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선조들

허균 1 - 실록 사관과 찌라시 주필

從心所欲 2021. 6. 11. 12:23

 

어제 아침에 똥을 밟았다. 어쩌다가 실수로 이름만 조선이고 실체는 왜구인 신문의 칼럼기사를 클릭한 것이다. 얼마나 지저분한 똥인지 하루가 지난 지금도 구역질이 나서 못 견딜 지경이다. 제목이 “이제 우리도 일본에 돈 달라는 요구 그만하자.”이다. 김양호가 내린 판결에 맞장구쳐주려는 의도에서 내지른 글임은 제목만 봐도 알 수 있다.

역시나 글 내용이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1965년 한일 양국은 청구권 협정을 통해 ‘두 나라와 국민의 청구권이 완전하고 최종적으로 해결됐다’는 데에 합의했다. 이때 일본에서 받은 돈 5억 달러는 당시 일본 외환 보유액의 4분의 1에 이르는 거액이었다. 이 돈이 한강의 기적을 이루는 마중물이 됐음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일본에 대한 청구권의 완전하고도 최종적인 해결에 따라 우리 정부는 국내 징용 피해자들에게 신고를 받고 보상금을 두 차례에 걸쳐 지급했다.】

 

그러면서 우리나라의 올해 구매력 기준 1인당 국민소득이 일본보다 높아 진정한 극일(克日)을 달성했으니 이제 더 이상 일본에게 돈 달라는 소리는 그만하자고 아가리를 놀렸다.

신문 찍어내서 바로 동남아에 포장지로 수출하는 회사라고는 하지만, 그 공장에서 편집국장을 거쳐 주필이 된 능구렁이가 문제의 핵심을 몰라 이딴 개소리를 늘어놓았을 리는 없다. 인권을 침해한 가해자에 대한 책임 규명 요구가 본질일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배상요구를 돈이나 달라고 징징대는 꼴로 비하하고 희화하여 애초부터 소송 당사자들에게 모욕을 주려는 의도에서 작심하고 쓴 글이라 의심할 수밖에 없다. 그 악의의 본심이 이 정권의 몰락인지 아니면 본국인 왜국의 혐한 애독자를 위한 배려인지는 알 수 없다.

 

더 구역질나는 똥도 있다.

“일본인들이 한국에 있던 재산의 개인 청구권을 행사하겠다고 하면 감당할 수 있나?”고 오히려 대한민국에 묻는다. 하마터면 죄 없는 모니터 죽탱이를 날릴 뻔했다.

잘하는 거라고는 외우는 것밖에 없는 히코모리는 법조문으로 벽에다 똥칠을 하고, 장관실 문을 발로 차고 들어간 것을 무용담으로 아는 양아치 족속들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려 개도 안 먹을 똥을 만들어내고 있다.

왜 이런 모지리들 때문에 대한민국과 대한민국 국민이 대신 부끄러움을 당해야 하는지 기가 찰 노릇이다.

 

토왜 기더기들이 잘 하는 짓이 있다. 팩트 한두 가지를 조합해서 소설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 방법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예전에 우리 조상가운데도 자신이 지식이 조금 많다고 자부하여 남들보다 잘 난 줄 아는 모지리들이 다 쓰던 방법이다.

《광해군일기》 광해 10년 3월 19일에 실록 사관(史官)은 이런 기사를 실었다.

 

