부께서 작고하자, 형이 또 호당(湖堂)에 사가(賜暇)되었으며, 3형제가 모두 사필(史筆)을 잡기도 했다. 작은형과 나는 같이 과거에 장원했고, 나는 또 세 번이나 원접사(遠接使)의 종사관(從事官)이 되기도 했다. 그리하여 당시에 문헌(文獻)하는 집으로서는 반드시 우리 가문(家門)을 첫째로 꼽았다.

옛적에 유효작(劉孝綽) 일가에 부자와 자매가 함께 문장에 능했는데 일찍이 스스로 자랑하기를,

“허사(許史)의 부귀와 왕사(王謝)의 영화로움도 모두 우리 집 문헌에는 미치지 못했다.”

하였는데, 나도 그렇다고 말한다.】

▶개원(開元), 대력(大曆) : 개원(開元)은 당(唐) 현종(玄宗)의 연호이고, 대력(大曆)은 당(唐) 대종(代宗)의 연호.
▶천신사부(薦紳士夫) : 지체 높은 사람과 사대부
▶재종형(再從兄) 체씨(䙗氏) : 허체(許䙗)
▶유효작(劉孝綽) : 중국 남조 양(梁)나라 사람으로 7살 때부터 글을 잘 짓는다는 칭찬을 얻었고, 관직에 나가서도 시로 양무제(梁武帝)의 칭송을 받았다.

 

허균이 『성소부부고』에 실린 <성옹지소록(惺翁識小錄)>에 자기 집안의 문장과 학문에 대한 자부심을 적은 글이다.

제고(製誥)는 왕에게 교서(敎書) 등을 기초하여 바치는 일을 담당하던 관직인 지제교(知製敎)의 고려 때 명칭이다. 아버지 허엽과 자신을 포함한 3형제가 그런 직무를 담당했을 만큼 4부자가 모두 글재주를 인정받았었다는 이야기다.

사가(賜暇)는 휴가를 내린다는 뜻이지만 사가독서(賜暇讀書)를 가리킨다. 사가독서는 조선시대에 인재를 양성할 목적으로 젊은 문신들 중에서 재행(才行)이 뛰어난 자를 선발, 휴가를 주어 독서 및 연구에만 전념할 수 있게 하고 그 경비 일체를 나라에서 부담하던 제도이다. 세종 때부터 실시되었다. 따라서 사가독서를 한다는 것은 뛰어난 인재로서의 가능성을 인정받았다는 의미가 된다. 처음에는 자택에서 독서를 하도록 했으나 이후 진관사(津寬寺)와 용산의 사찰 등을 활용하다가 중종 12년인 1517년, 옥수동 동호대교 북단에 있었던 조선시대의 포구인 두모포(豆毛浦)에 동호독서당(東湖讀書堂)을 설치하였다. 글에서 말하는 호당(湖堂)은 동호독서당(東湖讀書堂)이다.

종사관(從事官)은 보통 문관 5~6품의 직계로, 사행(使行) 중에 정사(正使)와 부사(副使)를 보좌하면서 생긴 일을 기록하였다가 귀국 후에 왕에게 상주하는 것이 직무였다. 또한 중국의 사신 일행과 서로 글을 주고받는 일이 필연적으로 행해지기 때문에 문장실력이 뛰어난 인물로 종사관을 삼는 것이 관행이었다. 허균은 박학한 지식과 뛰어난 기억력 그리고 유려한 문장 실력으로 세 번이나 조선을 방문하는 중국 사신을 국경으로 가 맞아들이는 원접사(遠接使)의 종사관 직에 뽑혔었다.

 

허균의 부친 허엽(許曄)은 성균관 대사성(大司成)과 홍문관 부제학(副提學)을 지냈다. 허균의 이복형인 허성(許筬) 역시 당대의 문장가이면서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고 글씨에도 뛰어났다. 대사성, 대사간, 부제학을 거쳐 이조판서에까지 이르렀다. 둘째 형이자 동복형인 허봉(許篈)은 이조좌랑과 창원부사 등을 거쳤다. 과거에 급제한 다음 해에 바로 사가독서를 할 만큼 촉망받던 인재였으나 김효원(金孝元)과 함께 동인의 선봉이 되어 서인들과 대립하다가 유배된 뒤 돌아와서는 정치에 뜻을 버리고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방랑하다가 38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하였다. 이 4부자는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정식으로 관직에 진출하였다. 누나 허난설헌(許蘭雪軒)은 조선시대의 몇 안 되는 여류시인으로 그 명성이 중국에까지 퍼졌었다.

