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그림

진재 김윤겸 - 영남기행화첩 1

從心所欲 2020. 10. 15. 18:37

19세기 후반 널리 알려진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의 근간에는 순조비인 순원왕후(純元王后)가 있었다. 순원왕후는 김조순(金祖淳)의 딸이고, 김조순은 경종 때 영의정을 지낸 김창집(金昌集)의 4대손이다. 김창집은 숙종 때 영의정이었던 김수항(金壽恒)의 큰 아들로, 그에게는 5명의 아우가 있었다. 당시 김수항이 장동(壯洞)에 살았고 그 아들 6형제가 모두 문장으로 이름이 높아 세상에서는 그들을 ‘장동 김씨 형제’ 또는 가운데 돌림자를 따 '육창(六昌)'이라고 불렀다. 둘째가 정선의 스승으로 알려진 농암(農巖) 김창협, 셋째가 삼연(三淵) 김창흡이고, 넷째가 노가재(老稼齋) 김창업(金昌業)이다. 워낙 집안대대로 높은 벼슬을 지낸 인물이 많았기도 하고 또 그로 인하여 여러 정치 풍파에 시달렸던 탓인지 형 김창흡과 함께 김창업 역시 조정에서 여러 차례 내린 벼슬을 모두 마다하고 평생 벼슬길에 아예 뜻을 두지 않았다. 김창업은 지금의 성북구 장위동인 동교송계(東郊松溪)에 은거하며 거문고와 시 짓기를 즐기면서 사냥으로 낙을 삼았다고 하는데, 어려서부터 그림에 재주가 있어 젊어서도 그림 그리기를 즐겼으나 아버지로부터 그림에 마음을 빼앗겨 학업에 방해가 될까 걱정이니 손을 떼라는 충고를 받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런 김창업에게 서자가 있었는데 그가 진재(眞宰) 김윤겸(金允謙, 1711 ~ 1775)이다. 명문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서자라는 신분 때문에 그는 화가로 살았다.

 

[김창업 <추강만박도(秋江晩泊圖)>, 모시에 수묵, 20.5×18.5㎝, 간송미술관]

 

김윤겸의 백부인 김창협과 김창흡이 우리 강산의 아름다움을 소재로 한 시를 지으며, 한문시를 우리의 어감에 맞도록 어휘의 순서를 자유롭게 변화시킨 진경시(眞景詩)의 기틀을 마련하고, 그 문하의 겸재 정선이 진경산수화를, 사천(傞川) 이병연이 진경시를 꽃피워 조선의 진경문화의 절정을 이루게 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김윤겸과 정선은 35살의 나이 차가 있다. 김윤겸 역시 진경산수화를 그렸고, 집안 인맥으로 미루어 정선과의 연결 고리도 있음직 하지만 두 사람간의 사사(師事) 관계는 따로 확인되지 않고 있다.

영·정조 시대의 대표적 실학자인 성해응(成海應)이 김윤경의 그림을 "탈략혜경(脫畧徯徑)하여 자기만의 화의를 펼쳐내었다."고 평했듯이, 지금 전하는 김윤겸의 그림은 정선이나 동시대의 강세황과도 전혀 다른 개성과 특징을 보여준다. 영·정조 시절의 뛰어난 인물들을 기록한 「병세재언록(幷世才彦錄)」을 지은 이규상(李圭象)은 김윤겸의 그림이 "품격이 소쇄(瀟灑)하고 요조(窈窕)하여 기력이 있다."고 하였다.

 

김윤겸은 평생 전국을 유람하며 많은 진경산수화를 남겼는데, 그의 그림들은 경물을 대담하게 생략하거나 단순화시키고 압축시켜 그렸음에도 사의적(寫意的) 진경산수라기보다는 사실적 진경산수에 가깝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간결한 필치와 투명한 담채를 곁들여, 수채화처럼 맑고 청신한 느낌을 주는 특징을 보여준다.

