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선조들

선비는 의당 죽어야 한다.

從心所欲 2021. 1. 23. 08:11

【나는 조정에 벼슬하지 않았으므로 사직을 위해 죽어야 할 의리는 없다. 허나 나라가 오백년간 사대부를 길렀으니, 이제 망국의 날을 맞아 죽는 선비 한명이 없다면 그 또한 애통한 노릇 아니겠는가? 나는 위로 황천(皇天)에서 받은 올바른 마음씨를 저버린 적이 없고 아래로는 평생 읽던 좋은 글을 저버리지 아니하려 한다. 길이 잠들려 하니 통쾌하지 아니한가. 너희들은 내가 죽는 것을 지나치게 슬퍼하지 말라.】

 

황현(黃玹, 1855 ~ 1910)이란 선비가 대한제국 말에 자결에 앞서 쓴 ‘자식들에게 남기는 글’이라는 유서이다.

매천(梅泉) 황현은 철종 때인 1855년 전라도 광양현 봉강면 서석촌에서 태어났다. 그의 선조 중에는 세종대왕 때의 명재상으로 알려진 황희가 있었지만, 인조정변이후로는 가문이 몰락하여 그가 태어난 시절에 이르면 시골의 유생집안에 불과한 처지였다.

 

황현도 한 때는 벼슬에 뜻을 두어 과거시험을 치르고 1888년 34세에 성균관 생원이 되었다. 하지만 당시 과거장의 폐해를 직접 목격하고 나서는 이내 낙향하여 더 이상 관직에 연연하지 않았다. 이후 황현은 처사형 선비로 지내면서 많은 시를 짓고 아울러 고종 1년인 1864년부터의 조선의 정치, 경제를 포함한 역사를 기록해갔다. 특히 1894년의 갑오경장(甲午更張) 이후에는 이 역사 기록에 더욱 몰두하여 조선의 국권이 일제에 침탈된 1910년, 그가 자결할 때까지 이 책의 저술에 매진하였다. 그리하여 그가 남긴 조선과 대한제국 47년에 대한 역사서가 지금 전하는 『매천야록(梅泉野錄)』이다.

 

황현은 생전에 실학자인 연암 박지원을 학문적으로 흠모하였다. 그는 “내 평소에 선생의 문장을 좋아하였다”고 하면서 “조선조의 문장은 선생에 이르러 볼 만한 것이 그쳤다”라고 한탄하며 ‘경세치용’의 연암 학문이 당대까지 이어지지 못함을 늘 아쉬워하였다고 한다. 또한 다산 정약용의 서적을 탐독하고는 『목민심서』, 『흠흠신서』 등 정약용의 저술을 우리나라에서 전무후무한 작품이라고 높이 평가하였다.

 

황현의 시문집인 『매천집(梅泉集)』에는 황현의 동생인 황원(黃瑗)이 쓴 <선형 매천공의 사행 몇 가지를 기록하다(先兄梅泉公事行零錄)> 라는 글이 있다. 글에서 동생 황원은 1910년 대한제국이 경술국치를 맞게 되던 당시의 황현의 행적을 적어 놓았다.

 

【경술년 7월 25일에 한국이 망하고, 8월 3일에 황제(皇帝)의 양국(讓國) 조서(詔書)가 본군(本郡)에 이르자, 공이 그 조서를 절반도 못 읽어서 기가 막혀 중지하고, 조서가 적힌 종이를 기둥 위에 묶어 매달아 놓았다. 내가 밖에서 돌아와 그 조서를 가져다 읽고 있자, 공이 말하기를 “나는 차마 들을 수 없으니, 너는 다른 데로 가서 읽어라.” 하므로, 내가 몹시 부끄러워 읽던 것을 중지하였다.】

▶경술년 : 1910년

 

【(9월) 5일에 공이 삼경(三更)까지 손과 바둑을 두다가 《황성신문(皇城新聞)》을 받아서 관솔불로 비추어 열람하였다. 이때 한 이웃 노인이 공과 함께 유숙(留宿)하려고 왔는데, 공이 술을 내다가 서너 잔을 대접하면서 말하기를 “내가 오늘 저녁에 일이 있으니, 당신은 내 아이의 처소에 가서 자시오.” 하니, 그 노인이 마침내 물러갔다. 이때가 바로 사경(四更)이었다. 공이 문을 닫고 앉아서 ‘절명시(絶命詩)’를 짓고 인하여 자제들에게 남길 유서(遺書)를 지었는데 “의당 죽어야 할 의리……”를 먼저 말하고, 이어서 “염습(斂襲)에는 난복(襴襆)을 사용하고 치상(治喪)은 검소하게 치러서, 내가 부모상을 당했을 때 가난함을 몹시 상심했던 뜻을 기억해 달라...”】

 

마지막 말은 황헌이 동생에게 자신이 죽은 뒤의 장례 절차를 부탁하는 말이었다. 황헌은 이날 자결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찾아온 이웃 노인에게 “저녁에 일이 있다”며 같은 방에서 함께 자기를 거절 한 것에서 이미 마음을 굳혔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서도 찾아온 손님과 밤늦게까지 바둑을 둔 모습에서 그의 초연함과 대범함을 엿볼 수 있다. 이날 밤 황현이 지었다는 ‘절명시(絶命詩)’는 4수(首)다.

