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선조들

허균 4 - 정론(政論)

從心所欲 2021. 6. 20. 06:53

정론(政論)은 성소부부고 제11권 문부(文部)의 두 번째 논(論)이다.

 

<정론(政論)>

 

예부터 제왕(帝王)이 나라를 다스림에 혼자서 정치하지는 않았다. 반드시 보상(輔相)하는 신하가 그를 도와주었다. 보상해 주는 사람으로 적합한 사람만 얻으면 천하 국가의 일을 적의하게 다스릴 수 있었다. 이런 것으로 매우 뚜렷이 나타난 것으로는, 요(堯)ㆍ순(舜)ㆍ우(禹)ㆍ탕(湯)이 임금이 되었을 때에는 반드시 고요(皐陶)ㆍ직(稷)ㆍ익(益)ㆍ이윤(伊尹) 등의 보좌가 있었다. 그런 다음에 옹희(雍熙)의 다스림을 이룰 수 있었으니, 하물며 근래의 세상에서야 말해 무엇하랴.

▶보상(輔相) : ≪주역(周易)≫에 나오는 말로, 불급(不及)한 것을 보충하여 돕는다는 뜻.
▶옹희(雍熙)의 다스림 : 나라 전체를 화락하게 하는 정치로 요순시대의 정치를 찬양하는 말에서 연유된 말. 천하가 태평하게 다스려짐.

 

후세의 임금은 비록 잘 다스리기를 원하던 사람은 있었지만 항상 보좌해 줄 적당한 사람이 없음을 걱정하였다. 신하된 사람으로도 비록 옛사람과 같은 포부를 지니고는 더러 어진 임금을 만나지 못함을 걱정하고 더러는 그가 끝까지 쓰이지 못함을 염려하였다. 그러고 보면 정치가 예전과 같지 못하고 다스림이 날이 갈수록 저속해짐은 괴상하게 여길 것도 없으니, 어찌 백성들의 불행이 아니겠는가?

 

우리나라가 비록 궁벽한 곳의 작은 나라이지만 임금과 신하들이 있고 백성과 사직(社稷)도 있다. 위정자(爲政者)가 참으로 삼대(三代)를 본받는다면 그 시절의 옹희(雍熙)의 덕화(德化)에 도달할 수 있으리니, 무슨 어려움이 있으랴.

세종대왕이 황희(黃喜)와 허조(許稠)를 임용했던 것을 본다면 알 수 있다. 저 황희와 허조는 유자(儒者)가 아니었고 재능 있는 신하도 아니었다. 오직 묵직하고 강직한 성품으로 임금이 잘못하는 일에까지 그냥 따르기만 하지는 않는 정도의 사람이었다. 세종 당시만 하더라도 국가의 윤곽이 완성되지 못하여 국사(國事)를 대부분 개혁할 수도 있었는데, 두 신하는 왕도(王道)로써 힘쓰지 않고 다만 너그럽게 진정(鎭定)시키는 것만을 최고로 여겼었다. 이래서야 어떻게 임금의 정사를 도와 익직(益稷)과 같은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겠는가?

▶삼대(三代) : 중국의 하(夏)ㆍ은(殷)ㆍ주(周)
▶익직(益稷) : ≪서경(書經)≫ 익직(益稷)에 순(舜)임금이 시가(詩歌)를 지어 신하인 고요(皐陶)에게 권면(勸勉)하자, 이에 고요가 역시 시가를 지어 순 임금을 권면한 일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임.

 

그러나 나라가 신뢰받고 지금까지 유지되었던 것은 모두 세종(世宗)의 힘이었으며, 두 신하가 보좌의 역할을 했었노라고 말해진다. 만약 고요의 익직 같은 보좌로 정치를 하였다면 그 공렬(功烈)이 왜 이 정도로 낮으랴.