허균이 자부심을 가질 만큼 대단한 집안임에 틀림이 없다.

이것은 허균 개인만의 자부심이 아니다. 《선조실록》에 실린 허엽의 졸기(卒記)에도 이런 대목이 있다.

 

【세 아들인 성(筬)·봉(篈)·균(筠)과 사위인 우성전(禹性傳), 김성립(金誠立)은 모두 문사로 조정에 올라 논의하여 서로의 수준을 높였기 때문에 세상에서 일컫기를 ‘허씨(許氏)가 당파의 가문 중에 가장 최성(最盛)하다.’고 하였다.】

▶최성(最盛) : 가장 성(盛)함

 

<성옹지소록(惺翁識小錄)>에 적은 다른 일화들에서도 허균이 자신의 문장 실력에 대해 갖고 있는 자부심을 엿볼 수 있다.

 

【박연성(朴延城)은 세 번 원접사(遠接使)가 되었고, 정호음(鄭湖陰)도 세 번 원접사가 되었으나 그중 한 번은 내관(內官)을 접대(接待)한 것이므로 박보다는 영예롭지 못하다.

세 번 종사관(從事官)이 된 사람으로는 이삼탄(李三灘)이고, 나도 세 번이었으나 그중 한 번은 내관(內官)이었다. 그러나 내가 빈대한 유 태감(劉太監)은 시를 잘 지어서 창수(唱酬)하는 데 따른 괴로움이 한림(翰林) 과도관(科道官)이 왔을 때보다도 더 심하였으니, 호음(湖陰)이 조용하게 넘긴 것에 비하면 힘이 들었다고 하겠다.】

▶내관(內官) : 환관
▶과도관(科道官) : 중국 명(明)과 청(淸)대에 백관들의 잘못을 규찰하는 사찰기관인 6과급사중(六科給事中)과 도찰원(都察院)의 15도감찰사(十五道監察使)에 대한 통칭.

 

【나는 지제교(知製敎)를 오랫동안 맡았는데 그간에 가장 급박한 적이 두 번 있었다. 경자년(更子年) 의인왕후(懿仁王后) 장삿날에 나는 장생전(長生殿)의 낭관으로서 재궁(梓宮)을 배행(陪行)해서 능(陵)에 가 있었다. 밤중에 영악(靈幄)에 불이 났는데 겨우 내재궁(內梓宮)만을 불에서 구해내었다.

이 일로 조전(朝奠) 때 위안제(慰安祭)를 지내기 위하여 동궁(東宮)에서 나에게 제문(祭文)을 지어오라는 명이 내렸다. 날도 새기 전에 정원(政院)에서 나를 불러 당장 지어 바치라 하였다. 급하기는 하고 당황해서 글도 제대로 되지 않았는데 창졸간에 지은 것이라 하여 사람들이 많이들 칭찬하였으나 매우 부끄러웠다.

 

계묘년(癸卯年) 봄에 한음 상공(漢陰相公)이 이장(移葬)하는 일로 해서 사직을 고(告)하자 이숙평(李叔平)이 초도불윤비답(初度不允批答)을 지었는데, 주상께서 마땅치 않게 여겨, 특별히 나를 불러서는 대궐에 와서 급히 지어 바치라 하였다. 이때 숙평(叔平)이 지은 글이 매우 잘 지은 것이었는데도 버려두고 별도로 지으라는 것인데다 이장하는 데에는 곡절(曲折)이 있어서 말을 만들기가 매우 어려웠다. 땀이 흘러 붓을 제대로 댈 수가 없었을 정도였는데, 겨우 형식을 갖춰서 직접 써서 바치니, 주상께서 하교(下敎)하기를,