《영남기행화첩(嶺南紀行畵帖)》은 김윤겸의 대표작 중 하나이다. 그가 경상도 진주목(晉州牧) 남동쪽에 있는 소촌역(召村驛) 찰방으로 있던 1770년(영조 46)경에 관할 인근인 합천, 거창, 함양, 산청과 동래 등 영남지역 명승지를 유람하고 그린 그림을 묶은 화첩으로 알려져 있다. 박지원과의 악연으로 유명했던 유한준(兪漢雋)이 찰방으로 떠나는 김윤겸을 송별하는 글 <송진재김극양윤겸위승소촌서(送眞宰金克讓允謙爲丞召村序)>를 지은 것이 1764년이어서, 김윤겸이 소촌 찰방으로 임명된 것은 그림을 그리기 6년 전쯤으로 짐작된다. 도화서 화원도 아니었던 김윤겸에게 비록 외관직이지만 종6품의 관직이 주어진 것은 아무래도 안동 김씨 중에서도 장동 김씨로 따로 불릴 만큼 위세가 높았던 집안의 덕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영남기행화첩》은 가야산의 합천, 지리산 자락의 함양, 거창, 산청과 부산의 해안지역까지 모두 14곳의 명승이 담겨 있는데, 원래화첩의 모습은 아니고 일부 작품이 결실되었을 가능성을 높게 보고 있다. 그럼에도 이 화첩은 영남지방의 명승지를 그린 몇 안 되는 작품 중 하나이고, 또 여러 작품이 함께 모여 있다는 점에서도 그 가치를 인정받아 부산광역시의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가 2017년 3월 8일 보물 제1929호로 승격되었다.

원래의 화첩은 펼쳤을 때 양면 전체에 하나의 그림을 그린 것인데, 현재의 첩은 그림을 펼쳐서 한 페이지에 한 작품씩을 표구한 형태로 바뀌었다. 지금 화첩을 소장하고 있는 동아대학교 박물관까지 세 번의 표구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작품의 크기도 원래의 것에서 변화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전체 열네 점의 그림 가운데 여덟 점에만 ‘眞宰’라는 주문방인(朱文方印)이 찍혀있고 나머지는 그린 곳의 지명만 적었다. 화첩의 그림 순서는 부산의 <몰운대(沒雲臺)>부터 시작된다.

 

[김윤겸 《영남기행화첩》 中 <몰운대(沒雲臺)> 지본담채, 30.1 x 45.9cm, 동아대 석당박물관]

 

예로부터 몰운대는 소나무 숲이 우거진 기암괴석의 바위섬으로 바위에 부딪치는 파도와 주변의 경관, 특히 몰운대에서 바라보는 바다 경치가 아름다운 것으로 유명한 명승지였다고 한다. 몰운대는 낙동강 하구와 바다가 맞닿는 부산시 다대동 지역으로, 16세기까지는 몰운도(沒雲島)라는 섬이었다가 그 뒤 낙동강의 토사 퇴적으로 인해 다대포와 연결되면서 육지가 되었다.

김윤겸은 몰운대의 소나무 숲을 듬성듬성한 소나무로 그 특징을 드러내고 바위섬을 최대한 돌출시켜, 좌하에서 사선으로 뻗어나간 형태로 묘사하면서 앞에 보이는 섬들까지 넣고 최대한 압축하여 몰운대에서 보이는 바다 경관을 가능한 넓은 시야로 보여주고자 노력했다.

 

[김윤겸 《영남기행화첩》 中 <영가대(永嘉臺)> 지본담채, 29.6 x 47.6cm, 동아대 석당박물관]

 

이성린의 《사로승구도》중 <부산(釜山)>과 같은 풍경이지만, 김윤겸은 <영가대>로 그림 제목을 썼다.

통신사 일행이 출발하기 전 해신제를 지내던 영가대(永嘉臺)는 1614년에 순찰사 권반(權盼)이 전선(戰船)을 감추기 위한 선착장을 만들면서, 파낸 흙이 언덕을 이루자 그곳에 망루(望樓)를 겸해 세운 8칸 누각이다. 처음 건립할 당시에는 이름이 없었는데, 1624년에 왜국사신을 맞이하기 위해 부산에 파견된 선위사(宣慰使) 이민구(李敏求)가 권반의 본향인 안동의 옛 지명 ‘영가(永嘉)’를 따서 이름을 붙였다. 영가대 왼쪽의 선착장은 일제강점기 때 경부선 철도공사를 하면서 일본인들이 매축(埋築)하였고, 영가대는 1917년 전차 선로를 부설하는 과정에서 일본 상인이 매입하여 지금의 동구 좌천동에 있던 능풍장(陵風莊)이란 그의 별장으로 옮겨진 후 흔적이 사라졌다고 한다.

