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선조들

토정(土亭) 이지함

從心所欲 2020. 8. 18. 18:41

《조선왕조실록》에는 조헌이 평생에 세 인물을 스승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신이 이 세상에서 스승으로 섬기는 사람이 셋이 있는데 이지함·성혼·이이입니다. 세 사람이 성취한 학문은 다른 점이 있지만 깨끗한 마음과 욕심을 적게 가지는 자세, 그리고 뛰어난 행실이 세상의 모범이 되는 것은 똑같은데, 신이 일찍이 그들의 만에 하나라도 닮아보려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제독(提督)의 임무를 맡고 나서 알량한 재주와 견문을 헤아리지 않고 세 사람이 신에게 가르쳐 준 것으로 어진 선비들을 깨우치려 하였으나...】(《선조수정실록》 선조 19년(1586년) 10월 1일 3번째 기사)

 

조헌이 스승으로 꼽은 세 사람 중 이이와 성혼은 이름이 널리 알려진 유학자들인 반면, 이지함은 「토정비결」이 먼저 떠올라 의아한 생각이 들 수도 있다.

「토정비결(土亭秘訣)」은 한 해의 운수를 알아보는 대표적인 도참서(圖讖書)인데 ‘공맹(孔孟)과 정주(程朱)가 아니면 배우지 않았다’는 골수 유학자 조헌이, 길흉화복이나 점치는 책을 지은 이지함을 스승으로 섬겼다는 것은 쉽게 상상이 가지 않는 일이다. 그러나 토정(土亭)이라는 이름이 앞에 붙어 있어 일반적으로 토정(土亭) 이지함(李之菡 1517 ~ 1578)이 지은 것으로 알려진 「토정비결」을 정작 이지함이 지었다는 증거는 없다. 이지함의 신통력을 주제로 한 수많은 설화들이 전하고, 정사(正史)에도 예사롭지 않은 그의 기행이 실려 있지만, 이지함은 한산 이씨라는 사대부 명문가의 학자였다. 고려 말의 저명한 성리학자 목은 이색이 그의 7대조이며, 북인의 영수였던 이산해(李山海)의 작은 아버지로 일찍 부친을 여읜 이산해를 가르치고 키웠으며 이산해는 영의정의 자리까지 올랐다.

 

조헌의 상소문에 들어있는 이 글보다 8년 앞서 《선조수정실록》선조 11년(1578년) 7월 1일자에는 이지함의 졸기(卒記)가 실려 있다.

 

아산 현감(牙山縣監) 이지함(李之菡)이 졸(卒)하였다. 지함의 자(字)는 형중(馨仲)인데 그는 기품이 신기하였고 성격이 탁월하여 어느 격식에도 얽매이지 않았다. 모산수(毛山守) 정랑(呈琅)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초례를 지낸 다음 날 밖에 나갔다가 늦게야 들어왔다. 집 사람들이 그가 나갈 때 입었던 새 도포를 어디에 두었느냐고 물으니, 홍제교(弘濟橋)를 지나다가 얼어서 죽게 된 거지 아이들을 만나 도포를 세 폭으로 나누어 세 아이에게 입혀주었다고 하였다.

그는 어려서 글을 배우지 않았었는데 그의 형 이지번(李之蕃)의 권고를 받고 마침내 분발하여 학문에 주력하면서 밤을 새워 날이 밝도록 공부하곤 했다. 그리하여 경전(經傳)을 모두 통달하고 온갖 사서(史書)와 제자백가의 책까지도 섭렵하였다. 이윽고 붓을 들어 글을 쓰게 되면 평소에 익혀온 것처럼 하였다. 그래서 과거에 응시하려고까지 하였는데 마침 이웃에 신은(新恩)을 받고 연희(宴戲)를 베푼 자가 있었다. 그것을 본 그는 마음속으로 천하게 여기고 마침내 그만두었다. 하루는 그 부친에게 고하기를,
"아내의 가문에 길할 기운이 없으니 떠나지 않으면 장차 화가 미칠 것입니다."
하고는, 마침내 가솔을 이끌고 떠났는데, 그 다음 날 모산수 집에 화가 일어났다. 그는 사람들을 관찰할 때 그들의 현부와 길흉을 이따금 먼저 알아맞히곤 했는데 사람들은 그가 무슨 수로 그렇게 알아맞히는지 아무도 몰랐다.