아! 선왕(先王 선조(宣祖))의 정치는 밝았다고 말할 수 있다. 당시에 보좌했던 신하들이야 많기도 했지만 애호하며 서로 믿었던 사람은 이이(李珥)였으며, 전권(專權)을 맡기고 일하도록 책임 준 사람은 유성룡(柳成龍)이었다. 두 분 신하는 역시 유자(儒者)이자 재능 있는 신하였다고 말할 만하였다. 그들에게 임무를 맡기고 일의 성취를 독책하던 뜻이 지극하지 않음이 없었으나, 끝내 그들의 포부를 펴지 못했던 것은 그들의 재능이 미치지 못함이 아니었고 방해하는 것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유성룡은 어지럽기 짝이 없던 임진왜란 때를 당해서 그의 정력과 지혜를 다했으나, 더러는 건져냈고 더러는 막혔던 게 그 당시 형편의 편리함과 편리하지 못함이 있어서였다. 그가 이 순신(李舜臣)을 등용한 한 건(件)은 바로 나라를 중흥시킨 큰 기틀이었다. 그런데 유성룡을 공격하던 사람들이 이순신까지도 싸잡아 죄주었으니, 그 해가 나라에 미침이 그 이상 더 심할 수 없었다.

 

이이가 곤욕을 당했던 것으로는, 의론하던 사람들이 공안(貢案)을 고치려 했음은 불편했다느니, 여러 군(郡)에 액외병(額外兵)을 둠은 부당하다느니, 곡식을 바치고 관작을 제수(除授)받음은 마땅치 못하다느니, 서얼(庶孼)에게 벼슬길을 열어주자 함도 옳지 못하다느니, 성(城)과 보(堡)를 다시 쌓자는 것도 합당치 못하다느니 했던 때문이었다. 병란(兵亂)을 치른 뒤에 왜적을 막고 백성을 편하게 하려고 부지런히 강구하던 방책으로는 위의 다섯 가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 대체로 이이가 앞날을 내다본 것은 수십 년 전에 이미 명확하였다. 몇 가지의 시행은 평상시에는 구차스러운 일임을 알았지만 환난을 생각하고 예방하는 데에는 경장(更張)하지 않을 수 없어서였다. 때문에 뭇 사람들의 꺼려함을 무릅쓰고 과감하게 말했었다. 그러나 속된 선비들은 좁은 소견에 이끌려서 소란하게 된다느니, 타당하지 않다 하여 요란하게 차질을 내었으니 당연히 그의 지위도 허용되지 못했고 나라도 되어질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의 논의하는 자들은 온 힘을 다하여 이이를 배척하면서 앞의 다섯 가지 일을 받들어 시행하는데 오히려 힘을 다하려 않으니 이거야말로 매우 가소로운 짓이다.

▶액외병(額外兵) : 가외군사

 

선왕(先王)이 온갖 정력으로 다스림을 도모하던 시절에, 두 분 신하가 조용하게 그들이 쌓아 둔 포부를 펼 수 있어서, 위에서는 따르고 아래에서는 받들어 딴 논의들이 없었더라면 비록 희운(熙運)으로 회복하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역시 외적의 침략은 막아낼 수 있었으리라.

그런데 지껄여대는 자들이 벌떼처럼 일어나 쪼아대며, 기필코 가로막아 배척하고 나서야 그만두었다. 설사 황희나 허조가 그러한 처지에 놓였더라면, 반드시 두 성(姓)을 섬겼다고 지목받아서 하루인들 낭묘(廊廟)에 편안히 있을 수 없도록 하였을 것이니, 어떻게 세종 때처럼 옹용(雍容)하고 아진(雅鎭)한 일을 하였으랴.

후세에 훌륭한 다스림이 없었던 것은 모두 이런 데에서 연유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되겠는가?

‘밝음으로써 아랫사람을 살피고, 믿음으로써 신하에게 맡긴다.’라는 이 두 가지면 다할 수 있다고 하겠는데, 그 결과야 굳은 의지와 결단에서만 나올 뿐이다.

▶희운(熙運) : 태평성대의 운세
▶두 성(姓)...지목 받아서 : 황희와 허조는 고려의 유신(遺臣)으로 조선에서 벼슬하였다. 그래서 성(姓)씨가 다른 고려와 조선 두 임금을 섬겼다고 비난받았을 소지가 있었다는 뜻.
▶낭묘(廊廟) : 의정부(議政府)

 

[경회루 2층에서 바라본 경복궁 전각 지붕, 문화재청 사진 ㅣ 기둥과 기둥 사이에 설치한 낙양각으로 인하여 마치 액자 속의 그림을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번역문 출처 : 성소부부고(임형택 역, 1983, 한국고전번역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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