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가쟁명

시장길 가는 것보다 못한 믿음

從心所欲 2016. 6. 7. 09:15

 

 

혹시라도 자기 자식 기(氣)죽을까 노심초사하는 요즘 부모들에게는 정신 나간 소리로 들리겠지만, 예전 부모님들은 늘 자식들에게 “말과 행동을 조심하라!”는 말씀을 입에 달고 사셨다. 말과 행동이 사람의 됨됨이를 드러내는 기준이 되고 사람의 됨됨이는 사회적 신분과 관계없이 사람을 평가하는 가장 중요한 척도가 되는 사회였기 때문이다.

 

조선 중기 때까지만 해도 관료가 비리에 관련되어 자신의 이름이 오르내리면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의심을 받았다는 자체만으로도 자신의 행실을 부끄럽게 여겨 관직을 물러났다.

‘말은 그 한마디로 나라를 망하게도 흥하게도 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근거가 되며, 그러한 말은 윤리와 이치에 맞아야 하고 반드시 실천되어야 한다. 이러한 여러 요소를 갖춘 말의 실천인 언행은 군자에게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다. 언행은 인간 수양의 모델인 군자상(君子像)의 요건으로서 뿐만 아니라 가족과 사회 그리고 국가 등과 같은 공동체의 망(網)인 인간관계의 요체’ 라는 것이 사서삼경에 담겨진 언행에 대한 가르침이다.

 

이 가르침 속에 들어있는 언행(言行)은 단순히 말과 행동을 조심하고 삼가는 의미를 넘어 말과 행동이 표리부동하지 않고 일치해야 함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미더운 말과 돈독한 실천을 포괄하는 것이다.

이러한 유교적 사고관은 조선시대를 관통하여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 사회의 보편적 가치관으로 이어져왔다. 하지만 인품(人品)보다는 능력과 부가 우선시되는 사회로 변모하면서 이러한 가치관은 구시대의 유물로 전락해버리고 말았다.  그럼에도 용도폐기 되다시피 한 이 가치관을 세상 사람들이 여전히 적용시키는 곳이 있다.

바로 기독교인들에 대해서다.

 

자신들은 더 이상 필요 없는 것으로 제쳐놓고 살면서도 유독 교인들에게만은 이 가치관을 강요하면서 저들은 말과 행동이 다른 교인들을 비난하는데 주저함이 없다. 뿐만 아니라 세상의 비난은 점차 도를 더하면서 이제는 각개 교인을 넘어 교회 전체에 대한 비난으로 확대되고 있다.

예전에도 믿는 자들을 비하하는 말은 있었다. ‘예수쟁이’라는 말이다. ‘쟁이’라는 단어는 ‘어떤 것을 나타내는 속성을 많이 가진 사람’’의 뜻을 더하는 접미사이다. 따라서 부정적으로 쓰일 때에라도 ‘예수쟁이’는 기껏해야 예수에 미친 사람 정도의 뜻이다. 그런데 근자에 와서 기독교인을 비하하여 가장 널리 쓰이는 말은 ‘개독교인’이다. 개와 기독교를 합성한 말이니 그 비하의 수준은 감히 예수쟁이와는 비교할 수조차 없다. 그런 참담한 호칭의 배경에는 기독교인의 위선, 곧 말과 행동의 다름에 대한 비난이 깔려있다.

늘 하나님을 입에 달고 살기에 예수쟁이인줄 알았는데 세상사는 모습은 전혀 예수쟁이가 아니더라는 비난이다.

 

 

언행일치, 아니 조금 더 정확히 말해서 믿음과 행위가 서로 부합하는 신행일치(信行一致)는 성경의 일관된 가르침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왜 믿는 자들은 그 가르침대로 살지 못하는 것일까?

 

지행합일(知行合一)이란 말이 있다.

이 말은 흔히 지식(知)과 행위(行)가 분열되어 있는 것을 전제로 하여, 옳음을 알면 반드시 행하여 아는 것과 행위를 같게 해야 한다는 당위(當爲)를 뜻하는 실천 강조의 명제로, 언행일치를 강조하는 말로 해석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본래의 뜻은 왕양명의 "심즉리(心卽理)’설의 논리를 지식과 행위라는 도덕의 영역으로 연역(演繹)한 것으로서 단순한 실천강조론을 넘어서는 철학적 논리이다.

‘심즉리’설에서는 이(理) 또는 양지(良知)는 처음부터 마음속에 존재하는 것으로서 밖으로부터의 지식 획득은 필요치 않고, 행위는 양지를 실현시키는 존재로만 본다. 즉 규범은 이미 마음속에 내재하고 있으므로 행위는 그 표현에 지나지 않고 양자는 별개의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하나라는 것이다.