그는 평소에 형제와 우애를 돈독히 하여 따로 거처한 적이 없고 상사(喪事)와 제례에 있어서 전부 고례(古禮)대로만 하지 않았다. 죽은 사람 섬기기를 살아 있는 이 섬기듯이 하였는데 형이 죽자 심상(心喪) 삼년의 복을 입으면서 ‘형님이 실상 나를 가르치셨으니 이것은 형님을 위한 복이 아니고 스승을 위해 입는 복(服)이다.’ 하였다. 그리고 그는 처신하기를 확고히 하되 여색을 더욱 조심하였다. 젊은 시절에 주·군(州郡)을 유람한 적이 있는데 수령과 군수가 이름난 기생을 시켜서 온갖 수단을 다하여 시험해 보았지만 그는 끝내 마음을 움직이지 않고 극기(克己)로 색욕을 끊었다.

그는 열흘을 굶고도 견딜 수 있었으며 무더운 여름철에도 물을 마시지 않았다. 초립(草笠)을 쓰고 나막신을 신은 채 구부정한 모습으로 성시(城市)에 다니면 사람들이 서로 손가락질하며 웃었으나 그는 아무렇지 않게 여겼다. 어떤 때는 천리 먼 길을 걸어서 가기도 하였으며 배를 타고 바다에 떠다니기를 좋아하여 자주 제주도에 들어가곤 하였는데 바람이 일어날 것을 미리 알고 조수의 시기를 알았기 때문에 한 번도 위험한 고비를 겪지 않았다.
또 선친의 산소를 위하여 바닷물을 막아 산을 만들려고 수천 석의 곡식을 마련하여 모았지만 끝내 이루지 못하고 말았다. 교우 관계로는 이이가 가장 친했는데 이이가 성리학을 공부하라고 권하자, 지함이 말하기를,
"나는 욕심이 많아서 할 수가 없다."
하니, 이이가 말하기를,
"공(公)은 무슨 욕심이 있는가?"
하자, 지함이 말하기를,
"사람 마음의 향하는 바가 천리(天理)가 아니면 모두 인욕인데, 나는 스스로 방심하기를 좋아하고 승묵(繩墨)으로 단속하지 못하니 어찌 욕심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그는 항상 말하기를,
"내가 1백 리 되는 고을을 얻어서 정치를 하면 가난한 백성을 부자로 만들고 야박한 풍속을 돈독하게 만들고 어지러운 정치를 다스리게 하여 나라의 보장(保障)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하였는데, 말년에 아산군(牙山郡)에 부임하여 정치를 하게 되었다. 그의 정치는 백성 사랑하는 것으로 주장을 삼아서 해를 없애고 폐단을 제거하는 것으로써 한창 시설을 갖추어나갔는데 갑자기 병으로 졸하니, 고을 사람들은 친척이 죽은 것처럼 슬퍼하였다.

지함은 일찍이 용산(龍山)의 마포 항구(麻浦港口)에 흙을 쌓아 언덕을 만든 다음 그 아래에는 굴을 만들고 위에는 정사(亭舍)를 지어 자호를 토정(土亭)이라 하였다. 그 뒤에 비록 큰물이 사납게 할퀴고 지나갔지만 흙 언덕은 완연하게 그대로 남아 있었다.
▶모산수(毛山守) 정랑(呈琅) : 이정랑(李呈琅, 미상 ~ 1549년). 명종 4년인 1549년 모반의 관련자로 체포되어 국문을 받았다. 이정랑(李呈琅)은 혐의 자체를 부인하였지만 심문이 거듭되면서 가중되는 형장을 이기지 못하고 사망하였다.
▶그의 형 이지번(李之蕃) : 이산해의 아버지
▶신은(新恩) : 과거(科擧)에 새로 급제(及第)한 사람. 또는 새로 과거에 급제하여 나라의 은혜를 입는다는 뜻
▶승묵(繩墨) : 먹줄통과 먹줄이라는 뜻이나, 법도(法度)나 준칙(準則)을 의미.