 

[김윤겸 《영남기행화첩》 中 <홍류동(紅流衕)> 지본담채]

 

홍류동은 가야산 국립공원에서 해인사입구까지 이르는 4km 계곡으로, 가을 단풍이 너무 붉어 ‘붉은 물이 흐르는 길’이라는 뜻의 홍류동(紅流衕)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한다. 신라 말의 학자이며 문장가인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857 ∼ 미상)이 난세에 뜻을 펴지 못하고 방랑하다 마지막에 자리를 잡고 은거하며 수도하였다는 곳이다. 송림사이로 흐르는 물이 기암괴석에 부딪히는 소리가 최치원의 귀를 먹게 했다는 전설이 있다.

▶고운(孤雲) : 최치원의 자. 최치원은 호가 따로 없었다.

 

[해인사 가을 단풍]

 

[김윤겸 《영남기행화첩》 中 <해인사(海印寺)> 지본담채, 30.2 x 32.9cm]

 

그림의 왼쪽 숲 옆에 다리가 놓여있는 물길이 홍류동이다.

제일 위쪽 높은 축대 위에 나란한 두 채의 건물이 팔만대장경을 보관하는 장경판전(藏經板殿)이고 , 그 아래 벽면이 온통 붉은 2층 건물이 불전인 대적광전(大寂光殿)이다. 1817년 큰 불로 타버려 지금은 그림 속의 모습은 없고 그 기단 위에 다시 지어진 단층 건물이 서있다. 그 앞 구광루(九光樓)도 지금은 맞배지붕이지만 그림에서는 앞쪽으로 누마루를 달아낸 정(丁)자 형의 팔작지붕 누각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해인사에는 또 다른 최치원의 전설이 있다. 최치원은 해인사 대적광전 서쪽 언덕에 자그마한 정자를 짓고 그가 지낸 한림학사란 벼슬이름을 따 학사대(學士臺)라 이름했다. 여기서 최치원이 가야금을 켜면 수많은 학이 날아와 고운 소리를 들었다고 전하는데, 조용히 글을 읽고 시를 읊조리며 지내던 최치원이 어느 날 제자들에게 “지금부터 나는 이곳을 떠날 것이다. 이 지팡이를 꽂고 갈 터인데 만약 싹이 터서 잘 자란다면 내가 살아있는 것이니 학문에 전념하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져 버렸다. 선생은 이후 신선이 되었으며 선생이 꽂아 둔 지팡이가 자라 전나무가 되었다는 것이다.

김윤겸도 그런 전설을 들어 <해인사(海印寺)> 그림 대적광전 왼쪽 절벽 위에 휘어진 소나무 모양의 커다란 나무를 그렸다. 당시 해인사에서 이 나무가 갖는 전설의 비중이 꽤 컸던지 이 나무는 정선의 해인사 그림에도 등장한다. 그런데 김윤겸과 정선의 그림에 등장하는 나무 모습이 다르다. 정선은 전나무를 그렸고 김윤겸은 소나무를 그렸다.

 

[정선 <합천 해인사>]

 

[정선 <해인사도(海印寺圖)> 견본수묵담채, 25 x 24 cm]

 

학자이자 문신이었던 최흥원(崔興遠)이라는 이가 1757년 해인사를 관람하고 쓴 <유가야산록(遊伽倻山錄)>이라는 글에 ‘고운(孤雲)이 손수 심은 나무가 이미 말라버리고 그 등걸만 남았다. 지금 마침 2월이고 비가 오니 소나무를 심기에 적합하므로 종을 시켜 4그루의 작은 소나무를 캐서 그 곁에 심게 했다’는 구절이 있다. 이로 미루어 정선은 1757년 이전의 옛 전나무를 그렸고, 김윤겸은 1757년에 옮겨 심었다는 소나무를 그렸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참고 및 인용 :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 역대 서화가 사전(2011. 국립문화재연구소), 진재 김윤겸 필《영남기행화첩(嶺南紀行畫帖)》(이상국, 2019, 월간민화),