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균의 문집『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는 허균이 생전에 직접 편찬한 시문집이다.
허균의 호로는 교산(蛟山)이 가장 널리 알려져 있지만 성소(惺所) 역시 허균의 호이다. ‘깨닫는 곳’이라는 뜻이다. 부부고(覆瓿藁)는 "장독 뚜껑을 덮는 글"이라는 뜻으로 보잘 것 없는 글이라는 겸손의 표시이다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의 작성연대는 정확하지 않으나 전라도 함열현(咸悅縣)으로 유배를 가 있을 때인 광해군 3년과 5년 사이인 1611년부터 1613년 사이로 보고있다. 그동안 자신이 썼던 글을 시부(詩部), 부부(賦部), 문부(文部), 설부(說部) 4부로 나누어 정리했다. 허균이 직접 필사했을 때에는 8권 1책이었으나 지금은 26권 8책으로 소개되고 있다.
『성소부부고』 제11권 문부(文部)에는 ‘논(論)’으로 분류된 12편의 글이 있다. ‘논(論)’은 사리를 판단하여 시비를 밝히는 한문문체의 하나로 논설문의 일종이다. 허균의 ‘논(論)’ 중에서도 <학론(學論)>에서 <호민론(豪民論)>에 이르는 여덟 개의 글은 허균이 당시의 세상을 바라봤던 시각을 볼 수 있는 글이다.
<학론(學論)>
【옛날의 학문하는 사람이란 홀로 제 몸만을 착하게 하려고 하지 않았다.
대체로 이치를 궁구해서 천하의 변화에 대응하고, 도(道)를 밝혀서 뒤에 올 학문을 열어주어 천하 후세로 하여금 우리 학문은 높일 만하고, 도맥(道脈)이 자기를 힘입어 끊어지지 않았음을 환하게 알리려 하였다. 이렇게 하는 것을 유자(儒者)의 선무(先務)로 하였으니 그들의 마음씨는 역시 공변되지 않은가?
▶공변되다 : 행동이나 일 처리가 사사롭거나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공평하다. 어원은 공정함, 공평함을 뜻하는 공반(公反). |
근세(近世)의 학자라고 말해지는 사람이란 우리 학문을 높이기 위해서만이 아니며, 또한 홀로 제 몸만을 착하게 하려고도 않는다. 입으로 조잘대고 귀로 들은 것만을 주워 모아 겉으로 언동(言動)을 꾸미는 데에 지나지 않으나, 자신은,
“나는 도(道)를 밝히오. 나는 이치를 궁구하오.”
하면서, 한 시대의 보고 들음을 현혹시키고 있다. 그러나 그 결과를 고찰해 보면 높은 명망을 턱없이 거머쥐려던 것뿐이었고, 그들이 본성(本性)을 높이고 도(道)를 전하는 실상에 있어서는 덩둘하여 엿본 것도 없는 듯하니 그들의 마음씨는 사심(私心)이었다. 그렇다면 공(公)과 사(私)의 분별이요. 참과 거짓의 판별이다.
어찌하여 수십 년 이래로 말하는 사람이라면,
“모(某)는 학자이고, 모(某)는 진유(眞儒)다.”
하면서 망령되게 서로 추켜주고 자랑하기에 바빠하는가? 그런 일 또한 미혹된 짓이다.
일찍이 보건대, 소위 진유(眞儒)란 세상에 쓰이게 되면 요순(堯舜) 시대의 다스림과 우(禹)ㆍ탕(湯)ㆍ문(文)ㆍ무(武)의 공적이 사업에 나타난 것들이 이와 같았고, 쓰이지 못하더라도 공맹(孔孟)의 가르침과 염(濂)ㆍ낙(洛)ㆍ관(關)ㆍ민(閩)의 학설을 책에 기록한 것들이 또 이와 같아서 비록 천만년이 지나도 이의(異議)를 제기할 사람이 없는 것이다. 이건 다름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씨가 공변되어서다.
▶우(禹)ㆍ탕(湯)ㆍ문(文)ㆍ무(武) : 중국 전설상의 왕조인 하(夏)왕조의 시조인 우임금, 중국 고대 상나라를 창건한 탕왕(湯王), 중국 고대 주왕조(周王朝)의 기초를 닦은 명군(名君)으로 추앙받는 문왕(文王)과 그의 아들로 주(周)나라를 건국한 무왕(武王). ▶염(濂)ㆍ낙(洛)ㆍ관(關)ㆍ민(閩) : 주돈이(周敦頤), 정호(程顥), 정이(程頤), 장재(張載), 주희(朱熹)가 살던 곳을 가리키나, 글에서는 송(宋)나라의 성리학을 지칭하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
오늘날의 거짓 선비는 실속 없고 근거 없는 말을 하여 입을 열면 이윤(伊尹)ㆍ부열(傅說)ㆍ주공(周公)ㆍ공자(孔子)의 사업을 자신이 담당할 수 있다고 하지만, 그가 쓰여지면 손과 발을 놀리지도 못하고 실패하여 자신을 수습할 수도 없게 되어 당세의 비웃음과 후세의 의논이 있기 마련이다. 약간 더 교활한 자들은 이렇게 되리라고 미리 요량하고, 명망이 훼손됨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문득 나서지도 않고 그의 졸렬함을 감춰버린다. 이런 것 역시 다름이 아니라 그 마음씨가 사심(私心)이어서다.