 

이지함은 1517년 충남 보령에서 태어났다. 14살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 형 이지번(李之蕃)에게 가르침을 받았고, 16살 때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난 뒤 형 이지번과 함께 한양으로 올라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에 따르면 이지함의 아버지 이치(李穉)는 이미 1530년에 작고한 상태라 장인 이정랑이 역모가담자로 몰려 죽은 1549년에, 처가에 닥쳐올 화를 부친에게 고하고 떠났다는 위 실록의 기사는 떠도는 이야기를 옮겨 적은 것에 불과할 가능성이 높다.

 

이지함에 대한 설화는 「어우야담(於于野譚)」, 「금계필담(錦溪筆談)」, 「동야휘집(東野彙集)」등에 100편이 넘게 전해지는데 그 내용은 이지함의 기행을 비롯하여 앞일을 미리 내다보는 능력, 신술(神術)을 부리는 능력 등을 다루고 있다. 마을의 물난리, 배의 사고, 후손의 횡액 등을 예견하는가 하면, 10년 후에 임진왜란이 일어날 것을 예견했다는 이야기부터, 조카 이산해가 사윗감을 골라 달라고 하자 한음(漢陰) 이덕형을 추천하면서 그가 이산해보다 먼저 재상이 될 것을 예언하였는데 실제로도 그렇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또 중으로 둔갑한 호랑이를 물리치기도 하고, 사람으로 둔갑할 줄 아는 호랑이를 부려 멧돼지를 산채로 잡아 임금에게 바치는가 하면 축지법으로 중국을 왕래하고, 돌을 금과 개구리로 변하게 하는 신술을 부려 형수와 조카를 깨우치기도 한다.

설화 속의 이지함은 마음만 먹으면 돈을 버는 것도 일이 아니었다. 양식이 떨어졌다는 아내의 말을 듣고, 계집종에게 놋그릇을 주면서 경교(京橋)에 가면 그것을 사자는 노파가 있을 거라며, 한 냥을 받고 팔아오라고 한다. 그리고는 그 돈으로 다시 은수저 한 벌을 사오게 한 후, 경기감영 앞에서 은수저를 잃어버리고 급히 은수저를 구하는 사람에게 15냥을 받고 팔아오게 한다. 그런 뒤 다시 한 냥을 가지고 팔았던 놋그릇을 다시 사오고, 나머지 14냥을 아내에게 주어 쌀과 땔감을 마련하게 하였다는 이야기다.

 

신상에 관해서는 이런 설화가 있다.

이지함이 어머니 묏자리를 잡을 때 지관이 그곳에 묘를 쓰면 첫째와 둘째 아들 쪽으로는 영상이 줄줄이 나오지만 막내아들 쪽으로는 벼슬 인연이 없게 된다고 하였다. 이지함은 집안의 넷째 아들로 막내이고 큰 형 이지영은 일찍 죽어 둘째인 이지번이 사실상 큰 아들이었다. 이에 이지번은 다른 자리를 알아보자고 하였으나, 이지함이 극구 이지번을 설득하여 그 자리에 묘를 썼다. 그래서 후에 두 형의 아들들은 높은 벼슬을 하였으나 이지함의 아들들은 벼슬을 하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토정비결」에 대한 설화도 있다.

이지함에게 딸이 하나 있었는데 딸의 관상을 보니 가난하여 밥을 얻어먹을 정도로 가난하여야 살지, 부자로 살면 단명할 것 같았다. 그래서 딸을 거지와 혼인시켜 움막에 살게 했는데 막상 딸이 밥을 구걸하는 것을 보게 되자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그래서 토정비결을 만들어 주고 그것으로 남의 운수를 봐주고 살게 했다. 그랬더니 딸이 그 책으로 보아준 운수가 백발백중으로 들어맞아 딸은 금세 부자가 되었다. 그러자 부자가 된 딸이 죽게 될 것 같아 또 염려가 된 이지함은 토정비결을 다시 가져오라고 해서 중간 중간을 틀리게 고쳐 놓았다. 그런 까닭에 지금 토정비결이 맞기도 하고 안 맞기도 한다는 것이다.

 

설화 속에 등장하는 이지함은 검소하고 백성을 염려하며 또 자신에게 닥칠 화를 알면서도 그것을 바꾸려하지 않고 운명에 순종하는 모습으로 그려졌다. 이는 그가 실제로 지방 고을 수령으로 근무하면서 보여준 검소함과 백성을 사랑했던 행적이 반영된 결과이다.

