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그림

강세황 5 - 송도기행첩 2

從心所欲 2020. 7. 21. 18:16

[강세황 「송도기행첩」 열한 번째 그림 <태종대(太宗臺)>]

 

태종대는 성거산(聖居山)에 있는 넓고 평평한 바위다. 송도기행첩에는 강세황이 개성을 방문한 시기를 따로 밝히지는 않았지만 다른 자료들을 통하여 음력 7월로 추정되고 있다. 더운 때에 산길을 오르다 마침 태종대의 너른 바위를 만났으니 어찌 흐르는 시원한 물에 발을 담는 호사를 마다할까! 바위 위에 종이를 펼쳐놓은 이는 아마도 강세황일 것이다. 조선 산수화에 색을 따로 써서 물을 그리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런데 세족하는 선비가 앉은 바위 가장자리에 옅은 흰색을 칠해 바위가 물에 잠겨 비치는 모습을 그려냈다. 이 역시 서양화풍의 영향이라 한다.

 

[강세황 「송도기행첩」 열두 번째 그림 <박연(朴淵)>]

 

그 유명한 박연폭포다. 이긍익(李肯翊, 1736 ~ 1806)의 『연려실기술』에는 “박연은 천마산과 성거산의 두 산 사이에 있다. 형상이 돌로 만든 둑과 같아 넘어다보면 아주 검다. 못 중심에 솟아나온 반석이 있는데 선바위라고 한다.”고 되어있다.

폭포의 높이 37m, 너비 1.5m로, 우리나라에서 아름답기로 이름난 금강산의 구룡폭포(九龍瀑布), 설악산의 대승폭포(大勝瀑布)와 더불어 3대 명폭(名瀑)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폭포 아래에는 폭포수에 의하여 패인 둘레 120m, 직경 40m정도의 고모담(姑母潭)이라는 못이 형성되어 있다. 그림에서 폭포가 고모담에 떨어지는 곳 앞쪽에 있는 바위가 선바위이고 오른쪽 하단 언덕위에 있는 정자가 범사정(泛斯亭)이다.

 

[강세황 「송도기행첩」 13면 오수채의 시 <범사정(泛斯亭)>과 읍취헌(挹翠軒)의 시 < 관음굴에 묵다>]

 

오른쪽 부분은 『송도속지(松都續誌)』속 범사정(泛槎亭) 부분에 실려 있는 개성유수 오수채의 칠언율시라고 한다. 낙관한 두 개의 백문(白文)은 위의 것이 오수채의 호인 체천(棣泉)이고 밑의 것은 자인 사수(士受)이다. 따라서 오수채가 자신의 시를 직접 쓴 것이다. 시는 박연폭포를 읊은 것으로 보인다.

 

【중천에서 쏟아져 내려 쪼개며 흘러내리니

바로 곁에서 천둥이 치는 듯 먼지가 모두 없어진다.

놀란 새들은 뒤로 물러나서 어디로 날아가느냐

쨍쨍한 햇볕도 그늘 속에 가리어 어둑어둑하다

땀에 젖은데 흩뿌리어 차츰 시원해지니

몸을 난간에 기댄 채 그대로 돌아갈 줄을 모른다.

서쪽 길에 들어서 장쾌한 구경이 이보다 더 좋은 곳은 없을 것이니

구태여 상장대까지 붙잡고 오를 필요가 없게 되었다.】

 

오수채의 시에 이어 왼쪽 면에 朝登普...으로 시작되는 부분이 읍취헌(挹翠軒)의 시로. ‘숙관음굴(宿觀音窟)’이라는 칠언고시다. 읍취현은 연산군 때의 학자이자 관리로 조선에서 제일가는 한시인(漢詩人)으로 꼽혔다는 박은(朴誾:1479~1504)의 호이다. 관음굴은 박연폭포 상류에 위치한 절이다. 굴 안에 관음석상 2구가 있던 절이라 한다. 이 시는 강세황이 썼다.

 

【아침에 보현산 높은 봉 올랐다가 천고비경 대흥동에 들어가니

높은 숲 하늘 가려 해도 안 보이고 고목은 숱한 세월에 옹이만 남았네.

긴 시냇물 매우 맑아 바닥보이고 흰모래 널린 돌 멋대로 높였는데

아직 중양절 되지 않아 유감으로 물속에 비친 단풍 보지 못하누나

곧바로 내리쏟는 박연폭포는 허공에 걸린 형세 웅장도 한데

폭포에 물안개 생겨 보지 못하고 정신이 아찔하고 목이 움츠려드네.