“임금의 말은 의당 이러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졸렬한 문장으로 주상의 칭찬을 받기까지 한 것은 또한 그 까닭을 모르겠다.】

▶경자년(更子年) : 선조 33년. 1600년.
▶계묘년(癸卯年) : 선조 36년. 1603년.
▶초도불윤비답(初度不允批答) : 첫 번 올린 사표에 대해 왕이 윤허하지 않는다는 비답

 

【정미년(丁未年)에 나는 여름, 가을, 겨울의 세 분기에 걸친 월과(月課)에서 연달아 장원하였는데 주상께서 법전을 상고해서 시상하도록 하였다.

예조에서 《경국대전(經國大典)》을 상고해 보니,

“홍문관(弘文館) 월과(月課)에서 연3차 1등의 성적으로 수위(首位)를 차지한 자는 가자(加資)한다.”는 규정이 있었다.

당시에 대제학(大提學)은 유서경(柳西坰)이고, 제학(提學)은 신현옹(申玄翁)이었는데, 모두 법전에 기재된 뜻을 몰랐다. 누군가가,

“‘연3차’는 ‘연3등’의 뜻이고 ‘일등’은 즉 ‘상등’의 뜻이다.”

하였으므로, 이 말을 갖추어 회계(回啓)하니, 주상께서 특별히 가자(加資)하도록 하였다.

나는 이렇게 해서 당상관(堂上官)이 되었다.

 

대개, 법전에 이른 ‘연3차’는 석 달에 걸쳐 시행한 아홉 번의 제술(製述)을 모두 장원한 것을 말하고, ‘1등’은 점수의 합계가 30점이 되어 수위를 차지한 것을 뜻한다. 그러나 내 경우는 연3등으로서 아홉 달에 걸친 27회의 시험에서 모두 장원한 것으로 점수의 합계가 1백 2점이나 되니, 법전에 언급된 내용과는 좀 다른 것이다.

일반적으로 평시에는 글에 능한 이들이 많아서 누구도 혼자서 장원을 독차지하는 경우가 없으므로, 이 법은 규정에만 있을 뿐 시행되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보지 못하여 자기의 추측으로 법을 헤아린 나머지 이러한 착오가 있게 된 것이다.】

▶정미년(丁未年) : 선조40년. 1607년.
▶월과(月課) : 매달 시행하는 시험.
▶가자(加資) : 정3품(正三品) 통정대부(通政大夫) 이상(以上)의 품계(品階)를 올리던 일.

 

[허균의 일가가 살았다는 허균 후손의 증언에 따라 가옥을 매입하여 조성한 허균허난설헌 기념공원 내의 가옥, 강릉관광개발공사 사진]

 

『성소부부고』 제12권 <잡문(雜文)>에는 ‘운명(運命)을 풀이하는 글’이라는 제목으로 허균 자신의 운명을 읊은 시가 있다. 여기에서 허균은 대놓고 자신의 글재주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냈다.

 

【나는 기사년 병자월(丙子月) 임신일(壬申日) 계묘시(癸卯時)에 태어났다.

성명가(星命家)가 하는 말이,

“신금(申金)이 명목(命木)을 해치고 신수(身數)가 또 비었으니, 액이 많고 가난하고 병이 잦고 꾀하는 일들이 이루어지지 않겠다. 그러나 자수(子水)가 중간에 있기 때문에 수명이 짧지 않겠으며, 강물이 맑고 깨끗하여 재주가 대단하겠고, 묘금(卯金)이 또 울리므로 이름이 천하 후세에 전할 것이다.”

하였다.

나는 늘 그전부터 이 말을 의심하여 왔으나, 벼슬길에 나온 지 17~8년 이래 전패(顚沛)와 총욕(寵辱)의 갖가지 양상이 은연중 그 말과 부합되고 보니 이상하기도 하다.