 

[추사 김정희 <고사소요도(高士逍遙圖)>, 지본수묵 24.9 x 29.7cm, 간송미술관]

 

이지함은 원래 한 곳에 얽매이거나 구속되는 것을 싫어했다고 한다. 송강 정철의 아들인 정홍명(鄭弘溟)은 자신의 수필집인 「기옹만필(畸翁漫筆)」에 이지함에 대하여 ‘그가 강해(江海)를 떠돌아다니며 방랑 행각을 한 것은 세상을 싫어해서만이 아니라 구속받는 것을 피하려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라 한다’고 기록했다. 이산해 또한 숙부 이지함의 묘갈명(墓碣銘)에 ‘배 타기를 좋아하여 큰 바다를 마치 평지처럼 밟고 다니셨다. 나라 안 산천을 멀다고 가보지 않으신 곳이 없었으며, 험하다고 건너보지 않으신 곳이 없었다. 간혹 여러 차례 추위와 더위가 지나도록 정처 없이 돌아다니시기도 하였다.’고 적었다.

 

이지함이 57세 때인 1573년, 삼공(三公)과 이조(吏曹)가 같이 의논하여 ‘학행(學行)이 두드러지게 알려진 인물들에게 참상(參上)의 벼슬을 제수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며 5인의 인물을 추천하였는데 여기에 이지함이 포함되었다. 선조가 이를 허락하여 6월 5일 이들에게 종6품직이 제수되었다. 그런데 한 달 뒤인 7월 6일 이지함이 형 이지번(李之蕃)의 병 때문에 한양에 왔다가 ‘6품 벼슬에 제배(除拜)되었다는 말을 듣고는 귀를 씻고 곧 돌아갔다.’는 기사가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는 이내 이지함은 사직하였다. 그런데 그 후에 어떤 과정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선조수정실록》선조 7년(1574년) 8월 1일자에는 이런 기사가 실렸다.

 

【포천 현감(抱川縣監) 이지함이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지함은 원으로 있으면서 스스로의 처신을 검소하게 하고 백성 보기를 자식처럼 하였다. 고을이 빈약하여 곡식이 모자라자 조정에 건백하여 해읍(海邑)의 어량(漁梁)을 절수(折受)받아 곡식을 사서 빈약한 재정을 보충하게 해 줄 것을 청하였으나, 조정이 따라주지 않았다. 지함은 본디 고을 원으로 오랫동안 머무를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곧 병을 핑계하여 사직하고 돌아갔다.】

 

포천 현감으로 간 이지함이 고을의 재정이 궁핍함을 보고 황해도 풍천부의 염전을 임시로 포천에 속하게 하여 소금을 곡식과 바꾸어 식량 부족을 해결할 수 있게 해달라는 상소를 올렸다. “고기잡이와 소금 굽는 일에 지원자를 모집하여 그 이익을 백성과 나누면, 국가는 한 섬의 곡식도 소비하지 않고 한 사람의 인력도 번거롭게 하지 않고서도 만 사람의 삶을 건질 수 있으며, 현은 백 년을 보존할 수 있습니다.”고 호소했지만 조정에서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바로 사직해버린 것이다.

그 뒤 1578년에 아산 현감이 탐욕을 부리다가 관직을 그만두자 조정은 이지함을 아산 현감으로 임명하였다. 아산 현감 시절의 이지함을 이긍익(李肯翊:1736 ~ 1806)의 『연려실기술』에서는 이렇게 기록하였다.

 

【이지함은 유민(流民)들이 해진 옷을 입고 걸식하는 것을 가엾게 여겨 큰 집을 지어 그들을 수용하고, 사농공상 중 하나를 업으로 삼아 살도록 했는데 직접 가르치며 이끌어 각자 의식(衣食)을 자급할 수 있게 하였다. 가장 능력이 떨어지는 이에게는 볏짚을 주어 미투리를 만들게 했는데, 그 일을 친히 감독하여 하루 10짝을 만들어 시장에 내다 팔게 했다. 남은 이익을 축적하니 몇 개월이 지나지 않아 의식이 모두 풍족해졌다.】

 