산승이 가까이 못하게 알려주며 본시 인명은 한 순간에 달렸으니

우선 고모담에서 쉬라고 이르는데 너무도 장엄하여 터럭도 차가와라

대낮 천둥 번개에 하늘이 찢어지는 듯하고 큰 강에 작은 배 띄운 것 같구나.

웃으며 끄덕이니 기이도 하여라 십년간의 회포를 이제야 풀었네.

저녁 무렵 절에 들어 포단에 누우니 벽에 걸린 등잔불 깜박이는데,

싸늘한 비바람 깊숙이 스며들어 한 밤중 잠 못 이루고 애만 태웠네.

 

읍취헌이 대흥사에서 지은 시를 광지(光之)가 쓰다】

 

[강세황 「송도기행첩」 14면 읍취헌(挹翠軒)의 시 < 관음굴에 묵다> 나머지 부분]

 

화첩의 15면과 16면에는 한 면에 그림이 두 개씩 실려 있다. 15면은 오른편이 <태안창(泰安倉)>이고 왼쪽이 <낙월봉(落月峰)>이고, 16면은 오른편이 <만경대(萬景臺)>, 왼편이 <태안석벽(泰安石壁)>이다. 개성에는 군량미 창고는 앞의 대흥사를 포함하여 다섯 곳이 있었는데 태안창(泰安倉)도 그 중의 하나다.

 

[강세황 「송도기행첩」 열세 번째와 열네 번째 그림 <낙월봉(落月峰)>, <태안창(泰安倉)>]

 

[강세황 「송도기행첩」 열다섯 번째와 열여섯 번째 그림 <태안석벽(泰安石壁)>, <만경대(萬景臺)>]

 

첩의 17면은 강세황이 쓴 첩의 발문(跋文)이다,

 

[강세황 「송도기행첩」 17면 <발문>]

 

【오씨 아우는 사람됨이 그림을 좋아하여

집안에 보관한 화첩이 집을 채웠다네.

산수를 구경하러 다니는 어려움을 깨달아

좋은 산수를 그린 그림을 많이 가졌네.

방 안에서 노닐며[臥遊] 집과 정원을 나서지 않아도

금경(禽慶)과 상장(尙長)이 애써 한 고생과 같지

무미(無味) 속에 유미(有味)가 존재하니

화공의 그림이라도 오씨 아우가 다 안 다고는 못하리.

오씨 아우는 도시의 소란스러움을 싫어해

화첩을 들고 깊은 산골로 들어갔네.

나를 좋아하여 앞마을 사람처럼 여기며

기이한 문장과 의심스러운 뜻을 아침저녁으로 구하네.

이 첩은 세상 사람들이 한 번도 보지 못한 것이다.】

▶금경(禽慶), 상장(尙長) : 전한(前漢) 말에 갖가지 권모술수로 왕권을 찬탈한 왕망(王莽)의 신(新)나라 정권을 피하여 함께 오악(五嶽)을 유람했다는 은자(隱者)들.

 

‘이 첩은 세상 사람들이 한 번도 보지 못한 것(此帖世人不曾一目擊)’이라는 발문 끝의 구절을 보면 화첩에 대한 강세황의 자부심을 엿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기교에 대한 자랑이 아니라 남들이 해보지 못한 것을 새롭게 시도한 것에 대한 자긍심이었을 것이다.

글에서 강세황이 ‘오씨 아우[吳弟]‘라고 칭한 인물은 오수채의 손자인 오언사(吳彦思, 1734 - 1776)로 추정하고 있는데, 허필이 그에게 ’묘길상도‘를 그려준 일과 영조 30년인 1754년 21세 때 사마시에서 진사 병과 51위로 입격한 정도만 확인될 뿐이다.

 

[허필, <묘길상도>, 지본수묵, 30 X 98.1㎝, 1759년, 국립중앙박물관]

 

[허필, <묘길상도> 그림부분]

 

묘길상은 금강산 내금강지역에 있는 만폭동 골짜기의 높이 40m 벼랑에 새긴 고려시대의 마애불이다. 위의 <묘길상도(妙吉祥圖)’는 허필이 1744년에 다녀온 금강산 유람의 기억을 되살려 15년 뒤인 1759년, 나이 51세 때 그린 것이라 한다. 실제 풍경을 대상으로 하였으나, 석불을 살아 있는 스님의 모습으로 의인화한 것이 특이하다. 허필이 오언사를 위하여 그린 그림으로 알려져있다. 발문 왼쪽 끝에서 세 번째 줄에 ‘오상사욱여(吳上舍勗汝)’라는 문구가 보이는데, 상사(上舍)는 진사(進士)를 가리키고 ‘욱여(勗汝)’는 오언사의 자(字)이다.

 

 

 

참고 및 인용 : 송도기행첩 제발 풀이(chatelain님 블로그),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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