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그림

강세황 4 - 송도기행첩 1

從心所欲 2020. 7. 20. 18:00

후대의 사람들은 강세황의 그림을 강세황의 나이 45세를 기준으로 초기와 중기로 나눈다. 여기서 45세가 기준이 되는 것은 그 해에 강세황이 「송도기행첩(松都紀行帖)」을 그렸기 때문이다. 「송도기행첩(松都紀行帖)」의 그림들은 이전의 강세황 그림과는 확연히 다르다. 그 중에서도 <영통동구(靈通洞口)>라는 그림은 이전의 모든 조선 그림들과도 달랐다.

 

[강세황 「송도기행첩」의 7번째 그림 <영통동구(靈通洞口)>, 32.9 x 53.5cm, 국립중앙박물관]

 

조선의 산수화에 바위를 이렇게 그린 그림은 없었다. 조약돌처럼 매끈한 모양에다 입체감을 살리는 음영까지 넣었다. 강세황이 그간 터득한 서양화풍의 명암법을 적용한 것이라 한다. 어찌 보면 바위들이 공중에 떠있는 듯도 하다. 강세황이 그림에 적은 제발(題跋)의 내용은 이렇다.

“영통(靈通) 동구(洞口)의 여러 바위들은 크기가 집채만 한데다, 푸른 이끼들이 뒤덮고 있어 잠시 보기만 해도 눈이 어지러웠다. 세속에 전하기를 못 밑바닥에서 용(龍)이 나왔다고 하는데 믿을 만한 것은 못된다. 거대한 바위들이 둘러싼 경관 역시 보기 드믄 것이다.”

 

영통동구(靈通洞口)는 고려시대 송도의 북쪽 오관산(五冠山)에 있었다는 영통사(靈通寺)로 들어가는 길의 초입이다. 커다란 바위더미들에 압도된 듯 그 밑을 지나는 나귀 탄 선비와 시동(侍童)은 한껏 움츠러든 모습이다.

 

[<영통동구(靈通洞口)> 부분]

 

「송도기행첩(松都紀行帖)」은 1757년 강세황이 개성을 여행하며 개성의 명승지를 그린 그림들을 묶은 화첩이다. 이때 강세황이 개성을 가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당시 개성유수인 오수채(吳遂采, 1692 ~ 1759)가 강세황을 개성으로 초청한 것으로 두 사람의 선친인 강현과 오도일(吳道一)의 친분 때문이라는 설명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오수채가 강세황보다 근 20살 위인데다 백면서생인 강세황과는 달리 계속 관직에 있었기에 두 사람 사이에 어떤 친분관계가 있었는지는 짐작하기 어렵다. 서울시립대 이경화 교수는 <송도기행첩 연구>라는 글에서 오수채의 손자인 오언사(吳彦思)와 강세황이 안산에서 사귄 벗 허필(許佖)이 서로 아는 사이라, 허필을 통하여 강세황에게 그림 제작을 요청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봤다. 1757년 오수채는 기존에 있던 『송도지(松都誌)』에 1권을 증보하여 『송도속지(松都續誌)』를 편찬하였는데 어쩌면 강세황의 개성 방문은 이것과 연관성이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송도지(松都誌)』는 송도의 연혁, 인문지리, 행정사례 등을 수록한 지방지(地方誌)이다.

 

첩은 모두 17면으로 그림 16점과 시 두 편이 실려 있다. 송도의 송악산, 오관산, 천마산, 성거산(聖居山) 일대의 명승지들을 그렸다. 대략의 위치를 말하자면 송악산은 개성 외곽 북쪽에 위치해 있고, 송악산에서 북동쪽에 오관산이, 오관산의 서북쪽에 성거산, 그리고 다시 성거산의 서쪽에 천마산이 자리잡고 있다. 첩을 처음 제작했을 당시에 허필은 이 그림첩을 ‘더위를 없애준다’는 뜻에서 <무서첩(無暑帖)>으로 불렀다고 했다. 이후 해주(海州) 오씨 집안에서 간직해왔을 이 화첩의 현재 표지는 ‘표암선생유적(豹庵先生遺蹟)’으로 되어있다.

 

[「송도기행첩」표지, 국립중앙박물관]

 

표지에는 성재(惺齋)가 제첨(題签)했다고 되어있다. 성재(惺齋)는 김태석(金台錫, 1875 ~ 1953)이라는 조선 말기 및 대한제국의 문신이자 서예가이다. 어떤 연유로 표제를 쓰게 되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으며, 그 후 이 화첩이 다시 발견된 것은 1971년 성북동에서 동원미술관을 운영하던 이홍근이라는 문화재수집가의 소장품 속에서였다. 당시 이 화첩을 발견한 최순우 국립중앙박물관장이 ‘송도기행첩’이라는 이름으로 학계에 소개하면서, 이후로는 송도기행첩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홍근 선생은 1980년 작고하면서 이 화첩을 포함하여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문화재 2천8백99점을 국가에 헌납하였고 그래서 현재 이 화첩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화첩의 제일 첫 번째 그림은 <개성전경(開城全景)>이다. 송도기행첩이라 했으면 ‘송도전경’으로 불러야 마땅할 텐데 누군가가 1970년대의 개념으로 부주의하게 개성을 끌어다 붙이는 바람에 ‘개성전경’ 또는 ‘개성시가(市街)’로 불리는 그림이 되었다.