일찍이 보건대, 한퇴지(韓退之)는 마갈(磨蝎)로 신궁(身宮)을 하였고, 소자첨(蘇子瞻) 또한 마갈로 명궁(命宮)을 하였는데, 갈(蝎)은 곧 묘(卯)이다. 아, 나 역시 묘시에 출생한 사람으로 그 문장과 기절(氣節)은 진실로 두 분에 미치지 못하나, 참소와 시기를 당하여 시대에 현달하지 못하고 억눌리며 버림받은 자취는 천 년이 지난 오늘날에 있어 부절(符節)을 맞추듯이 다름이 없으니, 아, 괴이한 일이다. 마침내 운명을 해명하는 글을 지어 스스로 풀어 보았다.

▶기사년 : 선조 2년인 1569년.
▶전패(顚沛) : 엎어지고 자빠짐
▶총욕(寵辱) : 총애와 수모
▶한퇴지(韓退之) : 중국 당나라의 문장가인 한유(韓愈). 퇴지는 한유(韓愈)의 자
▶소자첨(蘇子瞻) : 소동파로 알려진 중국 송나라의 문호 소식(蘇軾). 자첨은 소식(蘇軾)의 자.

 

그 글은 다음과 같다.

 

내가 태어나던 해 / 我生之歲兮

금과 목이 상극하였지 / 金木相攻

다행히 수가 중간에서 구원하나 / 賴水中救兮

신수는 또 공을 맞았네 / 身數又空

생시 또한 범했구나 / 生時且犯兮

저 마갈의 궁을! / 磨蝎之宮

아, 하늘이 준 것이라 옮기기 어려워 / 嗟天賦兮難移

참으로 나의 운명 곤궁하도다. / 信我命兮厄窮

금(金)이 목(木)을 치려 하니 / 金欲攻木兮

몸이 항상 허약하고 / 身常弱羸

신수가 텅 비었어라 / 數之空兮

꾀하는 일마다 이루지 못하네. / 謀事而常不克遂

말을 함부로 하여 남들과 저촉하니 / 恣口業兮觸人

이 또한 마갈이 빌미가 되었구나. / 亦磨蝎兮爲祟

아, 하늘도 날 돌보지 않아 / 嗟呼天不弔兮

어려운 액운 만나 죽게 생겼도다. / 當艱厄以至死

깊은 밤 안상(案上)에 기대어 / 夜據枯梧兮

눈물 흘리며 생각하였네. / 涕泣以思

꿈에 만난 한 도인(道人) / 夢一羽人兮

헌걸차고 풍채 좋아라. / 晢而頎長

내 방에 들어와서 / 來入我室兮

명아주 평상 걸터앉아 하는 말이 / 踞我藜床

그대는 왜 운명을 원망하는가? / 君奚怨命兮

그대의 수명은 매우 길다. / 君壽之孔長

일러주노니 하늘을 원망하지 말라. / 謂居勿怨天兮

하늘이 그대에게 문장을 주었잖은가. / 天賦君以文章

육기(陸機)의 풍부함과 사영운(謝靈運)의 화려함에다 / 陸多謝麗兮

송옥(宋玉)의 염미함과 반고(班固)의 향기로움일세 / 宋艶班香

비단무늬 휘황찬란하듯 / 綺組煥爗兮

생황이며 종소리 성대히 울리 듯하니 / 笙鏞鏗鏘

이것이면 족히 일세에 우뚝하거늘 / 特此足以高一世

고관대작이 어찌 이를 당하랴 / 豈軒冕之敢當

저 큰 갓 쓰고 호령하는 이들 / 彼峨弁而呵呼

그 속마음은 더럽기 그지없다네. / 揆其中則糞穢

비록 저들에게 화려한 옷을 입혔지만 / 縱衣彼以斧藻兮

그 보잘 것 없음이 하인으로 날개를 삼음 같도다 / 輿土梗而翼以徒隷

부귀만을 누리고 마멸되어 흔적 없으니 / 富貴而磨滅無紀兮

이 또한 그대 원치 않는 것이라. / 亦君之所不愒

내 이제 진재에게 아뢰어 볼까 / 今吾將告眞宰兮

그대의 태어난 해 바꿔달라고 / 易君之生歲

그래서 그대의 재주 빼앗고 / 奪君之才兮

그대의 총명 어둡게 하고는 / 闇君之慧

그대에게 높은 벼슬 내리고 / 高其爵位兮