 

一 首

어지러운 세상 속에 머리만 희어졌구나!

몇 번 목숨을 버리려 하였건만 그러질 못하였네.

하지만 오늘만은 진정 어쩔 수가 없으니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 아득한 하늘을 비추누나.

亂離滾到白頭年

幾合捐生却未然

今日眞成無可奈

輝輝風燭照蒼天

 

二 首

요사한 기운 뒤덮어 임금 별자리를 옮기니

구중궁궐 침침해라 햇살도 더디 드네

임금의 조칙(詔勅) 다시는 없을 터이니

구슬처럼 귀한 조서에 눈물만 하염없네.

妖氣掩蘙帝星移

九闕沈沈晝漏遲

詔勅從今無復有

琳琅一紙淚千絲

 

三 首

새 짐승도 슬피 울고 산천도 찡그리네.

무궁화 이 강토가 이미 깊이 가라앉았으니

가을 밤 등불아래 책 덮고서 옛일 돌아보니

이승에서 식자인(識字人) 노릇 정히 어렵구나.

鳥獸哀鳴海岳嚬

槿花世界已沈淪

秋燈掩卷懷千古

難作人間識字人

 

四 首

일찍이 나라 위한 하찮은 공도 없었으니

다만 인(仁)을 이루려 죽을 뿐 충성은 아니라

기껏 겨우 윤곡(尹穀)을 뒤따름에 그칠 뿐

때를 당해 진동(陳東)의 뒤를 밟지 못함이 부끄러워라.

曾無支廈半椽功

只是成仁不是忠

止竟僅能追尹穀

當時愧不躡陳東

▶윤곡(尹穀) : 중국 송(宋)나라 때 몽고군이 침입하여 성이 포위되어 함락 지경에 이르자 처자와 작별하고 분신자살한 선비.

▶진동(陳東) : 송나라 때 국정(國政)을 문란케 하여 수도를 개봉(開封)에서 남쪽의 임안(臨安)으로 옮기게 만든 육적(六賊)을 주륙(誅戮)하여 천하에 알리라는 상소를 비롯하여 여러 차례 격렬한 상소를 올렸다가 황제의 노여움을 사서 참수된 선비. 처형에 임해서도 당당했다고 한다.

 

[황현 <절명시첩(絶命詩帖)>]

 

황현은 종사(宗社)가 망하는 날 국민이면 누구나 죽어야 옳다고 여겼고, 특히 사대부들이 염치를 중하게 여기지 않고 직분을 다하지 못하여 종사를 망쳐놓고도 자책할 줄 모른다고 통탄하면서 자결을 시행하였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죽는 것은 충성하려는 것이 아니라 인(仁)을 이루기 위한 것이라고 선비의 기개를 밝혔다.

그 날 새벽 황현은 평소 병을 치료하기 위해 먹던 더덕주[沙蔘燒酒]에 아편을 타서 마셨다. 동생 황원은 이른 아침에 달려온 황현의 큰아들로부터 이 소식을 들었다.

 

【내가 가서 살펴보니, 공이 북쪽 벽 아래 누워 있으면서 나를 보고는 시선을 피하므로, 내가 두세 차례나 큰 소리로 외쳐 불러도 응답하지 않았다. 나는 공이 혼수상태인가 의심하여 붙들어 일으키려고 하자, 공이 손을 뿌리치며 말하기를 “네가 어찌하여 이런 짓을 하느냐? 내 정신은 평상시와 같고 조금도 아픈 데가 없다. 만일 약효가 없으면 장차 어찌하겠느냐?” 하였다. 아이 오줌과 생강즙을 드리자, 공이 그릇을 밀어서 엎어 버렸다. 내가 울면서 “하실 말씀을 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자, 공이 말하기를 “네 나이도 40을 넘어서 조금은 깨달아 아는 것이 있을 터인데, 어찌하여 이토록 나를 가엾게 여기느냐. 세상일이 이렇게 되면 선비는 의당 죽어야 하는 것이다. 만일 오늘 죽지 않으면 앞으로 반드시 날마다 듣고 보는 것들이 모두 마음에 거슬림을 견디지 못해 바싹 말라서 극도로 쇠약해질 것이니, 그렇게 말라 쇠약해져서 죽는 것이 어찌 빨리 죽어 편안함만 하겠느냐.” 하였다.】

 

황현은 그날 낮부터 정신이 점차 혼미해지다가 7일 새벽닭이 두 번째 울 때에 운명하였다.

선생은 당시 56세이셨다.

 

[채용신 <황현 초상>, 120.7 x 72.8cm, 국가지정문화재 보물 제1494호, 전라남도 순천시]

 

이 초상화는 황현이 자결하기 전 해인 1909년에 천연당(天然堂)이라는 사진관에서 찍은 사진을 보고 1911년 5월에 채용신(蔡龍臣)이 그린 것이다.

 

 

 

참고 및 인용 : 매천집(한국고전번역원), 독립운동가(국가보훈처), 인물한국사(조재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