 

[강세황 「송도기행첩」의 첫 번째 그림 <개성전경(開城全景)>, 32.9 x 53.5cm]

 

성의 남문루에서 조망한 당시의 개성 시가이다. 기와집이 질서정연하게 자리 잡은 개성 시가지가 한 눈에 들어오는데,

대로 주변의 집만 그리고 나머지 지역은 생략한 듯하다.  시가지 끝에 당당한 기세를 자랑하고 있는 산은 개성의 진산(鎭山)인 송악산(松嶽山)이다. 산 전체가 주로 화강암의 큰 바위로 되어 있는 송악산은 높이 488m로, 262m인 서울의 남산보다는 꽤 높은 편이다. 대로가 멀어질수록 점점 좁아지는 것은 서양화의 초점 투시법을 구사한 것이고 그에 원근법까지 사용하여 이전의 조선 그림들과는 확실히 다른 느낌이다.

 

[강세황 「송도기행첩」 두 번째 그림 <화담(花潭)>]

 

남인의 영수였던 미수(眉叟) 허목(許穆, 1595 ~ 1682)의 글에 의하면 “오관산 아래에 영통사가 있으며, 영통사 골짜기 어귀에 화담이 있다. 이 담 위에 예전에 은거한 선비 서경덕의 산정이 있었으며, 지금 여기에 화담(花潭)의 사당이 있고, 그 위에 그의 무덤이 있다”라는 기록이 있다. 황진이, 박연폭포와 함께 송도의 3절(三絶)로 꼽히며, 주기론(主氣論)의 선구자이기도 했던 서경덕(徐敬德, 1489 ~ 1546)은 중년 이후에 화담 옆에 초막을 짓고 학문에 열중했다고 하는데, 그의 호 화담(花潭) 역시 여기서 따온 것이다.

오관산(五冠山)은 산정에 갓처럼 둥글게 생긴 다섯 개의 봉우리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산 아래에 영통사가 있는 골짜기가 깊숙하고 산세가 겹겹이 둘러 있으며, 유수는 천천히 감돌아 흐르고 수목이 울창하다. 그 서쪽에 있는 다락의 경치는 송도에서 제일”이라는 기록이 있다.

 

[강세황 「송도기행첩」 세 번째 그림 <백석담(白石潭)>]

 

[강세황 「송도기행첩」 네 번째 그림 <백화담(百花潭)>]

 

백석담과 백화담은 모두 오관산 자락의 영통사 가는 길에 있는 못이다. 백석담은 영통동 입구에 있던 못으로 못 주변의 바위들이 희고 깨끗하여 백석담(白石潭)이라 하였다고 한다. 강세황은 그림에 “백석담도 역시 영통으로 가는 길옆에 있다. 돌이 눈처럼 희고 바둑판처럼 네모났다. 맑은 물이 그 위로 흐르고 사방의 푸른 산 빛이 나에게 뚝뚝 떨어지는 듯하였다. 그때 가랑비가 잠깐 개이자 경치가 더욱 뛰어나 매양 잊을 수가 없다(白石潭亦在靈通路傍. 石白如雪, 方如棊局. 淸流布其上, 四山蒼翠欲滴余. 時微雨乍晴, 景尤絶勝, 每不能忘也)”라고 적었다.

 

[강세황 「송도기행첩」 다섯 번째 그림 <대흥사(大興寺)>]

 

대흥사는 송도 북쪽의 천마산과 성거산(聖居山)을 잇는 대흥산성(大興山城) 안에 있는 수십 개의 암자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절이다. 대흥산성은 고려 때의 석축 산성으로 그 길이가 약 10km에 달한다고 하며 천마산성, 성거산성으로도 불린다. 대흥사는 단순한 절이 아니라 군량미를 비축하는 승창(僧倉)이 있어 군기고와 화약고를 두었던 군사시설물이기도 했다. 이곳은 명승지라는 의미보다는 『송도속지』 편찬과 관련하여 오수채의 요청에 의해 그려졌을 가능성도 있을 것 같다.

청심담(淸心潭)은 천마산에서 흘러내린 물이 모인 성거산 방면에 있는 못이다.

 

[강세황 「송도기행첩」 여섯 번째 그림 <청심담(淸心潭)>]

 

[강세황 「송도기행첩」 여덟 번째 그림 <산성남초(山城南譙)>]

 

산성남초(山城南譙)는 대흥산성의 남쪽 문루라는 의미이고 너머 보이는 우뚝한 산은 인달봉(因達峰)이라 한다. 황해북도 장풍군 월고리 서쪽과 개성시 박연리와의 경계에 있는 가파른 봉우리이다. 옛날 한 중이 이곳에 올라갔다가 너무 가팔라서 내려오지 못하고 안달을 떨다가 떨어져 죽었다는 우스갯소리가 전해지면서 ‘안달봉’이라고도 불린다 한다.

아래 <대승당(大乘堂)>은 대흥산성 안에 있는 임금의 행궁이다. <마담(馬潭)>은 폭포 아래가 말구유와 닮았다여 이름 지어진 못으로 성거산 대흥동에 위치해 있다고 한다.

 

[강세황 「송도기행첩」 아홉 번째 그림 <대승당(大乘堂)>]

 

[강세황 「송도기행첩」 열 번째 그림 <마담(馬潭)>]

 

 

 

참고 및 인용 : 국립중앙박물관 선정 우리 유물 100선(이수경, 2011, 국립중앙박물관), 북한지역정보넷, 조선향토대백과(2008. 평화문제연구소),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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