총애와 권세 후히 내리면 어쩌겠나! / 厚其寵權

그러나 초목과 함께 성하고 썩고 하는 것은 / 薾然與草木而同腐兮

그대 반드시 원하지 않으리라 / 君必不願爲焉

군자(君子)란 / 嗟之君子兮

다만 하늘에 맡길 뿐 / 只任之天

굳이 재주와 총록을 다 함께 얻으려면 / 固使才而得其寵祿兮

저 좌구명(左丘明)과 사마천(司馬遷)이 앞서 얻었고 / 彼瞽史與腐令兮幾得乎先

저 창려의 유로와 / 唯昌黎之儒老兮

미산의 소선은 / 與眉山之蘇仙

출생한 때가 모두 마갈궁을 만나 / 時並丁乎磨蝎兮

다 같이 고상한 문장 전파하였네. / 總高文之播傳

두 사람은 늘 고단한 운명을 원망했지만 / 蓋二子常怨其命隻兮

후세에 이름 전하는 데는 거리낌 없었다네 / 終不害夫千年

조양으로 쫓겨나고 / 潮陽之貶兮

무창으로 좌천된 것은 / 武昌之遷

출생한 시(時)가 좋지 않아서일 뿐 / 適妨之辰兮

운명이 험난한 건 아니라네. / 非命之邅

이제 그대의 이름이 / 今君之名兮

이 두 분과 비등하니 / 肩於二子

원망하여 허물하지 말게나. / 莫怨以咎兮

평탄하면 가고 팬 곳에서 멈추게나. / 流行坎止

편안하고 한가하게 인간 세월 보내고 / 優哉游哉卒歲兮

나중에 선계(仙界)로 날 찾아오시게 / 終妨我於丹丘

푸른 난새 타고 / 駕靑鸞兮

붉은 규룡 몰고서 / 驂赤虯

오색구름 찬란한 누각 / 吾與躋兮

나와 함께 올라보세 / 五城之樓

 

이 말 마치고 사라지니 / 言訖不見兮

내가 잠이 깨어 일어났네. / 我寤以起

쓸쓸히 생각하노니 / 悄然而思兮

그 말이 아직도 귀에 쟁쟁하구나. / 言猶在耳

도인은 진정 날 속이지 않으리니 / 信羽人之不我欺兮

내 마음 상쾌하기 그지없네. / 心愉然而怡怡

우리 옥황상제 뜻을 따라 내 스스로 우유자적하리라 / 從吾皇兮自適其適

천명을 즐길 뿐 다시 무얼 의심하랴! / 樂夫天命乎奚疑】

▶창려(昌黎)의 유로(儒老) : 창려는 당(唐) 나라 때 한유(韓愈)의 출생지. 유로는 유가(儒家)의 늙은이란 뜻으로 대유(大儒)임을 뜻한다.
▶미산(眉山)의 소선(蘇仙) : 소선은 송(宋) 나라 때의 문장가(文章家) 소식(蘇軾)의 별호이고, 미산은 소식의 출생지.
▶조양(潮陽)으로 쫓겨나고 : 당(唐) 나라 한유(韓愈)가 형부시랑(刑部侍郞)으로 있을 때에, 헌종(憲宗)이 불골(佛骨)을 금중(禁中)에 들여오자, 그 불가함을 극간(極諫)했다가 조주 자사(潮州刺史)로 좌천되었던 것.
▶무창(武昌)으로 좌천된 것 : 송(宋) 나라 때 소식(蘇軾)이 소(疏)를 올려 직간(直諫)하다가 무창으로 좌천되었던 일.

 

꿈에 나타난 도인이 중국의 대문장가들인 한유나 소식과 견줄만한 재능을 얻었으니, 하늘과 운명을 원망하지 말라고 충고한 말을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모습에서, 허균 스스로가 자신의 문장력에 대해 어떤 자부심을 갖고 있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참고 및 인용 : 성소부부고(한국고전번역원), 인물한국사(이근호,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