주자(朱子)와 육상산(陸象山)등이 주장했던 '규범(知)을 알지 못하는 행위의 타당성은 보증할 수 없다'는 ‘선지후행(先知後行)’설에 대한 반대 개념이다. 지행합일설에서 주목할 점은 양지와 행위는 별개가 아니라 처음부터 하나이며 행위는 양지의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는 부분이다.

 

믿음과 행함의 관계도 그런 것이다.

믿음과 행함은 별개가 아닌 하나이며 행함은 믿음의 표현에 지나지 않고 행함은 믿음을 실천하는 현상에 불과한 것이다.즉 행함이 없는 것은 믿음이 없는 때문이다.

일상적 생활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믿음에 따라 행동한다. 이 길로 가면 시장이 나온다고 믿기 때문에 매일 그 길로 시장에 가는 것이고, 이 버스를 타면 집 앞 버스 정류장에 내릴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그 버스를 타는 것이다. 과연 지금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은 길과 버스에 대한 믿음만큼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는가?

 

교인들에게 헌금과 봉사를 강조할 때마다 목사들이 전가의 보도처럼 꺼내드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야고보서 2장 17절)는 말씀이 있다. 이 말씀을 인용하는 목사들이 주로 주장하는 내용은 행함으로 믿음을 증명하라는 것이다. 하지만 믿음이 없는데 어떻게 믿음을 증명할 수 있는가! 헌금과 봉사를 많이 하면 믿음이 증명된다는 말은 면죄부를 팔 때의 사기성 궤변과 정확히 같은 것이다.

야고보서의 이 말씀은 '행함으로 믿음을 증명하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행함이 없는 것은 믿음이 없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강조한 말씀일 뿐이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함께 가장 큰 계명이라고 말씀하신 ‘이웃 사랑’을 믿는 자가 행하지 않는 것은 그냥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애초에 없는 때문이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한일서 3장 18절)는 말씀에도 불구하고 늘 입에만 사랑이란 말을 달고 사는 것은 그 말씀을 건성으로 듣기 때문이다.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야고보서 2:13)는 말씀에도 불구하고 긍휼 없는 심판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긍휼을 행하기에 인색한 것 역시 그 말씀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아는 것과 믿는 것은 다르다. 성경 말씀을 들어 알지라도 그 말씀들을 경홀히 여긴다면 그처럼 경홀히 여기는 말씀에 믿음이 있을 턱이 없다. 하나님이 정직과 공평과 의에 대해 말씀하셨어도(잠언 21:3), 그 말씀을 굳게 마음에 담아 믿음에까지 이르지 못하기 때문에 거짓을 말하는 데 부끄러움이 없고 약자를 무시하고 홀대하며 자신의 이익 앞에 공의를 헌신짝처럼 내팽개치는 것이다. 시와 때에 따라 일관성 없이 변하는 언행은 믿음이 없는 탓이고 자신에게 유익이 있다고 생각하는 말씀만 믿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는 온전한 믿음과는 상관없는 자기 혼자만의 가치관이고 신념일 뿐이다.

 

왕양명은 지(知)를 또한 ‘진지(眞知)’라고도 하였는데 지(知)가 ‘진지’가 되지 못하고 지행(知行)이 분열되는 것은 ‘사욕(私慾)’이 작용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지행합일의 필요조건으로서 ‘사욕’의 배제를 들었다. 그렇게 하면 지행합일의 문제는 당연히 풀린다고 보았다.

 

하나님 말씀을 아는 지식이 ‘온전한 믿음’이 되지 못하는 것은 세상의 염려와 재리에 대한 유혹과 같은 사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때문이다. 그 욕심을 내려놓아야 비로소 하나님 말씀에 대한 온전한 믿음을 가질 수 있다. 믿음이 확고해지면 굳이 애쓰지 않더라도 믿음에 따른 행함이 저절로 이루어져 신행합일(信行合一)의 문제는 자연스럽게 해결되는 것이다. 

자신은 믿음이 굉장히 좋은 것으로 알고 있지만 행하지 않는 교인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다. 못 알아 들을까봐 다시 이야기하자면 하나님 말씀대로 행하지 않는 것은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믿음이 없어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것은 개인의 문제다. 그러나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기는커녕 말만 넘치고 행함이 없는 것으로 남을 실족케 하는 것은 성령의 역사를 훼방하는 일이다.

예수님의 이런 말씀에 두려움이 없는 교인과 교회가 과연 하나님의 자녀이며 하나님의 교회인가?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마태복음 23:1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마태복음 23:15)

 

“실족케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있게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 저가 이 작은 자 중에 하나를 실족케

할진대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매이우고 바다에 던지우는 것이 나으리라.” (누가복음 17:1-2)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나의 말하는 것을 행치 아니하느냐” (누가복음 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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