【폐모론(廢母論)이 이이첨으로부터 나오긴 하였지만, 그의 뜻은 그저 역적을 토벌한다고 자처하며 준엄하게 논하여 임금의 뜻을 맞추려는 데에 불과하였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폐모론이 일단 행해지게 되자 이첨 스스로 ‘일이 이루어진 뒤에는 나쁜 이름이 나에게 돌아올 것이다.’고 의심이 들기도 하였다. 또 그렇게 되면 무엇을 빙자하여 총애를 굳힐 길이 없게 될 듯하자, 마침내 주문(奏聞)한 뒤에 영원히 폐출해야 한다는 의논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그 반면 허균은 공을 세워 속죄(贖罪)하기에 급급한 나머지, 곧장 폐출하여 서인(庶人)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의논을 극력 주장하였으므로, 의논이 마침내 두 갈래로 나뉘어졌다. 그런데 왕의 뜻은 허균의 의논을 따라 폐출한 뒤 민가에 놔두고 이진(李珒)과 이의(李㼁)를 처치했던 방식으로 처치하려 하였는데, 올린 폄손절목(貶損節目)을 보니 그저 후궁(後宮)의 예를 모방한 것으로서 명호(名號)는 낮추었어도 봉양하는 것은 모자람이 없는 것이었으므로, 마침내 화를 내고 사목을 판하하지 않은 것이었다.】[《광해군일기》 광해 10년 3월 19일]

▶이진(李珒) : 광해군의 형인 임해군(臨海君).
▶이의(李㼁) : 광해군의 이복동생이자 인목대비의 아들인 영창대군(永昌大君)
▶판하(判下) : 신하가 올린 안건에 대하여 임금이 검토하여 그 가부(可否)를 결정하는 것.

 

사관의 이 기사에서 팩트인 것은 이이첨과 허균이 모두 폐모론을 주장한 것과, 광해군이 인목대비를 대비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는 폄손절목을 거부한 것이다. 그런데 이 세 가지 팩트를 제외하고 거기에 덧붙여진 글들은 모두 사관의 생각들일 뿐 어떠한 근거도 없는 말이다. 요즘으로 치자면 뇌피셜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거기에 거짓말까지 더했다.

 

사관이 ‘이진(李珒)과 이의(李㼁)를 처치했던 방식’이라고 쓴 표현은 마치 광해군이 임해군과 영창대군을 처치하기 위하여 엄청난 술수라도 부린 듯한 뉘앙스다. 물론 이런 표현 또한 글을 쓴 사관의 의도다. 그러나 그 실체는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 때에 그들이 고심하여 편찬한 《광해군일기》의 즉위년 2월과 5년 5월의 기사만 다시 훑어보아도 다 알 수 있다. 더욱이 인목대비를 폐출시키는 폄손절목이 대비라는 명호만 낮추고 다른 대우는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 불만이라 광해군이 화를 내고 승인하지 않았다는 말은 스스로 유학자의 염치를 내던진 말이다. 인목대비를 지키기 위해 광해 10년 내내 광해군이 어떠한 고심과 노력을 했는지는 역시 《광해군일기》에 저들이 최대한 깎고 비틀고 뒤집었어도 그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다.

지금 토왜기더기들은 이 기사를 썼던 사관이 한 짓을 똑같이 반복하고 있을 따름이다.

위 기사를 쓴 사관은 같은 기사 말미에 또 이렇게 적었다.

 

【허균과 같은 간악한 역도(逆徒)들도 감히 흉계를 행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허균이 마침내 군대를 일으켜 궁을 도륙하려다 자신이 거꾸로 역모에 걸려 죽었는데, 대비가 시종 온전할 수 있었던 것은 이 때문이었다.】

 

허균이 역모에 몰려 죽은 것은 맞다. 그런데 그 때문에 인목대비가 온전할 수 있었다는 얼토당토않은 말은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다. 재위 내내 인목대비를 죽이려고 한 흉악범으로 광해군을 몰아놓고는, 난데없이 폐모론을 주장했던 허균이 역모를 꾸미려다 들켜서 죽는 바람에 인목대비가 살아남았다고 한다. 이 의문에 대한 답은 그로부터 5달 뒤의 기사에 사관이 직접 적어 넣었다.