이지함이 아산현감으로 부임한 해에는 계속되는 흉년으로 백성들이 먹고 살기가 더욱 힘들었다. 그래서 한 고을에 흉년이 들면 굶주린 백성들이 아직 양식이 있는 집으로 몰려가 모두 먹고, 양식이 떨어진 그 집 식구들까지 거지가 되어 이웃 고을로 몰려가는, 이른바 떠도는 빈민 집단이 생겨났다. 결국 대궐 앞까지 이들이 몰려들 정도로 나라가 온통 유랑민으로 가득 찼는데, 충청남도 아산 지역에도 몰려들었다. 이에 이지함은 관아 내에 환곡(還穀)을 저장하여 두던 곳집을 깨끗이 치우고 수리하여 걸인청(乞人廳)을 설치하여 유랑 빈민들을 그곳에 수용하였다. 이지함은 그들에게 양곡을 베풀어 먹이는 한편, 의식(衣食)의 기반을 만들어주기 위해 노약자와 병자는 새끼를 꼬는 등 쉬운 일을 시키고, 젊고 건강한 사람들은 땅을 개간하거나 고기잡이를 시켰으며, 손재주가 좋은 사람에게는 도구를 마련해주어 수공업에 종사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지함은 현감으로 임명된 그 해 여름에 병을 얻어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토정유고(土亭遺稿)』는 그의 문집으로, 시문과 상소문, 묘갈명(墓碣銘) 등이 실려 있다.

포천현감 때 올린 상소문 <이포천시상소(莅抱川時上疏)>와 아산현감 시절 군정(軍政)의 폐단을 논하고 시정을 요구한 상소문 <이아산시진폐상소(莅牙山時陳弊上疏)>가 실려 있다. 같이 실려 있는 그의 <대인설(大人說)>은 많은 이들이 즐겨 찾고 인용하는 글이다.

 

【세상 사람들이 바라는 4가지가 있으니

안으로는 슬기롭고 굳세기[靈强]를 바라고 밖으로는 부귀(富貴)를 원한다.

귀하기로는 벼슬하지 않는 것보다 귀한 것이 없고

부(富)한 것은 욕심내지 않는 것보다 부유한 것이 없다.

강하기로는 다투지 않는 것보다 강한 것이 없으며

슬기롭기는 알지 못하는 것보다 더 슬기로운 것이 없다.

그러나 알지도 못하고 슬기롭지도 않은 것은 어리석은 자이고

다투지도 않고 강하지도 못한 것은 나약한 자이며

욕심도 없고 부유하지도 않은 것은 빈궁한 자가 그러하고

벼슬도 없으면서 귀하지 못한 것은 미천한 자가 그러하다.

벼슬하지도 않았는데도 귀하고, 욕심이 없는데 능히 부유하며,

다투지 않으면서 강하고, 아는 것 없이도 슬기로운 것은

오직 대인(大人)만이 가능한 일이다.】

 

[토정비결 여러 판본.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갈수록 필사본에서 인쇄본으로 바뀌는 과정이 보인다, 박종평 골든 에이지(출판사) 대표 소장품, 주간경향 사진]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는 조선 후기에 홍석모(洪錫謨)라는 인물이 우리나라의 연중행사와 풍속들을 정리하고 설명한 세시풍속집으로, 1849년에 발간된 것으로 추정한다. 그런데 이 「동국세시기」에는 새해 첫날에 “오행점을 던져서 그것으로써 신년의 운수를 점쳤다”라고 하면서 새해 운수를 점치는 여러 방법을 소개하고 있지만 토정비결을 보았다는 내용은 없다. 또한 「동국세시기」와 비슷한 시기에 쓰여진「열양세시기」나 「경도잡기」 같은 책에도 토정비결을 보았다는 내용이 없다고 한다. 이로 미루어 토정비결은 19세기 말경에야 보급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또한 「토정비결」은 150년간 계속 가필이 이루어지면서, 해방 이후가 되어서야 현재 형태의 「토정비결」이 갖추어졌다고 한다.

 

 

 

 

참고 및 인용 : 조선왕조실록, 토정 이지함 설화 연구(최운식 한국교원대학교 교수), 인물한국사(2013, 표정훈),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우리 선조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선비는 의당 죽어야 한다.  (0) 2021.01.23
한말 보수주의자 최익현(崔益鉉)  (0) 2021.01.21
조헌 2 - 칠백의총  (0) 2020.08.13
조헌 1 - 조선의 상소왕  (0) 2020.08.12
정조 16 - 친민(親民)·치국(治國)  (0) 2020.07.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