▶이윤(伊尹)ㆍ부열(傅說) : 이윤은 탕(湯)을 도와 은(殷) 나라의 왕도 정치를 이룩한 이름난 재상이고, 부열은 은나라 고종[殷高宗] 때의 어진 재상. |
슬프다! 거짓이 참을 어지럽게 하여 온통 이러한 극단에 이르게 하고는, 마침내 임금으로 하여금 도학(道學)을 싫어하여 쓸 만한 것이 못 된다고 여기도록 하였다. 이는 거짓과 사심을 지닌 자들의 죄이지 어찌 진유(眞儒)들이 그렇게 하도록 하였으랴.
우리나라에도 이른바 도학(道學)한다는 선비들이 더러는 화란(禍亂)에 걸리고 더러는 끝까지 그의 시정책을 펴지 못하기도 하였다. 모르기는 하지만, 당세 임금으로 있던 분들이 과연 그들의 도(道)를 써서 시행했더라면, 공렬(功烈)을 옛사람에게 비길 수 있었고 이 세상을 요순의 시대와 같게 할 수 있었겠는가?
▶공렬(功烈) : 큰 공로 |
국론(國論)이 두 갈래로 나뉨으로부터, 사사로움에 치우친 의논들이 무척 치열해져 더러는 저들만 이어야 한다고 이들을 헐뜯고, 더러는 갑(甲)만을 높이고 을(乙)은 배척하여 소란하게 결렬되어서 그 옳고 그름이 정해지지 못했다. 이거야말로 모두 사심으로 듣고 보아서 그렇게 되지 않음이 없으니 어느 누구를 탓하랴!
얼마 전에 이른바 오현(五賢)을 문묘(文廟)에 배향하였다. 당시 의논하던 사람들은,
“다섯 분 이외에 배향해서는 안 된다.”
했는데, 이것도 매우 가소로운 일이다. 어진 이들이 어떻게 정해진 인원이 있다고 반드시 다섯 분으로만 한정하랴. 만약 그렇다면 이후에는 공자나 안자(顔子) 같은 학자가 있더라도 배향하지 못한다는 것인가? 공자ㆍ안자 같은 분들의 탄생은 예정할 수 없는 것이다.
또 야은(野隱) 길재(吉再) 같은 충성심으로 우탁(禹倬)ㆍ정몽주(鄭夢周)의 학통을 직접 전해 받았고, 서화담(徐花潭)의 초월한 경지를 혼자 터득함과 이율곡(李栗谷)의 밝은 식견과 큰 아량까지를, 어떻게 후중함이 적으니 취할 게 없다고 하여 전혀 거론하지 않는 것인가? 더러는 헐뜯는 사람도 있으니 이점 또한 사심과 거짓의 해악이다.
▶오현(五賢) : 김굉필(金宏弼)ㆍ정여창(鄭汝昌)ㆍ조광조(趙光祖)ㆍ이언적(李彦迪)ㆍ이황의 5인. 사림에서는 선조 때부터 이황을 제외한 4인을 ‘동방의 사현(四賢)’이라 하여, 공자를 모시는 사당인 문묘(文廟)에 모시려고 노력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광해군 때에 퇴계 이황까지 포함하여 5인을 문묘에 종사(從祀)하게 되었다. 김굉필을 비롯한 이언적까지의 4인은 정몽주에서 시작하여 길재-김숙자-김종직-김굉필, 정여창 - 조광조, 이언적으로 이어지는 사림의 학통이다. |
만약 한훤(寒暄)과 일두(一蠹)가 불행히도 1백 년 후에 태어났다면 어떻게 그러한 헐뜯김을 당하지 않으리라고 보장하랴. 또 율곡(栗谷)으로 하여금 다행히도 1백 년의 앞에만 태어나게 했다면 그분이 존숭받지 않으리라는 것을 어떻게 보장할 것인가? 이건 마음씨의 공변되지 못함에서 연유되는 것이요, 관찰하기는 싫어하고 남의 말 듣기만을 숭상하는 일반적인 세태에서 나오는 짓이다.
▶한훤(寒暄) : 김굉필(金宏弼)의 호 ▶일두(一蠹) : 정여창(鄭汝昌)의 호 |
임금이 진실로 공(公)과 사(私)의 분별을 밝게 한다면, 참과 거짓도 알아내기 어렵지 않으리라. 이미 공과 사, 참과 거짓을 분별하면 반드시 이치를 궁구하고 도리를 밝히는 사람이 나와서 그들이 배운 것을 행하리라. 그들의 겉이나 꾸미는 자들은 감히 그들의 계책을 행하지 못하여 모두 깨끗이 거짓을 버릴 것이며 나라의 커다란 시비(是非)도 역시 따라서 정해지리라.
그렇다면 그러한 기틀[機]이 어디에 있을까? 임금의 한 몸에 있으며, 역시 ‘그 마음을 바르게 해야 한다.’라고 할 수밖에 없을 뿐이다.】
번역문 출처 : 성소부부고(한국고전번역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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