 

【이 때에 허균이 무사를 많이 모으고 은밀히 승군을 청해서는 곧바로 대비궁을 범하여 일을 먼저 일으키고 나중에 아뢰려고 하였는데 왕도 이미 허락하였다. 그런데 삼창(三昌)의 집에서 그 반란의 상황을 염탐해 알아내고는 허균이 대론을 가탁하여 남몰래 불궤(不軌)를 도모한다고 밀계를 올리니 왕이 크게 놀라 마침내 기준격 등의 소를 내려서 마치 전의 일을 캐묻는 것처럼 한 것이다. 그러자 삼사에서는 또 허균이 반역을 도모한 정상을 아뢰고 아울러 소를 올린 유생을 다스리기를 청하였으므로 이에 사방으로 체포하러 나간 것이다.】 [《광해군일기》광해 10년 8월 21일]

 

광해 10년 8월 21일인 이날, 광해군의 명령에 의하여 허균의 처첩의 집에 대한 문서 수색이 있었다. 이어서 삼사(三司)에서 광해군에게 비밀 글을 올렸고 광해군은 이에 대한 비답(批答)을 봉하여 내렸는데, 위의 글은 사관이 그 기사 끝에 덧붙인 글 중의 일부다.

광해군이 허균과 은밀히 짜고 승군(僧軍)을 동원하여 인목대비를 처치하려고 했는데, 허균이 반란을 일으키려한다는 소문이 돌자 광해군이 놀라서 자신과 허균이 계획한 일이 발각 날까봐 뒤늦게 허균을 조사하는 척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결국 허균이 역모로 몰려 죽었기 때문에 인목대비가 무사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소설 창작 능력이 요즘의 기더기들과 비교하여 누가 더 나은지 구별하기 어렵다. 앞에 《광해군일기》의 다른 기사들을 살펴보지 않고 이 글을 읽는 사람 중에는 이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기더기들이 쓴 기사를 진실로 철썩 같이 믿듯이 말이다.

 

광해군이 인목대비를 보호하려는 노력은 실록에 나와 있는 일들이니 다시 또 반복할 필요조차 없다. 광해군이 인목대비를 없애려 했다면 이미 인목대비의 아버지인 김제남(金悌男)이 역모로 처단되었을 때도 가능했고, 1616년부터 끈질기게 제기되고 있는 폐모론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자연히 해결될 일이었다. 인목대비 폐모 주장은 이 기사가 삽입된 1618년에도 계속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광해군이 허균과 짜고 무력을 동원하여 인목대비를 죽이려 했다는 발상은 도대체 어떤 머리에서 나오는 것일까?

 

허균은 이 기사가 삽입된 날짜로부터 5일 뒤인 1618년 8월 26일에 처형되었다. 실록에는 저자거리에서 처형되었다고 하였는데 목이 잘려 효시된 것으로 전한다. 그런데 이 허균의 죽음을 두고도 뒷말이 많다.

 

허균이 이러한 불행에 휘말리게 된 시초는 예조 좌랑으로 있던 기준격(奇俊格)이 광해군에게 허균(許筠)이 역모를 꾀한다는 상소를 비밀리에 올린 것으로 시작되었다. 당시 허균은 좌참찬(左參贊)이었다. 좌참찬은 의정부의 정2품 관직이다. 그런 허균이 역모를 꾀하려 했다는 것이다. 기준격의 아버지 기자헌(奇自獻)은 한 때 허균과 가깝게 지내는 사이였지만, 당시는 허균과 사이가 벌어진 상태였고, 기자헌은 폐모론에 반대하면서 정치적 위기에 처한 상태였다. 기자격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한 때 허균을 스승으로 모신 적이 있었는데, 그때 허균의 집에 드나들면서 들었다는 얘기를 근거로 허균을 역모의 주모자로 고변한 것이다. 이를 계기로 허균에 대한 역모 혐의가 조정에서 8개월가량 논의되던 중, 또 다른 역모 혐의가 제기되면서 결국 죽음에 이르렀다.

 

허균의 처형에 대한 기사에 사관은 기자헌이 “예로부터 죄인에게 형장(刑杖)을 가하며 신문하지 않고, 사형이 결정된 문서도 받지 않은 채 단지 죄인의 범죄 사실을 진술한 말로만 사형에 처한 죄인은 없었으니 훗날 반드시 이론이 있을 것이다.”라는 말을 했다고 사론으로 적었다. 광해군이 허균의 입을 틀어막기 위하여 제대로 심문도 안 하고 서둘러 형을 집행했다는 뉘앙스를 남기고 싶었던 것이었다.

허균이 죽기 하루 전인 8월 23일의 기사다.

 

【국청(鞫廳)이 아뢰기를,

"김윤황(金胤黃)과 하인준(河仁浚)의 공초가 이와 같습니다. 죄인을 이에 잡았으니 온 나라의 경사입니다. 윤황, 인준은 모두 적 허균과 같은 당으로서 이미 승복하였으니 적 허균에게는 다시 물을 만한 일이 없습니다. 면질시키는 거조는 본래 이와 같은 경우에는 시행해서는 안되니, 율문에 의거하여 결안(結案)을 받아서 나라의 형벌을 바루소서."】

 

역적을 신문하기 위해 설치된 임시관청인 국청(鞫廳)에서 이제 공범들의 자백으로 모든 것이 드러났으니 허균에게는 더 물어볼 것도 없이 빨리 형을 집행하라는 것이다.

이에 광해군은 이렇게 답했다.

 

【"단지 윤황 등의 승복만으로 결안을 받는다면 근래 당을 모아 역모를 한 일은 결안(結案) 중에 넣지 않을 것인가. 그렇다면 단지 흉격(兇檄) 등의 일로만 정형에 처할 것인가. 다시 상세히 의논하여 아뢰라."】

▶흉격(兇檄) : 내용이 흉악한 격문. 당시 허균은 심복을 시켜 남대문에 흉서(兇書)를 붙인 혐의도 받고 있었다.

 

허균에게 새로 추가된 흉악한 격문을 붙인 혐의에 대해서만 처벌하고 원래 기자격이 제기했던 역모 작당 혐의는 더 조사하지 않고 그대로 두고 넘어갈 것이냐고 광해군이 되묻고 있다.

그리고 같은 날에 또 이런 전교를 내렸다.

 

【“역적 허균은 물을 만한 일이 많으니 지레 먼저 정형(正刑)에 처해서는 안 된다.”】

 

조사가 끝날 때까지 죽여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광해군은 다음 날에도 또 이런 전교를 내린다.

 

【"근일에 국청(鞫廳)에서 신문하는 것이 자못 허술한 일이 많다. 김윤황과 하인준이 공초한 일 중에 다시 신문할 만한 단서가 있는 데도 상세하게 캐묻지 않고 먼저 역적의 괴수를 정형할 것을 청하니 극히 타당하지 못하다. 금후로는 죄인이 공초한 일에 대해서는 다시 더 반복하여 상세하게 물으라.

 

또 역적 허균이 저지른 짓이 단지 흉격과 흉서에만 그친다 하더라도 당연히 반복하여 끝까지 물어서 그 실정을 다 알아낸 연후에 나라의 형으로 바루어야 할 것이다. 더구나 근래에 역모를 꾀하여 당을 모은 일과 산에 올라가 밤에 소리쳐서 도성의 백성들로 하여금 마치 바로 뒤에 있는 불길이나 맹수를 피하듯이 무너져 도망하게 한 것은 진실로 만고에 없던 큰 변고이다. 이 일은 옥당이 차자로 논했을 뿐만이 아니라 나라 사람들도 모두 알고 있는 것이다. 그가 서궁(西宮)을 빙자하여 의탁해서 중외의 무뢰한 흉도들을 불러 모았고, 날짜를 정해 거사하려고 재삼 중들을 먹여주는 등 정적이 매우 수상하다는 상황에 대해서는 위에서도 들은 지 오래이다. 그런데 한 사람도 상변하는 자가 없었던 것은 근래에 매양 고변한 자를 다스렸기 때문이다. 나랏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찌 통탄스럽지 않겠는가.】

 

여기 어디에 광해군이 서둘러 허균을 죽이려고 한 정황이 보이는가? 아니면 이것이 광해군이 벌인 쇼라는 것인가?

사관은 이와 같은 시각으로 부지런히도 온갖 곳에 사론을 달아놓았다. 그 양이 너무 많고 광범위하여 어느 한 사람이 모두 한 짓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무리들이 한 마음으로 한 짓일 것이다. 오직 정변을 일으킨 자신들이 옳고 광해군은 쫓겨나 마땅한 임금이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실록 여기저기에다 사론이라는 명목으로 궤변을 늘어놓았다. 그들의 그러한 노력이 헛되지 않아 오늘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사관이 조작질한 헛소리들을 사건의 전말로 믿고 인용하고 있다.

 

허균이 실제로 반역을 계획했는지는 아직도 미지수다. 그는 죽을 때까지도 자신의 혐의를 부인했다. 같은 대북이었던 이이첨의 모함에 걸린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허균의 아버지는 동인의 영수였고 장인은 붕당의 원인 제공자였던 김효원(金孝元)이었다. 이런 배경에다 허균은 유성룡의 문인이기도 했다. 본인 자신이 크게 정치색을 띄지는 않았지만 남인으로 분류되었고, 뒤에 이이첨과 가까워지면서는 대북세력이 되었다. 허균은 전면에 나서서 인목대비의 폐비를 주장한 괘씸죄에 걸려 죽어서도 서인 사관들에 의하여 역사 속에서 부관참시 되었다. 그리고 이들이 쳐 놓은 틀에 갇혀 조선 400년의 세월을 보냈다. 세월이 지나면 대부분 신원되었던 다른 역모 혐의자들과는 달리 허균은 끝끝내 신원되지 못한 채 조선시대를 마감했다.

 

허균에 대한 전통적 평가는 사람됨이 경박하다거나 인륜도덕을 어지럽히고 이단을 좋아하여 행실을 더럽히고 무절제했다는 등 부정적 평가가 주류를 이룬다. 그에 대한 재평가가 시작된 것은 거의 근래의 일이다. 그러면서 누군가는 허균을 괴짜라 하고 천재라 하는가 하면 꿈을 이루지 못한 혁명가라고도 한다.

 

허균은 연암 박지원 못지않게 많은 글을 남긴 인물이다. 전시(殿試)에 대독관(對讀官)으로 참가하여 조카와 조카사위를 급제시켰다는 혐의로, 광해 2년인 1610년에 탄핵을 받아 전라도 함열현(咸悅縣)으로 유배를 갔을 때, 그곳에서 자신이 그동안 썼던 글을 손수 정리하여 문집을 남겼다. 지금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라는 이름으로 전한다. 그럼에도 우리가 허균에 대해 아는 것은 「홍길동전」이나 누나 허난설헌 정도다.

 

허균의 역모 사건이 처리된 뒤 광해군이 반포한 교서에는 역적의 우두머리로 허균을 지목하여 비난하는 글 중에 이런 구절이 들어있다.

“붓을 놀리는 자그마한 기예로 출세하여 등급을 건너뛰어 외람되이 작위를 차지하여 녹을 훔쳤다.”

 

토왜 찌라시 주필에게도 들려주고 싶은 말이다.

역적에 대한 악의적 표현이기는 하지만 허균의 글 솜씨만큼은 당대에도 인정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한문으로 된 허균이 남긴 글들의 솜씨가 어느 정도인지는 현대의 우리로서는 알기가 어렵다. 하지만 그가 남긴 글 몇 편이라도 읽어 본다면 사관의 곡필에 물들지 않은 허균의 진짜 모습을 조금이라도 일게 되지 않을까 싶다.

 

[허균/허난설헌의 생가터로 추정되는 곳에 조성된 유적공원, 강릉관광개발공사 사진ㅣ강원도 강릉시 난설헌로 193번길 1-16]

 

 

 

 

 

참고 및 인용 : 조선왕조실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